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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 “무슨 폰트가 제일 좋냐고요?”

글자를 향한 독창적 시선 『글자 풍경』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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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난하고 안전한 획일성과 표준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글자에는 인류 보편적인 특성도 있지만, 그와 나란히 대체불가능한 지역적 다양성이 있습니다. 하나의 기준만을 강요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2019. 0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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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이 네 글자는 내게 인쇄술과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로 읽힌다. 달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생각이다. 그 생각을 강물이라는 종이에 찍고 스크린에 실어 여러 사람에게 전한다. 이것이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이고, 글을 더 정련해서 전하고자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또 타이포그래피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사람들이 책과 신문과 잡지를 만들고 인터넷을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림과 글자는 한 몸에서 분화했다. 한 폭의 그림 같고 한 수의 시 같은 글자들이 강물에 달 찍히듯 사람의 마음에 찍힌다. 자국으로 남겨지고, 그림으로 그려지고, 기억으로 새겨지고,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살아남아 생명처럼 생생한 심상과 이야기를 이어 간다. (295쪽)

 

타이포그래피 전문가 유지원이 쓴  『글자 풍경』 은 보석 같은 책이다. 보석이 다채로운 빛깔을 자랑하듯, 이 책은 글자에 얽힌 다양한 결을 보여준다. 풍성한 내용도 내용인데, 빛의 각도에 따라 반사되는 색이 달라지는 띠지, 부록으로 실린 용어 정리, 이해를 돕는 사진, 본문에 사용된 가독성 높은 폰트가 이 책을 더욱 화사하게 한다.

 

글자는 인간과 늘 함께 산다. 출근하며 읽는 뉴스, 거리의 광고판, 모니터 화면에 띄운 업무 문서들, 점심 시간 식당에서 마주하는 메뉴판 등. 글자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글자가 똑같은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 원활한 소통을 위해 글자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우리의 일상에 늘 존재해온 글자의 편재성과는 달리 글자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알기 쉽게 풀이해준 책이 드물었다는 점은 다소 의아하다.  『글자 풍경』 은 타이포그래피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읽어도 재밌고 쉬운 교양서다. 동시에 전문가의 통찰력을 담아, 글자에 담긴 역사적 사회적 함의를 풍성하게 즐길 수 있게 구성됐다. 고대 서양의 로마자에서부터 21세기 최근 모바일 환경에서 변화된 폰트 환경까지 두루 다루면서, 사람과 어우러지는 글자는 어때야 하는지를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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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글자를 둘러싼 모든 활동

 

건축, 미술 작품에 관한 대중 교양서는 많았는데요. 글자에 관한 대중 교양서가 드물었습니다. 이 책을 내기로 한 계기와 책을 엮으면서 든 생각이 궁금합니다.

 

글자에 관한 전문서는 이미 나온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글자는 전문가만의 영역은 아니라서 글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2004년 독일로 유학을 갔을 때, 유럽에서는 글자에 대한 경험의 양상이 한국에서와는 여러모로 달랐어요. 그 원인을 관찰하면서 언젠가 이런 시각을 콘텐츠로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사진도 직접 찍고, 때로는 사용권을 구입하는 등 그때그때 이미지 자료들을 아카이빙해 두었어요.

 

그런데 글자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워낙 범위가 넓고 다채로워서, 어디서부터 다뤄야 할지 차근차근 구성을 짜는 것이 제게는 어려운 문제였어요. 그러던 중, 2017년 초에 연재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을유문화사의 편집주간님이 그때 연재를 소개해 주셨지요. 신문의 연재 칼럼에서 마감의 존재는 차곡차곡 이야기를 채우고 쌓아가는 강력한 견인차 역할을 해주더군요. 그렇게 1년 연재한 다음, 책으로 묶어서 낼 수 있게 됐어요. 결정적인 계기는 연재였지만 콘텐츠는 15년 정도 쌓여 있었어요.

 

타이포그래피가 전공자 아닌 사람들에게는 생소한데, 어떤 개념인가요.

