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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16화 : 한두 달 새 내려올 생각 아예 마라
『마터 2-10』 연재
반찬 바구니에는 보온 도시락과 보온병이며 반찬그릇이 들어있고 쪽지가 한 장 들었다. 오늘 백 일째 추카추카요! 백일짜리 갓난애니까 돌까지 갑시당! 무슨 생일이나 명절날처럼 보온병에 담아온 소고기 미역국에 따뜻한 밥에 전 붙이며 제육볶음에 나물까지였다. (2019. 06. 03)
윤복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여긴 왜 오셨어요?”
“내가 너 얼굴 한번 볼라구 왔는데 안 들여준댄다. 근데 어째서 대답이 없냐? 아침은 왜 굶구 그래. 다 먹구살자구 하는 일인데.”
“꼼짝 않구선 세끼 다 먹으면 오히려 병 나요.”
“내가 꿈에 어머닐 뵈었더니 너 팥시루떡 멕이라구 그러더라. 원래는 할아버지가 좋아 하셨다는데 너두 좋아하지 않든?”
“우아 저두 좋아해요.”
“노동투쟁은 원래가 이씨네 피에 들어있어. 나두 처녓적부텀 좀 알지. 너 혼자 호강하며 밥 먹자는 게 아니구, 노동자 모두 사람답게 살아보자 그거 아니겠냐?”
윤복례가 씩씩하게 지당도사처럼 말하는데 진오는 그만 울컥해진다.
“그, 그렇지요.”
“한두 달 새 내려올 생각 아예 마라. 쩌어 예전부터 지금까정 죽은 사람이 숱하게 쌨다.”
그녀가 하는 말은 큰할아버지 이백만과 할아버지 이일철과 아버지 이지산이 늘 입에 달고 쓰던 말이었다. 그 말은 이진오의 어머니 윤복례도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동의했고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말이었다. 그들 식구는 어쨌든 백 년 동안 싸워왔다.
“목 마칠까봐 식혜두 담거서 가져왔다. 오늘은 굴뚝에서 니가 태어난 날이거니 생각하고 생일치레로 맛있게 먹어.”
어머니가 통화를 마치고 아내에게로 넘겼다. 그녀는 어머니나 자기의 건강이 좋다는 것, 아이가 성적이 올라갔다는 것, 친정 엄마 즉 장모에게는 이런 일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까 혹시라도 전화가 오면 직장에 있는 것처럼 말하라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동영상을 어머니 혼자 찍었는데 아들 자랑만 실컷 하셨다고 덧붙였다.
‘농성 백 일째’ 행사는 조촐하게 끝났다.
그날 저녁부터 쉼터에서 취사 팀이 정성껏 만든 음식이 올라왔다. 그는 두 사람의 여성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한 사람은 그도 잘 아는 옛날 섬유노조의 해고자 출신이었는데 오랫동안 공장에 나가다가 근년에 집으로 살림하러 들어앉았다가 다시 예전 동료들이 그리워 자원봉사로 나왔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비슷한 또래의 아주머니로 역시 해고 노동자였다. 공장 앞에서 일인시위를 오랫동안 하다가 복직되고 나서 이진오네 공장처럼 외국으로 옮겨가며 위장파산 되어 해고당했다. 쉼터는 노조는 물론이고 각계각층의 후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내어 마련하고 운영을 했다.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이 장도 보아오고 조리도 거들고 음식이 준비되면 이진오 동료들이 현장으로 배달해 왔다.
반찬 바구니에는 보온 도시락과 보온병이며 반찬그릇이 들어있고 쪽지가 한 장 들었다. 오늘 백 일째 추카추카요! 백일짜리 갓난애니까 돌까지 갑시당! 무슨 생일이나 명절날처럼 보온병에 담아온 소고기 미역국에 따뜻한 밥에 전 붙이며 제육볶음에 나물까지였다. 그런데 돌까지 가자면 일 년 넘기자는 소리구나. 하기는 앞선 고공 농성자들이 거의 일 년씩 넘기는 게 상례였고 그런 정도가 되어야 사측에서 겨우 협상에 나서는 듯 한 시늉을 했으며 여론도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참지 못한 이들은 중도에 투신하기도 했지만 열사의 이름이 붙으면서 수많은 사진들 속에 함께 오르고 세월과 함께 묻혀갔다.
