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승한의 얼굴을 보라
이남순씨가 그린 이브의 얼굴 : 우리는 모두 꽃이예요. 그렇죠?
우리가 서로의 얼굴에서 봄을 발견해주는 한, 우리는 모두 꽃이다
내 짝꿍은 “얼굴은 샐쭉하이 이쁘고, 눈은 크고 이쁘고, 입술이도 오목하이 이쁜”데, 자신이 그림을 못 그려서 저 예쁜 짝꿍 얼굴을 “조짔”는 것이 속상하고 미안한 것이다. (2019. 05. 27)
애기짝꿍 이브의 얼굴을 그려주다가 결과물이 영 이상하게 나오자, 어르신짝꿍 이남순씨는 무심하게 한 마디 내뱉는다. “조짔다.”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해 누구보다 단호하게 ‘조짔다’고 말할 수 있는 어르신의 저 쿨함은 대체 무얼까? MBC 파일럿 예능 <가시나들>의 예고편에 삽입되며 본 방송 전부터 보는 이들을 웃게 만들었던 이 장면은, 그러나 막상 본 방송으로 보면 다소 다른 맥락으로 읽힌다. <가시나들>이 주인공으로 세운 함양 문해학교 학생 다섯 명 중 맏이인 이남순씨는, 아무리 노력해도 한글이 좀처럼 익혀지지 않아 속상한 마음에 필통을 내던지며 몇 번이고 학교를 그만 두려 했던 사람이다. 읽고 쓰는 게 마음처럼 안되고, 아무리 열심히 외워도 돌아서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나이 여든 다섯, 나이 먹은 게 잘못도 아닌데 이남순씨는 곧잘 주눅 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조용히 자신을 나무란다. 짝꿍의 얼굴을 그려오는 숙제도 그렇다. 그림을 좀 못 그릴 수도 있는데, 이남순씨는 자꾸 그게 마음에 걸린다. 내 짝꿍은 “얼굴은 샐쭉하이 이쁘고, 눈은 크고 이쁘고, 입술이도 오목하이 이쁜”데, 자신이 그림을 못 그려서 저 예쁜 짝꿍 얼굴을 “조짔”는 것이 속상하고 미안한 것이다.
다른 집이라고 상황이 다를까. 애기짝꿍 장동윤의 얼굴을 그리던 김점금씨는, 장동윤이 그린 자기 얼굴을 보고는 감탄(“사람같이 맨들어 놨네.”)과 탄식(“나는 아무리 해도 못 맨들것다.”)을 동시에 토해낸다. 애기짝꿍들은 자꾸만 자신의 무력함 앞에서 좌절하는 어르신 짝꿍들을 격려하기 바쁘다. “할머니 포기하면 안 돼요, 끝까지. 완성은 해야 돼. 포기하면 안 돼.”(장동윤), “개안타. (그리다 만 그림 속 눈처럼 한쪽 눈을 윙크를 하며) 이렇게 지내지, 뭐. 괜찮애. 잘 그맀다.”(이브) 처음이라 서툴 수도 있고, 나이 들어 크레파스를 쥔 손에 힘이 잘 안 실릴 수도 있고, 그림 실력이 좀 없을 수도 있다. <가시나들>은 말한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늦었다고 부끄럽다고 숨는 대신 이제라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것으로 이미 훌륭하지 않냐고. 새로운 걸 시도할 그 용기가 참 푸르르지 않냐고.
“딸 같은 수빈이를 보믄, 잠깐 내가 디다 보니까 이불을 차고 자. 그래, 내려다 보니께 자는 게 너무 이쁘더라고. ‘아이고 곱기도 해라, 나도 저런 철이 있었는데.’ 내 얼굴을 이렇게 만져 보니께 ‘더그럭!’ 거리잖아. 언제 이래 됐나 싶어.” 애기짝꿍 수빈을 바라보며 자신이 예전 같지 않음을 생각한 어르신짝꿍 박무순씨의 말에, 담임 문소리는 박무순씨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아유, 뭐가 더그럭거려. 이렇게 매끈매끈한데. (중략)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여기 우리 어르신 짝꿍 학생들, 아직도 활짝 핀 꽃이세요. 아니, 꽃이 한번만 피고 지고 끝인가? 해마다 피잖아요.” 맞다. 작대기만 그려놓고는 못 그렸다 탄식한 한쪽 눈에서 윙크를 발견해준 이브처럼, 서로가 서로의 얼굴에서 봄을 발견해주는 한, 우리는 모두 꽃이다. 아직 더 피어나 봄볕 아래 살랑거릴 날들이 많은 꽃이다.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