 

강연을 하면 가끔 청중들이 타이포그래피가 뭔지 한 줄로 요약해주기를 바란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어요. 이 책에는 27가지 챕터가 나와요. 조급하게 정의 내리려 하지 말고 27 챕터를 다 읽어보신 후에, 독자분들이 각자의 견해를 차분히 형성하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편, 전공자들을 위한 대학교의 타이포그래피 수업에서는 첫날에 타이포그래피란 “글자를 둘러싼 모든 활동”이라고 정의합니다. 글자를 만들고, 이미 만들어진 활자를 배열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더 쉽고 편하게 전달하는 행위 모두를 넓은 의미의 타이포그래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자는 크게 글씨와 활자로 나뉘는데요, 손으로 쓰는 글씨는 서예와 캘리그라피 영역이고, 기계로 쓰는 활자 혹은 폰트가 좁은 의미에서 타이포그래피의 영역이에요.

 

글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선생님의 글씨체는 어떤가요.

 

제 웃음이 답해줄 텐데요. 왜 ‘천재는 악필’이라는 문구가 있잖아요. 한 사람의 특정한 다른 능력과 글씨 잘 쓰는 능력이 반비례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무관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합니다. 타이포그래피가 글자를 다루긴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 듯 손으로 쓰는 글씨 대신 기계를 활용하는 폰트를 다루는 영역이어서요. 모든 타이포그래퍼가 글씨를 잘 쓸 거라고 기대하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로마자 글씨는 잘 쓴다는 소리를 듣는데, 한글 글씨는 별로 못씁니다. 아주 어릴 때는 잘 썼는데요, 학창시절 빽빽이 숙제를 만나고 나서 한차례 한차례 무너져갔어요. 특히 ‘국민’학교 3학년과 중학교 2학년 때요. 빽빽이 숙제 때문에 빨리 써야겠다는 조바심이 붙으면서 성장기에 글씨가 망가진 거죠. 빽빽이 숙제는 글씨에 해롭습니다. (웃음) 폰트가 있어 다행이에요.

 

제목이 '글자 풍경'입니다. 책 마지막에서 '월인천강'을 이야기하며 책 제목에 관해 이야기해주셨는데요. 이번 인터뷰 자리를 빌어 제목을 정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연재가 들어왔을 때, 그 순간 떠오른 연재 제목이 ‘글자 풍경’이었어요. 순식간에 떠오른 게 정답일 경우도 많잖아요. 이 제목 덕분에 운신의 폭이 넓어졌어요. 디자인만 다루는 게 아니라 모든 풍경들을 포괄할 수 있었거든요. 예술과 건축 이야기, 과학 이야기, 역사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 글자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요. 입에도 잘 붙어서 기억도 잘 되고요. 책 제목은 최종적으로 출판사에서 확정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사연이 있어요. 연재가 몇 달간 진행되고 나서야 뒤늦게, 역시 타이포그래퍼인 영남대학교 정재완 교수님이 2010년경에 ‘글자 풍경’이라는 제목을 전시를 하셨다는 사실이 기억났어요. 비록 전시와 도서는 영역은 다르지만, 그래도 나중에 책 제목도 ‘글자 풍경’으로 정해지면 그 전에 양해를 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출간을 앞두고 책 제목이 정해지면서 이런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셔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그만큼 ‘글자 풍경’이라는 제목에 더 책임을 질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서문에도 공개해주셨지만, 선생님의 오늘을 있게 한 사건이 유년시절 서점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경험 외에도 선생님께서 글자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을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말보다 글이 편했어요. 어린애들은 늘상 궁금한 게 많잖아요. 부모님은 답변 대신 관련된 책을 사주셨어요. 제가 책으로 답을 대신 받고서도 화내지 않고 감사해하면서 좋아하는 성향의 어린이였으니 부모님 입장에선 다행이었겠지요. 어릴 때부터 세상을 통하는 통로가 제게는 주로 책 속의 글이었죠.

 

한편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여러 지역에 발령이 나셨는데요, 가장 친했던 친구들과는 편지로 소통했어요. 말보다 글로 이야기하는 게 어릴 때부터 편했어요.

