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보영 시인 “나를 웃기는 데 성공한 인간들의 기록”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문보영 시인 첫 산문집
홀가분해요. 이제 나가(웃음). 잘 살아줘. (2019. 05. 15)
2016년 등단, 2017년 김수영 문학상 수상, 유튜브와 일기 딜리버리를 하고 힙합을 추는 시인. ‘슬픔과 명랑의 시인’문보영은 호기심을 일으킨다. 단조로운 일상을 영상으로 찍어 ‘어느 시인의 브이로그’라는 이름으로 유튜브에 올리고, SNS로 독자를 직접 모집해 손으로 쓴 일기를 우편으로 보내고, 힙합을 추고, 시보다 피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문보영 시인은 자신의 첫 산문집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에 대해 “12리터짜리 항아리 안에 든 눈물을 비우던 나날의 일기들”이라고 설명했다. 스무 살 때부터 쓴 비공개 일기들이 언젠가는 터질 것만 같아서, 지난 힘든 시절을 잘 정리해 보내는 마음으로 묶었다고 말했다.
시를 미워하고, 좋아하기만 하던 시인은 등단 후 갑작스런 우울증을 겪었다. 지면을 얻지 못할 거란 불안과 문단에서 겪어야 했던 상처 때문에 일상을 잃게 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욕망을 상실해버렸다. 우연히 본 누군가의 지루한 브이로그가 다시 일상을 살아보고 싶도록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문보영 시인이 일상을 연습하기 위해 유튜브를 시작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다시 시를 미워하고 좋아하기만 했던 때로 돌아가 건강하게 시를 쓰고 싶다는 문보영 시인은 그래서 이 산문집을 “친구집”이라고 말한다.
“친구를 묶어 책을 낸 것 같거든요. 문보영을 웃기는 데 성공한 인간들의 기록이 제 일기 같아요. 친구들 덕분에, 친구들을 웃기고 싶어서 계속 글을 쓰기도 하고요. 제가 완벽하게 무너졌을 때 작은 지지대가 되어주기도 한 존재들이에요.”
힘든 시간을 통과한 시인은 이제 엄청 지루하고 훌륭한 어떤 것을 쓰고 싶다고 했다. 좋아하는 것을 쓰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는 문보영 시인. 이것이 그가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홀가분
첫 산문집의 가장 첫 문장이 “시를 쓸 때면 삽질하는 기분이 든다.”(5쪽)예요.
몰랐어요.(웃음) 어디서 보고 ‘그랬구나’ 했는데요. 제가 일기 딜리버리를 하고 있어요. SNS에 포스터를 만들어 독자를 모집하고, 신청하신 분들에게 일기를 손으로 직접 써서 우편으로 보내드리고 있거든요. 그때 썼던 원고예요. 그 뒤 어떤 독자 분이 이 글 나중에 산문집에 들어가느냐고, 머리말에 들어가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요. 편집자 분이 머리말을 쓰라고 하셨을 때 그냥 이 글이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됐어요. 그나저나 머리말이 천천히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첫 챕터처럼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웃음)
이번 산문집에 수록된 글들은 시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시는 시를 안 읽는 친구들에게는 보여주기가 어려워요. 가만히 있으면 저를 난해하게는 보지 않을 텐데 시집을 줘서 저를 난해하게 보게 되는(웃음) 상황이 될 때가 있죠. 우선 산문집을 내고 친구들한테 보여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어요. 저로서는 블로그에 쌓여 있던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다이어트 하듯 골라내는 기회여서 좋았고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숙제처럼 미뤄뒀던 거거든요. 아픈 기억을 많이 써놔서 다시 읽을 때 제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모두를 한 번 쭉 뽑아서 읽는 계기였어요.
“언젠가 한 번 이 방대한 일기를 마주해야 했다”(7쪽)고도 쓰셨는데요. 말씀하신 ‘해야 한다’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나요? 왜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는지 궁금해요.
되게 막연한 마음인데요. 이 글이 계속 쌓인 채로 있다가는 폭발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때마침 산문집 제안을 받은 거죠.
한 시기를 잘 정리해 보내는 느낌이었군요.
네, 맞아요.
보내는 기분은 어떠세요? “이 책은 12리터짜리 항아리 안에 든 눈물을 비우던 나날의 일기들”(8쪽)이라고 하셨잖아요. 그 시절이 어땠는지, 어떤 것이었기에 이렇게 말했는지 듣고 싶었어요.
