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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막례의 거침없는 입 : 혁명은 이토록 일상적으로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관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박막례는 노년 여성에 대한 뻔한 해석을 독점해 왔던 젊은이들로부터 해석과 발언의 권리를 되찾아왔다. (2019.09.30)
박막례의 유튜브 채널 <Korea Grandma>의 한 장면
유튜브 CEO 수잔 보이치키로부터 “유튜브가 추구하는 바를 담아낸 채널”이란 평을 받고, 구글 CEO 선다 피차이에게 “당신의 채널이 나에겐 큰 영감”이란 말을 들었다. 러쉬의 창업멤버 로웨나 버드의 집으로 초대받아 그와 함께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한 생태계 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스티브 첸 유튜브 창업자와 함께 세계지식포럼의 패널로 무대에 올랐다. 한국어 유튜브 생태계에서 그보다 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는 많지만, 그만큼 세상을 많이 바꾼 유튜버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튜브 ‘박막례 할머니’ 채널의 스타, 박막례 이야기다.
지난 1년간 박막례가 성취한 것에 비해 국내의 평가는 박한 편이었다. 손녀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인 김유라 PD가 “네이버 뉴스의 사회, 문화 뉴스 랭킹 1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반응이 없어 좀 서운하다고 할 정도로. 실로 그가 만나 대화를 나눈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새로 써 내려 가는 이들임에도, 언론의 관심 또한 그 실체에 비하면 미미한 편이다.
어쩌면 이와 같은 저평가는 ‘박막례 할머니’ 채널이 선보이는 콘텐츠의 성격에 대한 평가절하 탓인지도 모른다. 장 보고 돌아온 물건들을 꺼내 보여주고, 비빔국수 레시피를 선보이고, 계모임에 나가 오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평범한 노년 여성의 일상. 손녀에게 스마트폰에서 하트 이모티콘을 쓰는 법을 배우고, 딸과 함께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 기존의 엔터테인먼트 문법 안에서 대단히 새롭거나 매력적인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노년 여성이라 하면 쉽게 떠올릴 법한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림이다. 노년 남성이 그런 일상을 보여줬다면 다들 ‘독특하고 새롭다’고 했겠지만, 노년 여성이라면 응당 그럴 것이라 생각한 그림인 탓에 제대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려 노력해 볼 생각을 안 했으리라.
그러나 사실은 바로 그 지점이 박막례의 특이점이다. 한국에서 노년 여성의 삶은 언제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만 다뤄졌다. 어머니를 향한 애증의 사모곡의 소재가 된다면 모를까, 그 뻔하고 익숙한 일상의 노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직접 이야기하는 걸 허락받은 노년 여성은 거의 없었다. 박막례는 그 지점에서 거침이 없다. 세상을 떠난 자신의 남편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에두르는 법 없이 “내가 참 X 같은 놈을 만났어”라 일갈하고, 애써 만들어 둔 장아찌를 안 먹는 자식들을 향한 서운함을 감추지 않는다. 어떤 대단한 행사에 가더라도 그 타이틀에 짓눌리는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인스타그램에서 선보이는 서툰 맞춤법이나 오탈자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노년 여성에 대한 뻔한 해석을 독점해 왔던 젊은이들로부터 해석과 발언의 권리를 되찾아왔다. 그렇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사소한 맞춤법 오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뮤리엘 루카이저는 자신의 시 ‘케테 콜비츠’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관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실로 그렇다. 박막례가 제 삶을 제 관점에서 증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자, 세상은 열광했고 유튜브의 거물들이 그에게 만남을 청했다. 아직 한국 언론의 상당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눈치 못 챈 거 같지만, 박막례는 구독자 107만 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에서 오늘도 조용히 세상을 터뜨리는 중이다.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