 

진로에 관해서는 눈 앞에서 뭔가가 만들어지는 걸 보는 게 좋아서, 창작 분야인 디자인을 자발적으로 일찌감치 전공으로 택했어요. 예술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미술과 나란히 마지막까지 고민한 진로가 어문학 계열이었어요. 그림과 글을 모두 좋아했고, 그 접점이 바로 글자이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글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각 챕터가 서로 연관되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독립된 장이잖아요. 어떤 기준으로 글을 배열했나요?

 

기준은 “독자분들이 심리적으로 어떤 리듬을 타며 반응할까”였어요. 글자에 이전에 전혀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분들까지 읽어주시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구성했어요.

 

글자를 당근에 비유하자면요, 당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당근에 관심 없는 사람, 심지어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도, 적어도 몇몇 요리는 맛있고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는 코스라 생각하고 구성했습니다.

 

어떤 요리를 먹고 싶어할지, 독자의 입장에서 늘 생각했어요. 일단 먹고 싶어야 하고, 안 먹던 당근을 갑자기 먹다가 중간에 탈나면 안 되고요, 어떨 때는 부드럽고, 어떨 때는 독특한 식감이 나게 해서, 크고 작은 리듬을 타게 한다는 생각으로 조율했어요. 에피타이저, 본식, 디저트를 고려하듯이 일관성 있게 흐름을 짰죠. 앞 내용을 읽으면 다음 걸 읽고 싶도록, 아늑하면서도 지루해지지 않도록, 이런 부분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골격을 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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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의 지역성을 존중해야, 하나의 기준은 건강하지 않다

 

글씨체 역사에서 여성이 주도한 사례로 궁서체와 히라가나를 꼽으신 대목과, 판결문에만 쓰이는 판결서체가 있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습니다. 그밖에도 책에서 소개해주신 사례가 글자의 역사성에 관한 내용인데요. 글자에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보통은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잖아요.

 

대개의 학문들이 학문으로서 정립될 때 그 학문의 역사를 세웁니다. 기존에 나온 글자에 관한 숱한 전문서들도 대체로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서술이 전문가에게는 필요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분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래 고민해왔습니다.

 

이 책에서 역사적인 순서를 물론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이 왜 글자를 만들어서 더 잘 쓰고자 노력하는지, 왜 소통을 하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뒀습니다. 소통에 대한 욕구, 사람의 상호적인 행동, 글자를 형성하는 도구, 이렇게 더 본질적인 측면을 토대로 그 위에 역사와 지역성, 그리고 글자의 여러 속성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나가는 구성을 취했어요.

 

역사성에 관해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서구 역사인 로마자를 중심으로 맞추어져 가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지구상 모든 글자들이 대등한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는 관점에서, 역사성 못지 않게 지역성을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지역 글자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글자의 다양성과 생태계에 대해 언급해주셨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획일화되지 않음, 다양성 이런 게 글자에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평소에 “무슨 폰트가 제일 좋아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꼭 맞는 정답은 아닐지라도 틀릴 확률이 그나마 적은 폰트, 소위 무난하다고 불리는 디폴트 폰트가 몇 개 있긴 합니다. 역사성과 지역성, 그리고 취향이 최소화되어 ‘중립적’이고 ‘기능적’이라고 불리는 폰트들이죠. 그런데 그런 폰트들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오작동하는 일이 생깁니다. 무난하고 안전한 획일성과 표준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글자에는 인류 보편적인 특성도 있지만, 그와 나란히 대체불가능한 지역적 다양성이 있습니다. 하나의 기준만을 강요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동양의 붓과 서양의 펜이 만든 차이도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폰트 디자이너에게만 전가할 것이 아니라, 한글을 사용하는 여러 영역의 전문가들이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한글 글자체를 형성하는 붓의 특성을 양(量)적으로 기술하는 일이요. 글자에서 붓의 영향을 배제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 있는데요, 이미 글자의 형태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 붓은 우리 문화 속에서 떨어트릴 수 없는 다면적인 각인을 남겨두었습니다. 붓을 극복하고자 하더라도, 제대로 극복하려면 붓을 이해하는 게 순서입니다.