홀가분해요. 이제 나가(웃음). 잘 살아줘.
다른 분들의 20대도 힘들겠지만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쳤고, 지금도 그러고 있죠. 특히 우울증이 갑자기 찾아온 기간이 일 년 반 정도 있었는데요. 그건 또 전혀 다른 종류의 힘듦이었어요. 전에는 한 번 슬프면 이제 다른 사람의 슬픔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노래가사도 다 이해되고, 누군가의 아픈 이야기도 다 이해가 되고요. 그런데 다른 종류의 슬픔이 오니까 그건 완전히 새로운 거더라고요. 내가 편협했다는 깨달음이 오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슬픔을 이해하는 범위가 확대되는데, 확대 안 되도 되니까 안 아팠으면 좋겠는 거죠.(웃음) 슬픔이 계속 확대되고, 신기한데 너무 아픈 그런 시절이었어요.
오랜 기간 써온 글을 책 한 권으로 묶고 보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아주 지루하고 좋은 것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청 지루하고 훌륭한 어떤 것 말이에요. 이 글은 쓰면서 제 주위 지인들에게 줄 수 있어 좋았고요. 어렵다는 말은 적어도 안 들어서 그게 정말 좋았는데요.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이해를 저버리고 쓰는 글은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지금은 아예 누가 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은 어떤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 글은 말하자면 시일까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히 독자를 생각하긴 하거든요. 다만 그 독자가 넓은 범위의 독자는 아닌 거죠. 아주 작은 한 줌의 독자를 생각하고 쓰는데요. 그게 돌파를 하면 결국 다른 사람에게도 읽힐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많은 사람이 읽을 거라고 생각하고 쓰면 계속 타협하면서 쉽게, 재미있게만 쓰게 되니까 그런 부분을 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작품과 솔직함
이 글들은 일기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다고 하셨어요.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전부 사실은 아니라고 당부하고 싶은 마음이었나요?
제게 일기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글쓰기거든요. 촉발되는 지점은 항상 사실이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더 좋은 방향 혹은 제가 창작에 있어 더 흥미를 느끼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도 흥미가 있고 그래서요. 일기이기도, 소설이기도 하다는 말은 그래서 쓴 거예요.
“나에게 시는 너무 솔직해지지는 않는 연습”(179쪽)이라는 문장이 있었거든요. 솔직함에 대한 시인님의 생각도 궁금해져요.
솔직할 때 과하게 솔직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잖아요. 또 저는 솔직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죠. 솔직함이라는 미덕에 너무 취해서 다른 것을 놓칠 수 있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솔직하니까 좋은 글이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좋은 작품과 솔직함, 좋은 작품과 진정성을 너무 한 몸으로 보지는 않으려고 해요. 이것들이 정확하게 분리되지는 않는데요. 적어도 이 글은 진정성이 있으니 좋은 글이다, 라는 건 되게 쉬운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령 무성의하게 썼는데 진정성이 있으니까, 라고 합리화하면서 이걸 좋은 글이라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건 성실하지 않기도 하고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관련한 경험이 있으셨어요?
제가 상처 받을 때는 있었어요. 너무 솔직하게 저를 노출시킨 것을 보고, 친구가 “너를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한 적이 있는데요.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내가 나를 너무 내동댕이친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너무 독자들에게 다 말해서 나도 모르는 나의 무의식이 상처 받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요. 그런 적이 있었어요.
시를 쓸 때와 이 책에 담은 일기 혹은 소설 같은 글을 쓸 때, 시인님은 어떻게 달랐나요?
시를 쓸 때는 확실히 아무도 고려하지 않고, 시만 고려하고 썼어요. 안 그러면 자꾸 시에서 알랑방귀를 뀌게 되고(웃음)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게 되더라고요. 수학자처럼 명철하게, 삶과 타협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것 같은데요. 시를 쓸 때 그래서 힘을 엄청나게 주고 써요. 쓰다가 잠시 긴장을 탁 푼 다음 다시 힘을 꽉 주고 쓰죠. 한편 일기는 그래도 그 공간에서 타인을 호명하기도 하고요. 타인이 내 집안에 들어오기도 해요. 그때마다 견뎌내는 연습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
제목 역시 시를 설명하는 이야기였잖아요. 이 제목은 어떻게 결정하신 거예요?
