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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나이도 희미해져 버리고

김해자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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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으로 어떤 자본의 바퀴는 굴러간다. (2019. 03. 04)

출처_언스플래시.jpg

             언스플래쉬

 

 

마흔이 됐다.


작년에 서른아홉이었으니 마흔이 되는 일은 놀랄 일도 아닌데, “어느새!” 하며 놀랐다. 돌이켜보면 스무 살도, 서른 살도 다 어느새 왔다가 어느새 갔다. 스물한 살부터는 스무 살을 생각하지 않고, 서른한 살부터는 서른 살을 생각하지 않다가 스물아홉이 되면 스무 살을 생각하고, 서른아홉이 되면 서른 살을 생각하고…. 이런 식이라면 마흔한 살부터는 마흔을 생각하지 않고 마흔아홉이 되어서 마흔 살을 생각하게 되겠지…. 이런 식이라면 인간의 생애란 두 살부터는 생을 잊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지금까지의 생을 돌아보게 되는, 그저 ‘어느새’일 뿐. 공연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나를 보고 짝꿍은 말했다.

 

“마흔 다 됐네.”

 

마흔이란 어떤 나이일까. 스물이나 서른 즈음에도, 마흔 즈음에도 별다른 생각이 없더니 덜컥 마흔이 되고 보니 나이의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 멋쩍다. 마흔은 그런 나이인가. 마흔이 되니 인생의 참 재미란 뭘까, 음주와 가무의 참 멋이란 뭘까, 지금까지의 풍류가 궁금해지고, 돌연 금주를 선언했다(응?). 마흔은 그런 나이인가. 마흔이 되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유유자적하는 환희를 알게 되어 욕조가 있는 숙박 업소를 자주 검색해보곤 한다. 마흔은 그런 나이인가.

 

‘흔’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마흔은 어쩐지 흔(헌) 것 같고, 흔한 것 같고, 흔들릴 것 같다. 그런 흔적을 남기는 생의 순간인 듯 여겨진다. 공자 왈, 마흔에는 “세상일에 미혹되지 아니”한다는데, 마흔은 좀처럼 흔흔한 나이이거나 흔쾌한 인생의 순간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오늘날 마흔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하여 시비분변(是非分辨)을 할 수 없고, 감정 또한 적절하게 절제할 수 없는 나이로, 쉽게 미혹되는 때인 것 같다. 요즘 출판계는 마흔이 대세라는데, 괜한 일도 아닌가 싶다. 나이를 염두에 두고 살기에 우리네 생활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시작되고 끝이 나지만, 나이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으로 어떤 자본의 바퀴는 굴러간다. 마흔에 해야 할 것, 마흔에 모아야 할 것, 마흔에 버려야 할 것, 마흔에 지켜야 할 것, 마흔에 먹어야 할 것, 마흔에 다스려야 할 것, 마흔에… 자기 계발과는 거리가 먼 진짜 마흔 살 인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 걸까?

 

나보다 앞서 마흔 살을 맞은 친구들은 대체로 마흔을 이렇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서른 살에는 몸에서 슬슬 신호를 보내잖아. 마흔 살에는 훅, 들어온다.” 그러니까 뱃살을 자연히 달고 사는 마흔들은 지금 그곳에서 훅, 훅, 사는 건가. 마흔이 되니 마흔이 궁금해진다. “어느새 내 나이도 희미해져 버리고. 이제는 그리움도 지워져 버려. 어느새 목마른 가슴 모두 잃어버린 무뎌진 그런 사람이 나는 되어만 가네.” 이런 노랫말도 훅. 김광석의 「서른 즈음」은 마흔에 들어야 제맛이라는 이도 있고, 시인 고정희는 “땅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고 사십 대를 노래했다. 과연 마흔은 그런 나이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마흔과 얼마나 더 멀리 떨어져 있는가. ‘마흔 지수’를 점검하는 시를 한번 읽어보자.

 

한 몸인 줄 알았더니 한 몸이 아니다
머리를 받친 목이 따로 놀고 어디선가 삐그덕
나라고 생각하던 내가, 내가 아니다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언제인지 모르게
삐긋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가슴을 따라주지 못하고
충직하던 손발도 저도 몰래 가슴을 배반한다
한 맘인 줄 알았더니 한 맘이 아니다
늘 가던 길인데 바로 이 길이라고,
이 길밖에 없다고, 나에게조차 주장하지 못한다
확고부동한 깃대보다 흔들리는 깃발이 살갑고
미래조의 웅변보다 어눌한 현재진행형이 나를 흔든다
후배 앞에서는 말수가 줄고 선배 앞에서는
그가 견뎌온 나날만으로도 고개가 숙여진다
실행은 더뎌지고 반성은 늘지만 그리 뼈아프지도 않다
모자란 나를 살 뿐인, 이 어슴푸레한 오후

-김해자 지음, 시집  『축제』  중 「마흔 즈음」 부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빼도 박도 못하게 마흔 즈음. 당신의 마흔 지수는 무사하신가요.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십 대에 김민기의 「봉우리」를 들으며 눈물짓던 후배 임수연 님은 그때부터도 이미 마흔 지수가 높은 거였구나, 지금은 알 수 있다. 아, 마흔은 과연 그런 오후인가.

 

 


 

 

축제김해자 저 | 애지
진중한 삶의 자세와 눈부신 혜안으로 승화시켰으며, 어렵고 고통스러운 찰나 희망과 긍정과 기쁨을 솔직하게 적어 시인의 선한 의지와 순도 높은 덕성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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