 

서구는 로마자라는 글자체계뿐 아니라 문화 전체가 환원주의적인 시스템에 유리합니다. 단순화가 용이해요. 붓은 그에 비하면 훨씬 복잡합니다. 동양 문화 전체가 전반적으로 복잡하죠. 시스템보다는 개인 역량을 많이 요구하고요. 이런 특성은 산업혁명 이후의 기계화 시대에는 불리했습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잖아요. 폰트는 기본적으로 체계화와 유형화의 작업이니, 한글에서도 복잡한 인자들을 조심스럽게 분류해내어 알고리즘화 할 수 있어요. 타이포그래피 전문가뿐만 아니라 컴퓨터 공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서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화적 특성인 복잡함을 억지로 단순하게만 하는 건 자문화 부정 밖에 안 됩니다. 이런 일은 디자이너 선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글자 풍경』 은 다른 분야에 이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전문가가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정리해두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제대로 넘어갈 수 없어요. 서양의 원리를 그대로 이식하지 않고, 우리가 가진 본연의 것을 정확히 기술해서 거기에 최적화해서 가야죠. 글자를 쓰는 모든 사람들이 이 점을 의식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도비 프로그램을 쓸 때 한글 폰트가 다소 불편하다는 지적도 하셨죠?

 

저는 어도비의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을 기본적으로 존중합니다. 그런데 서구에서 글자를 둘러싼 기계 환경을 주도하다보니, 글자를 배열하는 소프트웨어들도 주로 서구식 공간 논리로 이루어져 있어요. 서구의 로마자는 균질하게 선형 진행하는 글자체계이고, 동아시아 글자들과 한글은 칸을 먼저 형성한 후 획이 적든 많든 같은 크기와 모양의 칸 안에 낱글자들을 배치하는 글자체계입니다. 공간의 논리가 다릅니다. 따라서 기술 환경은 세계의 어떤 다른 글자들보다 점점 더 로마자에 익숙하게 진화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은 어도비에서도 자각을 해서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습니다.

 

컴퓨터나 여러 디바이스, 문서 등에서 한글 폰트를 쓰면서 “이상하다, 왜 로마자보다 안 예쁘지? 한글이 원래 안 예쁜가?”, 이런 생각들 세종대왕님께 죄송해서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해도 한번씩 갸우뚱하면서 해보잖아요. 그건 로마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디지털 디바이스 환경이 진화해가고 있어서예요. 로마자 아닌 문자권 전문가들이 계속 이런 문제 제기를 하고,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한 원인을 정확히 이해하고 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책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명조체와 산돌커뮤니케이션의 산돌정체에 관해서 소개해주신 장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글자 풍경』 을 만드실 때 책의 폰트에 관해서도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디자인을 해주신 유윤석 디자이너님의 타이포그래피적 판단을 전적으로 믿었어요. 그래픽 혹은 편집 디자이너라면 본문에 무슨 폰트가 사용되었는지 보면 바로 아실 거에요. 그렇지 않은 분들이 일대일로 문의하시면 알려드릴 수 있지만,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로는, 마치 그 폰트가 하나의 정답일 듯 여겨질까 봐서요. 문제가 하나 있으면 다양한 해결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상황에서는 이 폰트가 답이 아닐 수 있어요. 둘째로는, 본문 폰트로 쓸 수 있는 한글 폰트 종류에 제한이 있어, 그 제한 속에서 선택된 것이거든요. 꼭 맞는 답을 내려면 책 전용 폰트를 개발해야 할텐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럴 의미도 없지요. 하지만 한글 본문 폰트의 선택지가 더 다양해졌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폰트도 어느 디자이너가 쓰느냐에 따라 인상이 달라집니다. 본문 텍스트가 눈에 쏙쏙 박히게 다루는데 능숙한 유윤석 디자이너님의 손길을 거쳤기에 지금 지면 디자인과 같은 모양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책에서 주로 사용하는 명조체가 모니터나 모바일에서는 어색하게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관련해서는 ‘큰 글자는 보기 좋게, 작은 글자는 읽기 좋게’ 챕터에서 다루었어요. 전자책을 기획하고 개발하고 디자인하는 분들은 꼭 이 장을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책에서 잘 기능하던 폰트가 스크린과 모바일에서 어색하게 보이는 건 사용자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글자는 기술 환경에 반응합니다. 스크린과 모바일은 종이책보다 해상도가 아직 낮아서 명조체의 정교한 형태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면 아닌 화면에서는 명조체가 정답이 아닌가 하면, 그렇게 단언할 수도 없어요. 기술이 발전하고 화면 해상도가 높아지면서 화면이 눈에 더 친화적으로 변화해가면 명조체가 스크린에서도 찰떡같이 붙을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단계에서도 명조체를 크게 쓰면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합니다. 또 명조체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화면에 최적화한 명조체들이 최근에 개발되고 있습니다. 본명조가 한 예입니다.