몇 가지가 더 있었는데요. 이 제목을 엄마가 제일 좋아했어요. 편집자 분도 이 제목을 강력하게 원하셨고요. 저한테 의미 있는 장면에서 나온 문구이기도 하니까요. 제 등단 소감이거든요. 친구들이 “너는 등단작보다 등단 소감이 좋다”고도 했었어요.(웃음) 그러면 등단 소감 같은 시를 써야겠구나, 재미있고 일기 같은 시를 써야겠다, 해서 일기랑 같이 뒹굴었던 계기가 됐던 장면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곱씹을수록 제가 사람을 미워하는 다정한 방식으로 계속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뭔가를 완벽하게 미워하기가 어렵고, 자꾸 연민과 다정한 감정이 생기는데 다시 미워하는 건 맞고요. 자주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런 일기들이 이 산문집에 담긴 것 같아서 이 제목으로 결정했어요.
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대답을 구하다가, 시는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인 것 같다고 말했다. 꼭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는 거냐고 다시 묻기에 지나치게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었다고 풀어 설명하고 좀 후회했다.
그러더니 누나는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다.(중략) 이 친구가 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딱 봐도 ‘아, 저런 누나랑 결혼은 못하겠구나.’라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22쪽)
지금 시인의 생각과 가장 맞닿은 글을 꼽는다면요?
가장 마지막에 실린 「사랑하는 것을 너무 미워하지 않으며」 같아요. 시를 쓴 종이가 엉덩이에 붙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대학생 때 이야기예요. 그때는 정말로 시를 좋아하기만 했던 것 같아요. 분명히 싫어하고 괴로웠는데 좋아하기만 했어요. 외부적인 잡다한 이유, 인간관계나 문단의 권력 같은 것들 때문에 때 묻지 않았던 때 같거든요. 분명히 괴롭고, 어른스러웠지만 상처가 없었던 것 같아요. 문학 때문에 받은 상처, 시가 안 써져서 받은 상처는 있었겠지만 외부에서 받은 상처는 아니었던 거죠. 당시에는 순수한 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진짜 좋은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꼰대 같은데요.(웃음) 그때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해요. 진짜 시를 좋아하고, 미워하기만 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시인이라는 직업
유튜브, 일기 딜리버리 등 재미있는 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잖아요. 이 사실만 보면 젊은 시인이 여러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데요. 산문을 읽고 나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돼요. 이런 활동이 시인에게는 ‘나를 연습하는 행위’처럼 느껴졌어요.
유튜브는 정말 할 생각이 없었는데요. 일상을 연습하려고 시작을 한 거예요. 우울증이 아주 심할 때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봤어요. 너무 지루한데 너무 좋았어요. 왜냐하면 지루하고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일을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브이로그를 보는 게 저한테 엄청 힘이 되는 거죠. 느긋하게 키위에 붙어 있는 상표를 손등에 쓱 붙이고, 키위를 물에 씻고, 깎아서 먹는 단순한 작업을 보니까 그걸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더라고요. 욕망이 사라졌던 때거든요. 그래서 브이로그를 시작했어요.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요. 여전히 일상만 찍고 있죠. 그런데 하다 보니 일상을 조금은 책임감 있게 살게 된 것 같아요. 그게 결국 글쓰기에도 도움이 됐고요. 너무 우울하면 글이 전혀 안 써졌거든요. 브이로그를 하면서 제 채널을 보고 폭식증을 극복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정말 좋았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요.
우울증이 갑자기 왔을 때가 등단 이후였던 거죠?
네, 불안이 크고 위협 같은 것도 많이 느꼈던 때예요. 안 좋은 사건도 있었고요. 등단 이후에 지면 권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누가 청탁을 주는 행위는 아주 일방적이잖아요. 문단이 폐쇄적인 이유, 권력이 생기는 이유가 그런 거겠죠. 이미 등단부터 수직적인 것이고요. 신인 때는 더구나 무대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잖아요. 그때 눈에 안 띄면 영원히 안 띄기 때문에 청탁이 들어오면 잘해야 하는데 그걸 불합리한 이유로 빼앗기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저한테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독자와 직접 만나는 플랫폼이 있어야겠다, 그래야 집중하고 글을 쓸 수 있고 불필요한 요구를 거절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일기 딜리버리를 시작하면서는 누가 술자리에 나오라고 하거나 불편한 연락을 해왔을 때도 조금은 전보다 쉽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문예지에서 오는 좋은 청탁도 있지만 이 두 가지가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일기 딜리버리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도 기억나세요?
