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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책이 아닌 ‘다산이라는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파란 1·2』 다산의 두 하늘, 천주와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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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다산 선생에 관한 책을 아홉 권 냈습니다. 꽤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젊은 시절 다산은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더군요. 청년기를 추적하면서 ‘내가 다산 선생을 몰랐다’, ‘절반만 알았다’라는 생각을 깊이 했습니다. (2019.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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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5일, 하늘이 뚫린 듯한 폭우가 그친 후 노을 질 무렵, 명동성당 코스트홀에서 정민 교수의 『파란』  출간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이번 신작은 오랫동안 다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현재적 의미를 짚어온 정민 교수가 다산과 관련한 이전 논점들을 점검하고, 주변 사료를 꼼꼼히 뒤지고, 관련 연구자들과 만나 대화하며 촘촘하게 다산의 생애 궤적을 연대순으로 추적하며 뒤쫓은 책이다. 좀처럼 대중 강연에 나서지 않았던 그였기에 300석을 꽉 채운 관객들의 기대감이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정민 교수는 “외출을 자제해달라는 재난문자가 와서 어떻게 하나 했는데,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 자제력이 부족하신가 봅니다(웃음)”라는 가벼운 인사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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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폐되고 지워진 풍경들을 복원하는 일

 

다산 정약용은 우리에게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유수한 저작과 세계 문화유산이 된 화성 설계도면을 제작하고, 기중가와 유형거 등을 발명한 위대한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정민 교수는 다산에 관하여 작은 흠결 하나를 말해도 불끈 성을 내는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박제화된 성인 다산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숨 쉬고 고통받고 고민하던 청춘 다산, 그의 인간적 면모를 그리고 싶었다고 책 속에서 말한다. 그래야 다산 선생이 이룩한 성취들도 더욱 빛날 것이라 생각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파악할 때 선입견이 얹히고 색안경이 씌워지면 그의 실체를 보는 데 상당한 장애 요인이 되죠. 그래서 삶 속에는 여러 가지 변수들이 끼어들게 마련인데요. 정치가 종교와 결합되면 생각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내죠. 종교의 시선만 볼 때는 문제가 없는데 여기에 정치적 판단이 들어가면 복잡하게 엉키게 됩니다. 이러다 보면 한 사람의 정체성 파악에 파란과 굴곡이 발생해서 은폐되고 지워진 풍경들이 생기죠. 그늘이 만들어집니다. 다산 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산 선생의 두 개의 하늘! 젊은 시절 다산의 한쪽 어깨에는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가 얹혔고, 다른 한쪽엔 정조 대왕의 꿈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정조 대왕의 끔찍한 사랑을 어쩌지 못해 천주교를 멀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다산 선생에게 여러 가지 갈등과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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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두 달여 만에 진사 한영익이 이석에게 밀고하고, 이석은 채제공에게 보고하여 임금에게 재가를 받아 주 신부를 붙잡아 오게 했다. 이때 주 신부를 피신시킨 한 무관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았는데, 사료의 행간을 읽은 정 교수는 그가 다산이라고 밝힌다.

 

“『다산시문집』 속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내용이 완전히 말소됐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검열했습니다. 다산이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쓴 「자찬묘지명」에 주 신부 밀고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황심 토마스가 2년 후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당시 정황을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밀고 자리에 천주교 신자였다 배교한 무관 한 사람이 같이 있었고 그가 그길로 신부를 구출해 피신시켰다고 전합니다. 다산은 1791년에 배교했죠. 당시 무관직에 있었고, 이석과는 사돈 간이라 가까이 지냈지요. 또한 이런 자리에 아무나 입회할 수 없어요. 정확하게 다산입니다. 그런데 당시 어떤 기록에도 다산이 주 신부를 탈출시켰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1801년 주문모 신부가 돌아가실 때도 심문관이 말해요. 다산이 주 신부 외모에 대해 우리에게 자세히 일러줬는데, 잡아보니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니 다산은 죽이면 안 된다. 곧 다산은 주문모 신부를 가까이서 오랫동안 만난 적이 있던 것이죠. 이렇게 기록을 겹쳐서 보고, 행간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면 다산의 감춰진 혹은 다산 스스로 지운 부분에 희미한 자국들이 얼비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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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왜 우는지 아니?”

 

그렇다면 당시 18세기 지식인들에게 서학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조선은 1년에 두 번씩 중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 자제군관들을 함께 데려갔다고 한다. 공식 업무가 없는 이들은 이튿날 일종의 쇼핑가인 북경 유리창으로 향했다. 조선에 서점이 없던 시절, 유리창엔 서점이 30∼40개 즐비했는데 서점 하나당 책이 1∼2만 권씩 빽빽했고, 각 서점별로 다루는 전문 영역이 달라 헌책?신간?소설 등 주제별로 특화하여 서적을 취급하는 곳이 즐비했다고 한다.