 

뭔가가 어색하다고 느끼신다면, 사용자가 느끼는 것이 답입니다. 피드백을 주고받는 경로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불편을 감지하고 의식하고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건강한 일입니다. 예의를 갖추어서 피드백한다면, 콘텐츠 서비스 제공자들도 고마워하며 정교하게 원인을 살피고 섬세하게 개선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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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 교수가 말하는 책의 힘, 좋은 글

 

타이포그래피 전문가인 선생님에게는 책이 남다른 의미일 듯합니다. 선생님에게 책이란 무엇인가요?

 

앞날개를 펼치면 저자 소개 첫 줄에 ‘글자와 책을 좋아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라 써 있어요. 저는 세상을 접하는 여러 통로를 가지는 걸 좋아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책은 세상의 다양하고 멋진 사람들이 가장 정제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되는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은 느낄 거예요. 자신이 책 속에 고도로 정제되고 연마되어 담긴다는 것을. 이런 측면이야말로 어떤 미디어가 부상하더라도 책이 잃지 않을 단단한 힘이라고 생각해요.

 

유튜브가 강력한 플래폼이 되었습니다. 소통의 중심이 영상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보면서 이런 매체 변화를 어떻게 조망하시나요?

 

저는 졸업 후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경력을 시작했다가, 글자체 전반으로 관심을 넓혔어요. 여전히 책과 종이로 하는 소통을 가장 사랑하지만, 이런 관심 확장은 매체 변화에 대한 제 개인의 응답인 것이죠.

 

다른 매체가 나타나면서 책의 입지는 줄어들 겁니다. 그 과정에서 책의 역할과 형식도 어느 정도는 변화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책도 다른 매체와 대화하고 그에 응답하면서 결국 비가역적인 변모를 겪는 걸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전통적인 방식의 책이 익숙하지 않은 어린 친구들에게 책을 강요하거나 그들을 탓하기보다는, 그 친구들이 더 친근하게 여기는 매체로부터 책에 교두보를 놓는 장치를 책 내부에서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디자이너의 문제해결력이자 창의력이겠지요. 디지털 미디어의 짧은 호흡, 그리고 시선을 끄는 그림과 역동적인 영상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책으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지, 이 질문에 타이포그래피와 편집 전문가가 대답할 몫이 있다고 봅니다.

 

글자에 관해서는, 인류가 이제 더이상 언어적인 발화에 의존하지 않고 뇌 신호로 소통을 하는 미래가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남아있을 겁니다. 책이 그랬듯, 이미지 영상과 호흡을 함께하는 환경에서 글자 자신을 적절히 진화시켜 가면서요. 미래를 그렇게 예측해본다면, 글자가 아예 없어지는 일은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일어나기 어렵지 않을까요? (웃음)

 

이번 책에서 철학, 역사, 예술이 어우러진 풍성한 글쓰기로 독자를 안내해주셨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어떤 게 좋은가를 미리 정의하지 않으려는 편이에요. 한 사람이 생각하는 건 한계가 있을 텐데, 제가 한정을 지어 두면 다른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지만 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가능성들을 못 보게 되잖아요.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를 고정하려고는 하지 않아요.