잇선 만화가와 이슬아 작가가 하는 걸 보고 되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어서 좋다, 그런데 일기로 돈을 버는 건 정말 좋네(웃음) 생각했죠. 그래서 그냥 했어요. 저는 시작은 잘해요. 일은 쉽게 벌이거든요. 그냥 했는데 너무 잘 맞았어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시작해보니 지면에 대해 덜 불안해하게 되고요. 그게 너무 좋아요. 일기 딜리버리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도 안 하게 됐고요. 시인들은 가난하다는 편견도 벗고, 친구들한테 밥도 사줄 수 있으니까요. 더구나 독자들의 피드백도 받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책에서도 직업으로써의 시를 말씀하셔서 참 좋았어요. “시인이라는 직업”(111쪽)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제게 직업이 뭐냐고 물어서 “시인입니다”라고 하면 “그럼 직업은 뭐예요?”라는 물음이 다시 돌아와요.(웃음) 시인은 돈이 안 된다고 으레 생각하니까 다른 직업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생계를 시인들이 어떻게 해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이런 고민을 등단 전에는 하지 않으셨나요?
네, 등단 전에는 하지 않았던 고민이에요. 대학원을 계속 다니고 있었고, 그만 뒀고(웃음), 그때부터 하게 됐죠. 진짜 돈이 안 되긴 하는구나, 싶어서 계속 과외를 했거든요. 교사 자격증이 있으니까 임용고사를 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고요. 그러다가 유튜브, 일기 딜리버리를 하면서 지금에 온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여전히 고민은 있으시겠네요.
이건 제가 운영하는 사업 같은 거잖아요. 정규직도 아니고 그러니까 고민은 계속 갖고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뭔가를 해보고, 고민하고, 그럴 것 같아요.
너무 생산적인 사람
다른 형태의 산문도 쓰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가요?
네, 시와 소설의 경계에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요. 이번에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다이어트를 한 기분이거든요. 카프카는 일기를 아주 많이 썼는데 그래서 소설이 일기 같지가 않아요. 소설을 쓰려고 일기 다이어트를 하나 봐요.(웃음) 그런데 에르베 기베르는 일기를 안 쓰는 것 같아요. 산문집을 안 내는 대신 작품이 엄청 일기 같죠. 제가 그 중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완전히 일기 같은 산문집을 내고 나니까 시에서는 전혀 일기 같지 않은 문장들이 나오더라고요. 그 새로운 문장에 제가 매료됐고요. 그래서 앞으로 일기 다이어트를 한 작품이라고 하야 할까요. 그런 산문을 쓰고 싶어요.
달라서 서로 영향을 주는 쓰기가 있나봐요.
맞아요, 『책기둥』 을 쓸 때는 일기를 너무 많이 쓰다가 갑자기 속력이 붙어서 저절로 시가 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런 반면 지금은 일기로 다이어트를 하고 남은, 건조된, 밀도 높은 것들로 시를 쓰는 것 같고요. 그렇게 쓴 다음 다시 일기로 돌아가고 그러는 것 같아요.
문보영 시인의 시 활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제 경우 시집이 빨리 나온 편이잖아요. 발표를 별로 안하고 시집이 나왔어요. 『책기둥』 에 수록된 50편이 거의 다 신작인 거죠. 숨겨뒀다가 ‘짜잔’하고 보여주는 게 제 입장에서는 너무 산뜻했어요. 보통은 작품을 4-5년에 걸쳐 천천히 발표한 뒤에 그걸 묶어서 내잖아요. 그걸 잘 몰랐지만 저는 그럴 때마다 김이 새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웃음) 일단 발표를 하면 시집에는 안 넣고 싶고요. 한편 청탁 속도에 맞추려면 일단 쓴 시를 바로 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요. 저는 시를 장독대 같은 데 묵혀 뒀다가 3개월 후에 다시 봤을 때 첫 인상을 보고 그 시의 운명을 결정하거든요. 청탁에는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니까 저로서는 불성실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작년에 좀 그랬던 것 같은데요. 거절은 못하고, 문예지가 시인들의 무대이기 때문에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있는데, 우울증은 있어서 제게 실망스러웠던 한해였어요. 그래서 이제는 좀 조절을 하고 있어요. 산문 청탁은 거절하지 않는데요. 시 청탁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있는 중이에요.
2018년이 시인님에게는 많이 힘든 한 해였다는 게 느껴지는데요. 그 와중에 이번 책도 탈고 하시고, 브이로그와 일기 딜리버리도 꾸준히 하셨다는 게 좀 놀랍네요.