이진오는 쉰내가 고약한 수건에 물을 적셔 온몸에 번진 땀을 닦았다. 밤이 되어도 열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땀이 물이 되고 몸을 닦은 수건의 물기가 도로 땀이 되었다. 초저녁에 저녁을 먹었는데 밤 아홉시쯤 되니까 다시 굴풋해졌다. 진오는 낮에 먹다 싸둔 팥 시루떡을 비닐봉지에서 꺼내어 미지근해진 식혜와 함께 먹고 마셨다. 떡이 아직은 부드럽고 먹을 만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별 수 없이 떡이 쉴 테고 그러면 그의 오물과 함께 쓰레기에 섞여 바구니에 달아 내려주게 될 것이다. 진오는 떡을 한입 베어 물다가 금이라고 할머니의 이름을 써놓은 페트병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떡하구 나박김치 한 그릇 시언하게 먹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다. 페트병은 그저 조용히 굴뚝 벽에 기대어 섰을 뿐이었다. 어제 깍새는 놀러 와서 샛강에 가고 땅콩도 캐먹었는데 하며 그는 아쉬워했다. 난간 끝까지 돌아나가 천막으로 막힌 뒤편까지 가서 오줌을 누고 돌아서는데 낯익은 사람이 앞에 서있었다. 신금이가 평소의 옷차림으로 서서 손짓하며 말했다.
“나박김치 먹으러 집에 가자꾸나.”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어둠 속을 걸어 나갔다.
진오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샛말 옛집도 아니고 전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시장거리 뒷골목 버드낭구집도 아닌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철도공작창에서 가까운 언덕이 있던 철도관사 동네였다. 네모반듯하게 똑같은 모양으로 지은 영단주택이 줄지어 있었고 차나 수레가 오갈 수 있는 큰길과 집의 앞뒤에 사람 둘이 나란히 왕래할 정도의 좁은 골목이 반듯하게 나있었다.
격자의 유리창이 달린 현관이 이를테면 대문이고 그건 앞으로 당겨 여는 문이 아니라 미닫이로 여는 문이었다. 문짝 아래 작은 바퀴가 달려 있고 문턱에 가느다란 철선이 있어서 현관문이 드르륵하면서 경쾌하게 열렸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서면 옆으로 변소가 있고 그 앞에 이를테면 문간방이 있고 방 앞은 쪽마루가 붙은 부엌이고 마루 앞에 장지문이 있고 부엌 부뚜막 앞에도 작은 쪽문이 있어 허리를 굽혀 밥상을 들여갈 만한 데가 안방인 셈이다. 마루 앞 장지문을 열면 다다미 여섯 장 정도를 깐 우리 식의 대청 비슷한 곳이 식구들이 모여서 밥도 먹고 하루 일을 서로 이야기 하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 되었고, 안방은 장지문 오른편 안쪽에 있다. 그리고 왼쪽에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앞에는 격자의 창호지 문이 있고 쪽마루가 길게 이어졌으며 바깥쪽에도 유리 달린 문짝이 있었다. 여름에는 열어두고 겨울이면 꽁꽁 닫아 문풍지까지 하고 살았다. 겨울에도 날씨 좋은 날 안쪽의 장지문을 열어두면 따사한 햇빛이 유리창으로 들어와 다다미가 따스해질 정도였다.
철도관사에는 일본인 직원 가족들이 대다수 거주했고 조선인 가족은 전체로 보면 삼사할 정도나 되었을 것이었다. 관사는 소유자가 총독부철도국이었으므로 임대하여 사는 터라 누구든 변형 개조할 수가 없었고 수리도 허가를 얻어 영선부의 기술자가 나와서 시행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다다미가 익숙하지 않아서 안방만큼은 어떻게든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온돌방으로 개조했다. 뜨거운 물을 유담뽀라는 보온통에 채워 요 속에 넣고 추위를 막지만 새벽녘에는 식어버려 노인들이 고생을 했다. 다다미방에서 보통 때에 보온하는 것은 숯불화로가 고작이어서 자주 환기 시키지 않으면 가스에 중독도 되었다. 이백만이 작은 난로를 만들어다 중방에 놓았고 석탄을 때면서 아늑한 집이 되었다. 그리고 이백만은 맏아들 이일철과 신금이가 혼인을 하면서 구들을 놓은 안방을 내주었다. 신금이가 건넌방을 쓰련다고 했지만 홀시아버지 백만은 한사코 마다했다. 아우 이철의 방은 자연스레 현관 옆방이 되었다. 그리고 거기는 또한 손님방이기도 하여 막음이 고모가 오면 이철은 아버지 백만의 방으로 옮겨갔다.