 

다만, 수많은 글을 읽어봤더니 특정한 글이 좋더라는 개인 성향은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글은,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저자 고유의 관점으로 충분히 숙성해낸 글이에요. 저자의 정신적인 근육이 아주 질긴 글이요. 그 결과로 산뜻하고 가벼운 문체가 나올 수도 있고, 묵직한 문체가 나올 수도 있어요. 정신의 근력이라는 게 곧바로 문체의 성격을 뜻하는 건 아니에요. 여하간 그걸 감지할 때 감탄하고 책을 껴안으며 인류애를 느낍니다.

 

이번 책에 실린 27가지 글 중에서는 어떤 글을 제일 좋아하나요?

 

제가 특정한 글이 좋았다고 하면, 독자 분들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게 될 수도 있어 어쩐지 밝히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각자 어떤 부분이 좋으셨는지 제가 듣고 싶습니다. 한 가지, 본문 독서 들어가기 전에 준비 운동으로 맨 뒤의 ‘용어 정리’부터 읽으면 도움이 될 거에요.

 

다음에는 어떤 책을 기획하시나요.

 

타이포그래피 전문가들을 위한 실용적이고 학술적인 전문서를 집필하고 있고요, 더불어 타이포그래피라는 소통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잘 기능하게 하기 위한 제반 활동을 병행하고 싶습니다.

 

후자에 관해서는, 가령 수포자들에게 수학의 얼굴을 다정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서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어려운 지식을 쉽게 가공해서 가장 약한 사람에게까지 닿도록 도와주는 역할이 콘텐츠 커뮤니케이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타이포그래피 전문가로서 사회적 역할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통하는 일을 담당하고 싶어요.

 

중고등학교에서는 수많은 수포자가 나온다고 합니다. 속상한 일이죠. 그 긴 수학 시간에 그 혈기왕성하고 아까운 10대의 소중한 시간을 들러리 서는 데 보내게 한다는 건요. 이와 관련해서 얼마 전 교육감이 문제의식을 느낀 점에는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 해결방안이 수학 시간을 줄이는 것이라니요. 수학 여행에서 사고가 났다면, 이후에 안전을 강화해야 할 판에 수학여행을 없앤다는 조치를 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요.

 

우리 인생에서 수학 지식의 가치를 수포자에게까지 연결해주는 것도 타이포그래피, 즉 시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 전문가와 교육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마땅히 그분들이 코어에 있어야 하고, 연결 단계마다 각각의 전문적 역할이 있다는 거지요.

 

수학과 과학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질책 당하지 말고, 자존감 있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데에 있어서 수학과 과학을 접하는 일을 더 즐겁고 가치있고 친근하고 아름다운 경험으로 만들어주고 싶어요. 형편이 부족한 아이들이라고 소외되지 않을 수 있도록요. 이 일에는 수학자와 교육자들에게 소통 전문가와 문화예술가들이 힘을 보탤 수 있어요. 멀리 보면, 이런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글자 풍경유지원 저 | 을유문화사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의 시선으로 낯설게, 인문적 시선으로 통찰력 있게 글자에 아로새겨진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픙경 과 마주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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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손민규(인문 PD)

티끌 모아 태산.

글자 풍경

<유지원> 저13,500원(10% + 5%)

보는 관점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 글자가 품은 스물일곱 가지 색다른 세상 여기 ‘사랑’이라는 글자가 있다. 인류학자라면 문화권마다 다른 ‘사랑의 표현 방식’에 대해 말할 것이고, 언어학자라면 문자권마다 다른 표기, 즉 한글의 ‘사랑’과 로마자의 ‘LOVE’와 한자 ‘愛’에 대해 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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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끝나지 않는 오월을 향한 간절한 노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간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철저한 노력으로 담아낸 역작.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 고통받았지만,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면서 그 시대를 증언한다.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어떤 사랑에 대하여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자 가장 최근작. 말해지지 않는 지난 시간들이 수십 년을 건너 한 외딴집에서 되살아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작품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한강의 대표작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자 한강 소설가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섬세한 문장과 파격적인 내용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가 되고자 한 여성의 이야기.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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