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즐겁고 지금은 아니다
끝없는 오디션 속에서
고성장의 시대는 지나갔고 맨 꼭대기에 오른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례가 많이 나왔다. 죽도록 노력해 어딘가에서 데뷔한 사람들을 다시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본다. (2019.04.29)
프로듀스 101 시즌 4 티저 이미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슈퍼스타K>부터 시작해서 <프로젝트 런웨이> <위대한 탄생> <TOP밴드> <K팝스타> <댄싱9>...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오디션 홍수 속을 첨벙첨벙 헤엄치면서 같이 울고 웃었다. 남의 불행과 기쁨을 전시하고 대리만족하는 방송 생태에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시청률에 일조한다는 게 모순 같지만, 여전히 새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나오면 꼭 돌리던 리모컨을 멈추고 보게 된다.
예전에는 즐겁게 보던 것들을 더는 못 보게 될 때가 많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하등하게 대하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프로그램이라든지, 단체로 사람들을 가둬 놓고 이성애 연애 각본에 따라 짝을 지우는 프로그램 같은 것들. 재밌게 봤던 오디션 프로그램들도 유튜브에서 다시 보면 여러모로 비위가 상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수(디자이너, 댄서, 데뷔, 본선 진출, 어떤 것을 넣든지) 될 수 있겠냐는 비아냥과 열심히 하지 않았음을 질타하고 모든 책임을 출연자에게 지우는 행위, 손쉽게 누군가를 나쁜 위치로 만드는 편집, 서로 경쟁을 내재화해 개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경쟁자로만 바라보는 구도 등 - 함정이 곳곳에 나타난다.
의지 없으면 빠지고 집에 가라는 공염불 협박도 싫어한다. 정말 '어쩌라고'의 마음이 된다. 치사하고 더러워도 여기가 얼마 안 되는 기회니까 붙잡고 있는 건데, 선심 써서 준다는 듯이 말하는 심사위원이 싫다. 가르쳐주는 건 가르쳐 주는 거고, 그렇게까지 비아냥거릴 일이 아니잖은가.
그때는 그럭저럭 좋았지만 지금은 나쁜 것들중 최고봉은 미성년자가 대거 출연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앞에 열거한 그 모든 나쁜 것들이 미성년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겪은 어른들은 오디션에 떨어져도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걸 안다. 경쟁은 수없이 일어나고 하나의 경쟁이 모든 걸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쟁에서 떨어지면 다시는 데뷔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시청자마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시청자 투표는 모든 책임을 시청자에게 돌려놨다. 마치 내가 투표를 안 해서 이 귀여운 아이의 인생을 망쳤다고 하는 것 같다. 방송과 소속사는 모든 일을 다 시청자에게 맡기고 나 몰라라 하다가 화제가 되면 그때야 엣헴 하며 뒷짐을 지고 나타나 수익을 나눠 가진다.
왜 잠을 안 재우고 아이들을 울리는 게 성공을 보장하는 길이 되는가. 잠을 많이 자고 서로 독려하면서 실력을 쌓아나가는 방식이 성공의 기준이 되면 안 되나? 피곤해서 아무 생각 없이 좋은 음악을 듣다 잠들고 싶어서 보는 화면에서 나보다 더 못 자고 더 괴로운 사람을 보고 그래도 나는 낫다고 위안을 받으라는 건가. 현생도 힘든데 판타지를 얻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서야.
오늘날 중위권 대학 이상 4년제 대학생의 꿈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7,9급 공무원 시험학원이 밀집한 노량진 고시촌을 취재한 적이 있다. 일련의 시험 과목 강의를 학원에서 모두 들으려면 적어도 1년이 걸린다. 대부분은 이 과정을 1년 더 반복하여 2년 동안 학원을 다닌다. 수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공강 시간에는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잠은 고시원에서 잔다. 이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1~3년 동안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학원비, 생활비 등을 더해 한 달에 적어도 50만원이 필요하고,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면 여기에 30만원을 더 보태야 한다.
이런 후원이 가능한 것은 오직 중산층이다. 중산층 자녀가 아니라면 공부원 시험을 준비할 수 없다. 중산층 이상 부유층이라면 3~5년이 걸리는 사법, 행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해 부유층 자녀가 아니면 고급 공무원의 꿈을 꾸지 못한다) 100대 1이 넘는 그 경쟁에서 소수만 살아남는데도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이유가 있다.
- 안수찬, 2011년 4월, 민주정책연구원 "가난한 청년은 왜 눈에 보이지 않는가" 중
이제는 사람들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어느 영역에서든 준비된 사람을 좋아한다. 준비를 하려면 기회와 시간을 잡아야 하는데, 둘다 없어서 준비된 자들을 뽑는 시험에 몰린다. 시험은 다시 노력하는 시간을 요구한다. 긴 시간 동안 유력한 회사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을 과대평가하고, 경쟁에서 진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모든 평가를 돌린다.
<프로듀스 101> 시즌 4의 타이틀곡 '_지마'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달려나갔을 때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포기하지 말라는 것도 너무 가학적이다. 경쟁을 통해 팀원 간의 유대감이 생겼다고 해서 경쟁의 방법이 모두 옳은 건 아니다. 고성장의 시대는 지나갔고 맨 꼭대기에 오른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례가 많이 나왔다. 죽도록 노력해 어딘가에서 데뷔한 사람들을 다시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본다. 내 응원이 누군가를 소진하는 것 같아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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