그게 저의 비극 같은 건데요. 가장 우울하고 힘들 때 가만히 있는 걸 못해요. 너무 힘들 때는 가만히 쉬어야 할 텐데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거든요. 안 좋은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요. 상어가 부레가 없어서 가만히 있으면 죽는대요. 잘 때조차 계속 돌아다닌다고 하는데요. 저는 그런 인간이어서 아픈 와중에 너무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아프다는 걸 안 믿는 친구들도 있고요. 아주 친한 친구들은 대단하다고 하기도 하죠. 그런 게 아닌데 말이에요. 저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비었을 때가 되게 두려워요. 그 빈틈에 우울이 찾아오기도 하고, 공황장애가 오기도 해서 시간을 촘촘히 만들어야 해요. 그런 때였어요. 목표는 성실하고 건강한 건데 그러질 못하고 아프니까 그걸 외면하려고 다른 걸 계속 하게 되고 그랬어요.
한 인터뷰에서 앞으로 “좋아하는 걸 쓰고 싶다”고 말씀하신 걸 봤거든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 알겠어요.
이제는 좀 건강하게, 좋아서 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됐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걸 쓰고 싶고요. 좋아하는 걸 쓰면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문학을 하다보면 자조적인 것에 많이 노출되는 것 같아요. 무기력을 어필하고,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유치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춤추는 친구들을 만나면 다르거든요. 건강한 걸 좋아하고, 밝은 기운을 서로에게 주죠. 그걸 제가 오랫동안 안 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이 둘 사이에 자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열심히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좋아요.
어떤 한 면만이 전부는 아닌데 말이에요. 시나 문학, 시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편견을 갖기가 참 쉬운 것 같아요.
시인은 어때야 한다, 는 생각이 있잖아요. 그래서 친구들한테도 시인이라고 말 안 해요.(웃음) 되게 오해를 하고요. 저를 어렵게 생각하거나 제가 감상적이고 우울하다고 생각해요. 주변에 시인이라고 말을 안 하니까 나중에 시인이라고 하면 다들 놀라죠.
함께 춤추는 분들도 모르세요?
몇 년 동안 감췄어요.(웃음) 아주 소수의 몇 명에게만 말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요. 산문집이 나오고 나서 제가 시인인지 모르는 한 친구에게 갑자기 책을 주고 싶어져서 줬어요. 굉장히 놀라더라고요. “왜 네 책이 나와?”라기에 시인이라고 말을 했죠. 그냥 갑자기 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 책에는 내가 어느 정도 설명되어 있어, 난 너랑 친해지고 싶어, 라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시집을 줄 때는 오해할까봐 불안한데 산문집을 줄 때는 상대와 약간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그 순간 있었어요. 저 스스로도 신기해하면서 주고, 부끄러워하면서, 연습실을 나왔어요.(웃음)
시집만 갖고 있었을 때는 다 설명하지 못하는 아쉬움 같은 게 있었던 걸까요?
어떤 개떡 같은 말을 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독자가 시의 독자들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설명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고, 질려 있잖아요. 내가 누군지 계속 설명해야 하고, 왜 그런지, 왜 힘든지 설명을 요구받는데요. 시는 달라요. 그냥 직관적으로 온 것들을 설명을 경유하지 않고 이미지로 탁 얘기했는데 설명보다 더 잘 받아들여졌어요. 이심전심처럼 말이에요. 저 역시 그런 식으로 시를 접했는데요. 그걸 하기까지는 사실 꽤 많은 시를 읽어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 시를 읽을 때는 ‘무슨 말이야?’가 먼저였거든요. 친구들이 어떤 시를 읽고 단박에 알아차리는 게 신기했고, 마법 같아서 그 친구들을 이해하고 싶어서 시를 읽은 건데요. 아직 그 과정을 경험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그걸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준비가 됐을 때 찾아서 읽어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다음 시집은 언제 나오나요?
두 번째 시집이 나와야 해요. 9월에 ‘핀 시리즈’ 시집이 나올 예정이거든요. 일단은 그걸 잘해야 할 것 같고요. 다음 산문집도 계약을 해둔 상태여서 그것도 준비하고 있어요.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문보영 저 | 쌤앤파커스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보며, 또 글을 읽으며 시인이 힘을 얻었듯이, 자기만의 눈물항아리를 안고 인생의 어떤 구간을 건너가는 이들에게 이 산문집이 다정히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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