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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37화 : 산보 나온 연애 청춘처럼
『마터 2-10』 연재
이철은 이화동에서부터 대학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는 주위에 미행자나 잠복한 자가 없는지 세심하게 살피면서 혜화동 로타리 초입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오기로 했다. (2019. 08. 14)
“이런 일을 공개적인 대중활동으로 전개하여 우리는 좀 놀랐어요.”
이관수는 조국과 민중의 현장에서 멀어진 해외 활동가들의 모험주의에 대하여 탄식하며 말했고, 거기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무장투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쨌든 그쪽의 의향을 알아볼 필요는 있다고도 말했다. 이관수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 중얼거렸다.
“해방을 위해 싸우자는 것이니까 누구든 함께해야 되지 않겠소.”
이이철이 연락 사항을 전하고 이튿날 다시 찾아가니 이관수가 류재익의 전언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은 제안대로 만나겠다는 것과 시간과 날짜와 장소였다. 다만 두 사람이 만나는 접선 장소는 일차로 이이철과 상대방의 연락원 레포들이 만나고 나서 정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발생하면 회합은 파기될 것이었다.
김형신은 이십년대 초에 사회주의 보급이 빨랐던 마산에서 점원 서기 등으로 생활하면서 마산청년회와 마산노동회 마산해륙운수노동조합 등에 가맹하여 사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산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연이어 마산공산당을 조직했다. 이듬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자 김형신이 조직했던 마산 공청과 공산당은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마산 세포 조직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그는 제일차 조선공산당을 설립할 때에 화요파의 박헌영 김단야 등과 함께 최연소 발기인에 들었었다. 신의주에서 비밀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신의주의 청년 하나가 술이 만취하여 일본인과 싸우다가 자기가 공산당원이라고 호기 있게 소동을 벌였고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 문초하여 조선공산당의 전모가 드러나는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에 전국적으로 검거 선풍이 불어 김형신은 박헌영, 김단야와 더불어 중국 상해로 탈출했다.
12월 테제가 나온 이래 중국 만주 일대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주체적으로 조선 국내에서 당을 재건하려는 입장을 국내 연장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두 해에 걸쳐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만주총국 일본총국이 해체되고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각기 중국과 일본의 공산당에 흡수되었다. 이때에 김형신은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중국공산당 및 상해에 있는 모든 단체와의 관계를 끊고 김단야와 제휴하여 조선에서 운동할 것을 명령 받았다. 김단야 등과 논의한 김형신은 조선에 들어가서 노동자 농민들에게 삐라 격문 팸플릿 등을 배포하여 교양을 하고 이를 통하여 당 건설을 위한 준비공작을 하기로 하고 1931년 2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경성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이듬해 4월말까지 김단야와 수 차례의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상해에서 김단야가 보낸 격문 및 팸플릿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한다. 김형신은 상해의 연락원을 통하여 운동자금과 함께 그룹의 기관지 ‘코뮤니스트’ 각 호를 받기 시작했으며 등사판을 구입하여 인쇄하고 각처에 살포했다. 경찰의 검거가 시작되자 그는 조선을 탈출하여 상해로 가서 김단야 등과 만나 활동보고를 하고 삼 개월 후에 다시 입국했다. 김형신은 이전에 기관지와 격문 등으로 연결이 되었던 각지의 조직원들을 차례로 만났다. 이것은 삼십년대 초반 전국 각지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활동가를 파견하여 조직망을 구축한다는 전형적인 당 재건운동 방식을 채택했는데 각 지역에서 대중적 기반은 전반적으로 미약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려던 김형신 그룹이 서울에서 류재익이 이끌던 운동선과 부딪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은 현장에서부터 이미 서로를 감지하고 있었다.
약속 날짜에 이이철은 정해진 때보다 십오 분 이른 시각에 이화동 근방에 도착했다.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가는 때에 경성제대 본관이 있는 동숭동 대학로 길에는 학생들의 발길도 끊기고 인적이 드물었다. 초여름의 양버즘나무 가로수들은 한창 푸르렀고 해가 저물기 시작하여 노을빛이 건물 벽에 물들어 있었다. 이철은 이화동에서부터 대학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는 주위에 미행자나 잠복한 자가 없는지 세심하게 살피면서 혜화동 로타리 초입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오기로 했다. 양측 연락 레포의 보안점검은 그렇게 같은 시각에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쪽에서도 누군가 나올 것이며 각 레포는 중간지점인 대학 본관 정문 앞에서 접선하게 되어 있었다.