 

“그 무수한 책들, 오만 백과사전 지식을 처음 만났을 때 만날 사서삼경, 사단칠정만 이야기하고 율곡집, 퇴계집만 읽어라 하던 상황에서 이들이 어땠을까요? ‘속았다, 이게 뭐지?’ 충격이 어마어마합니다. 연암은 북경 성당에서 유화를 처음 봅니다.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오색구름에 아기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것이었는데요. 묘사가 가관입니다. ‘아이가 병색이 완연한데 어미가 안타까워 그것을 안고 있는데 날개 달린 어린 마귀 새끼들이 막 날아다닌다.’ 그게 꼭 피가 돌고 살이 탱글탱글 만져지는 것 같고 천장에서 떨어질 듯해 어이쿠어이쿠, 피했다는 겁니다. 이러고 조선에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요? 말이 없어지거나 말이 많아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연암이 만주벌을 처음 갔습니다. 한번 들어서면 7일 동안 지평선에서 해가 떠서 지평선에서 해가 지는 끝없는 평야입니다. 여기 딱 들어서면서 연암이 ‘야 거 한번 울 만한 곳이다’ 그래요. 옆 사람이 물어보죠. ‘왜 좋은 데 와서 울어요?’ 그러자 연암이 다시 묻습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왜 우는지 아니?’ ‘살아갈 날의 괴로움이 기가 막혀 그렇겠죠?’ ‘그게 아니야. 배 속에서 얼마나 갑갑하고 깜깜했겠니. 그러다 열 달 만에 나왔는데 눈으로 빛이 쏟아지고 손발을 쫙 뻗어도 걸리는 게 없을 때, 그 통쾌함이 울음으로 터져 나오는 거야. 내가 이 조선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인간은 사농공상으로 갈려 싸우고 선비란 것들은 동서남북으로 갈리고, 대북이야 소북이야 노론이야 소론이야, 하도 치고받고 싸우니 꼴도 보기 싫은데 여기 오니 내가 문명 세계로 나오나 보다, 통쾌해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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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 사회 이대로 안 된다”

 

정민 교수에 따르면 당시 조선 내부 상황은 “숙종 시절에 자식을 바꿔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비참했다. “백골징포. 죽었는데 동사무소에서 사망신고를 안 받아줘요. 계속 군포세 내는 거죠. 황구첨정. 갓난애 출생신고하면 이튿날 입영신고서 나오는 격입니다. 도무지 살 수가 없잖아요.” 관리들은 가렴주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정감록 신앙이 조선을 강타했다. 이런 상황에서 숙종 장희빈 사건 이후로 80년간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은, 재지사족으로 지내며 온갖 수탈을 생생히 접했고, 중국에서 들여온 서학 서적들을 읽으며, 서학이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성호 이익 선생이 서학책을 보더니 ‘유학과 보완관계가 있다 읽어라’라고 했죠. 이후 성호학파가 안정복을 정점으로 하는 원리주의자와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혁신주의자 둘로 쪼개집니다. 공통점이 뭐예요? ‘조선 사회 이대로 안 된다, 바뀌어야 한다.’ 그 방법을 두고 원리주의자들은 ‘하?은?주 삼대의 고전적 이상을 회복해서 요순시대 정신으로 돌아가자’, 혁신주의자들은 ‘아니다, 그 경전을 서학 관점으로 다시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시야를 얻을 수 있다’로 갈려 사생결단합니다. 다산은 혁신주의자 그룹이었고, 여기서 남인이 간신히 조정에 들어가자마자 신서파, 공서파로 갈려 싸웁니다. 공서파는 나중에 적의 적은 적이라 노론과 결탁해 신서파 때려잡기에 나서고, 다산의 인생도 꼬이죠. 그런데 정조의 사람들은 전부 혁신파였습니다. 정조는 천주교를 내놓고 허락할 수는 없으나 천주교를 믿는 세력을 다 없애면 자기 팔다리를 잘라버리는 결과가 되니 알면서도 묵인하고 용납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심각한 모순, 아까 처음 말씀드린 파란이 예정된 것이죠.”

 

이후 정민 교수는 청년 다산이 살아가던 때 혼란한 역사적 배경과 마음속 갈등, 자생적으로 태동한 조선 천주교회의 가성직제도와 10인의 신부, 『만천유고』가 가짜라는 점 등을 열정적으로 강연했다. 700여 쪽에 달하는 책  『파란』  두 권은 이렇게 끝난다. “이제 여기서 젊은 날의 다산과 작별한다. 강진 유배 이후의 다산은 지금까지 만났던 다산과는 전혀 다른 다산일 것이다.” 파란만장하였던 젊은 다산과는 헤어졌으나, ‘정민의 다산독본’이라는 이름 아래 중노년의 또 다른 다산을 만나보기를 고대한다.


 

 

파란정민 저 | 천년의상상
절망과 고통에 처한 인간의 고뇌와 상황 대처 능력, 사각지대에 놓인 자료의 발굴에서부터 그의 인간적 결점과 그늘까지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살아 있는 다산 평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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