이일철이 보통학교를 사 년 만에 졸업하고 오 년제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일은 이백만에게 오래도록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는 비록 독학으로 글을 배우고 사환과 용인으로 일본어를 익히고 기술을 배웠지만 맏이는 버젓하게 학교를 다니며 배운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이 기관수가 되기를 소망했다. 백만이 처음 기차의 위용을 보면서 가슴이 부풀었을 때에 꿈꾸었던 것은 엄청난 힘을 가진 기관차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버드나무 집에 살적에 일철이는 총독부의 철도종사원양성소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이전에 만주철도 위탁경영 시절에 경성철도학교이던 것이 총독부 직영으로 넘어오면서 양성소를 개설했다. 이백만이 늘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맘때가 되기 전까지 조선인 기관수는 한 사람도 없었고 경부 경의선의 객차에는 기관조수나 화부나 탄부마저도 조선인을 태우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지선의 화물차나 객차에 조선인 화부나 탄부가 생기고 철도종사원양성소가 생긴 뒤부터 조선인에 대한 철도 기술 교육이 허용되고 있었다.
이일철은 고등보통학교 삼학년 때에 아버지의 도움으로 철도공작창 일본인 주임관의 추천서를 받아 응시했고 본과에 합격했다. 조선인의 입학이 허용되었다 할지라도 일본인 열 명 중 조선인 서너 명의 비율에 불과했다. 본과의 수업 연한은 삼 년이었고 입학 자격은 고보 이년 수료까지였다. 그리고 철도국 직원의 자제는 우선 순위여서 이일철의 입학 자격은 차고 넘치는 셈이었다. 일철은 십이 원의 학자금 대여를 받았고 용산의 학교 기숙사에 입소했다. 그가 학생제복과 만또를 입고 시장 사거리 골목 동네에 나타나면 이백만은 공연히 그를 데리고 시장 주점으로 데려가서 어른 친구를 만난 것처럼 대작을 했다. 일철이 늘 이야기 하지만 그들 부자가 아우 이철과 달리 술주정 버릇이 없는 것은 아버지는 그의 장인에게서 술을 배웠고 자신은 아버지에게서 배웠으니 그랬다는 것이다. 아우 이철은 방직공장에서 저희 또래들과 마구잡이로 술을 배워서 술주정 버릇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기는 하여도 아우 이이철이 신금이를 먼저 알아보고 형에게 소개를 했다는 게 어쩌면 신통한 노릇이었다.
신금이는 김포에서 중농 집의 막내딸이었다. 오빠 다섯이 있었고 당시로서는 중늙은이 취급을 받던 아버지 나이 쉰 살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흔 여덟 살이었다. 집안에 딸이 없어 여식 귀한줄 모르던 그 시절에도 이쁜 딸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말을 그녀의 부모들이 입에 달고 살았다. 오빠들과는 나이 차이도 많아서 막내오빠가 남의 집으로 치면 이미 아버지뻘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온 식구가 신금이 말이라면 벌벌 떨었다. 오빠들 셋은 장가를 들어 분가하여 제집 살림들을 하고 있었고 큰오빠와 막내 오빠는 친가에 함께 살았다. 신금이는 누가 집에 놀러라도 오면 빤히 바라보다가 개조심해여! 말 한마디 하고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고 곧 자기 놀이에 빠졌다. 그게 무슨 방정맞은 소리냐고 엄마가 야단치고 며칠 지나보면 방문객이 개에 물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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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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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100년의 역사를 꿰뚫는 방대하고 강렬한 서사의 힘 지금의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온 우리들의 결과다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 세계적인 거장 황석영이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로 한반도 백년의 역사를 꿰뚫는다.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