이철이 보도를 따라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여성이었다. 이철은 저쪽에서 연락이 오기를 양산을 쓴다고 했기 때문에 여성인줄은 짐작하고 있었다. 단색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상반신은 하늘색 양산으로 가려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여성은 양산을 살짝 쳐들며 얼굴을 드러냈는데 이철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철은 작업복 바지에 와이셔츠 소매를 접어 입고 왼손에 신문을 둘둘 말아 쥐었는데 그것이 이쪽의 신표이기도 했다. 그녀가 옆으로 지나갈 때에 둘은 시선을 마주쳤다. 이철은 그녀가 상대측 연락 레포라고 확신했다. 이철이 혜화동 로터리 앞까지 갔다가 길을 건너 다시 되돌아오면서 바라보니 대학 정문 앞에 양산을 든 그녀가 서있는 게 보였다. 이철은 그녀를 향하여 걸어갔다. 회중시계를 보니 정각 일곱 시였다. 그가 다가서자 여자가 먼저 말했다.
“지금 몇 시예요?”
“일곱십니다.”
이철은 주위에 행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같이 걸으실까요?”
그들이 함께 걸어가는 것 자체가 안전신호였다.
“올해는 가뭄 들겠어요.”
여자가 말했고 이철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았지요.”
두 남녀는 혜화동 쪽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두리번거리지는 않았지만 주변을 놓치지 않고 살피며 걸었다. 낙산쪽에서 내려오는 비탈길로 밀짚모자를 쓰고 반소매 모시 셔츠를 입은 류재익이 그들의 뒤로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왔고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 이르자 길 건너편 골목에서 양복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오셨습니다.”
이철이 신문지를 버리며 말하자 여성도 양산을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쪽도 오셨어요.”
두 남녀가 길을 건넜고 류재익이 따라서 건너왔다. 골목에서 나왔던 양복쟁이는 맞은편에 서있었다. 두 남녀는 그를 지나 창경궁 쪽으로 접어들었고 만나야 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합류하여 동소문 쪽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그들이 무사히 만나게 된 것을 확인하고 두 남녀는 아까보다는 훨씬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창경궁 돌담길을 걸었다.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았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일제와 싸우는 활동가 조직의 일원이라는 것으로 한 집안 식구처럼 느끼는 친밀감이 전해졌다. 원남동 부근에 이르러 이철이 문득 말했다.
“저녁 요기는 하셨습니까?”
“아뇨, 그렇지만 점심을 늦게 먹어서……”
이철은 각자가 약속시간에 대어 오느라고 저녁을 먹을 겨를이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매우 배가 고픈데요.”
여자가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식당인 것 같아요.”
길을 건너자 여자는 잠깐 멈춰 서서 말했다.
“요기를 좀 하시지요. 저는 이만……”
“어어 함께 드셨으면 했는데요.”
여자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고개를 까딱 흔들어 목례를 하고는 종로 방향으로 걸어갔다. 길모퉁이의 유리문 달린 식당은 국수집이었다. 이철은 아쉬운 마음으로 구석자리에 앉아서 혼자 콩국수를 시켜 먹었다.
류재익과 김형신은 동소문을 나와 돈암동 베비 골프장 부근까지 걸으며 회담을 진행했다. 김형신은 먼저 자기가 느낀 국내의 운동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수년간 투옥되어 있었다니 정세를 잘 모를 수도 있을 거요. 일제는 만주를 집어 삼키고 대륙으로 진출했어요. 아마도 이것이 전면 전쟁의 시작이 될 겁니다. 우리 조선 인민은 전보다 더욱 극심한 빈곤과 압박 속에 있어요. 오히려 인민들은 절박한 가운데 투쟁하려는 의지가 폭발 직전에 있는데도 조선의 활동가들은 그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네끼리 인텔리를 중심으로 파벌주의와 관념주의에 빠져서 이들은 인민과 따로 놀고 있습니다.”
류재익은 묵묵부답 듣기만 했고 김형신은 참지 못하고 자기가 누구인가를 밝혔다.
“국제당에서는 혼란 상태에 있는 조선 좌익운동의 전선 정리를 위하여 나를 파견했습니다.”
그는 올바른 국제노선과의 연계를 통하여 국내 각 파의 노선을 정리하는 중에 있으며 이를 통하여 조선 운동의 확대 강화를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류재익은 겸손하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저는 아직 구체적인 활동은 전개하지 못했습니다. 저야 무력한 개인이니 조직의 명이라면 국제노선의 운동에 따를 것입니다.”
다음 회합은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쯤 지난 저녁 여덟 시 숭일동 불교 중앙학림 서쪽의 소나무 숲 속으로 정했다. 그전처럼 이철은 십여 분 전에 부근에 도착하여 중앙학림 근처까지 오르내리며 안전 점검을 했고 역시 미리 나왔던 지난번의 여성을 만났다. 그녀도 부근을 산책하며 둘러본 뒤였다. 주위는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양측 레포의 안전 신호에 따라 류재익과 김형신은 한적한 길 건너편 숲길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이삼 분 간격으로 숲길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지난번처럼 산보 나온 연애 청춘처럼 한적한 혜화동 길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지난번에는 미안했어요.”
여자가 말했고 이철은 처음 보다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뭘요, 제가 저녁이라도 대접해야 했었는데.”
“오늘은 저두 좀 시장한데요.”
“그럼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아까 오면서 봐둔 데가 있거든요.”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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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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