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노명우의 니은서점 이야기
그 서점이 품고 있는 작은 우주
손님은 독자이자 소우주를 탐험하는 우주 여행자
판매 서가에 전시될 책 선별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사고를 요구했다. (2019. 02. 12)
인테리어 공사가 끝났다. 그렇다고 막바로 서점 영업에 돌입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인테리어는 서점 창업 준비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서점의 정체성은 서점 인테리어가 아니라 서점이 구비하고 있는 책에 의해 결정된다. 폭은 넓지만 산만하지 않고, 수준은 낮지 않지만 독자가 겁먹을 만큼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지 않은 적절한 책을 구비하지 못하면 서점 인테리어는 빛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책을 꽤 많이 읽은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입고할 도서 선정은 식은죽 먹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독자로서 필요한 책을 그 때 그 때 주문하는 것과 서점의 책꽂이를 채우는 일은 완전히 달랐다. 판매 서가에 전시될 책 선별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사고를 요구했다.
한 해에 출간되는 책만 해도 수 만 종이다. 유통 가능한 책의 정확한 규모는 모르지만, 한 해에 수 만 종이 출간되고 출간된 책 중에서 꾸준히 수요가 있으면 절판되지 않으니 서점이 입고 여부를 고려할 수 있는 대상 책은 수 십 만권에 달한다. 니은서점의 책꽂이를 빈틈없이 꽉 채운다 하더라도 서가에 전시될 수 있는 책은 불과 1천종에 불과하다. 그 수십 만권에서 수용 가능한 책을 선별해내는 일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고민을 요구하는 노동이었다. 니은서점처럼 작은 서점인 경우, 전시할 수 있는 책의 권수가 제한적이기에 더욱 섬세하게 책을 골라야 한다.
전국 수십 개의 작은 서점이 창업 과정에서 겪었을 선택의 고통을 니은서점도 겪었다. 수만 권의 책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의 여유가 있는 대형서점이나 물리적 공간의 제약이 없는 온라인 서점이라면 책 선정이 좀 더 수월할지 모르겠지만, 서점의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책을 까다롭고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유행어처럼 되어버린 ‘북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를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모든 작은 서점은 태생적으로 큐레이션 서점이다. 경제학 교과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규모의 경제’가 경쟁력을 키워준다지만, 작은 서점의 경쟁력은 ‘규모의 경제’가 아니라 ‘규모의 경제’를 유지할 수 없기에 책을 선별한 결과인 큐레이션에 있다.
수많은 작은 서점은 큐레이션 서점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서점이 지향하는 바가 각자 다르기에 각 서점은 하나의 소우주를 구성한다. 작은 서점에 발을 들여놓은 손님의 눈이 밝다면 서점의 사이즈가 아니라 그 서점이 품고 있는 작은 우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니은서점이라는 작은 우주 역시 이렇게 만들어졌다. 마스터 북텐더의 눈으로 니은서점의 책을 선별했고, 그렇게 선택된 한 권의 책은 니은서점이라는 작은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행성이 되었다.
손님은 독자이자 소우주를 탐험하는 우주 여행자이다. 우주 여행자는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속도감 있게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유영한다. 만약 유영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냈다면, 손님은 자신이 단순히 상거래에 참여하고 있는 고객이 아니라 책의 더미 속에서 나만의 보석을 찾아내는 발굴자임을 증명해낸 셈이다. 저자의 명망도나 베스트 셀러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보석을 발굴하고 싶어 하는 독자라면 자신과 잘 어울리는 발굴터인 작은서점부터 찾아내야 한다.
세상의 많은 작은 서점처럼 니은서점은 책의 발굴을 돕는 조력자이자, 책을 발굴하는 터전이 되기를 기대하며 독자의 책 발굴을 돕기 위해 장치를 마련해두었다. 니은서점의 서가에는 판매용 책 사이에 ‘공유서재’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책이 꽂혀 있다. 니은서점 마스터 북텐더가 읽은 책들이다. ‘공유서재’는 큐레이션 서점 니은서점 속의 또 다른 숨겨진 큐레이션인 셈이다. 공유서재의 책을 펼쳐보면 밑줄도 그어져 있고, 코멘트도 써 있고 포스트 잇도 덕지덕지 붙어 있다. ‘공유서재’의 책에는 출판사에서 홍보용으로 만든 띠지에 적힌 문안이나 유명인의 추천사와는 다른 마스터 북텐더의 솔직한 감상이 적혀있다. ‘공유서재’ 속에 들어있는 마스터 북텐더의 메모는 책방이라는 소우주를 여행하는 또 다른 여행자가 참고할 수 있는 발굴기인 셈이다.
니은서점의 한 가운데는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책상이 있다. 나만의 행성을 찾는 사람이라면 서가에서 책을 뽑아 책상에서 책을 검토할 수 있다. 누군가 그 책상에 앉아 책을 검토하면, 순간 서점은 그 사람만의 서재로 변신한다. 그 책상에 앉을 그 누구를 위해 니은서점의 문은 열려 있다. 다른 모든 작은 서점처럼, 그 서점에 어울리는 눈 밝은 독자를 기다리며.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론이 이론을 낳고 이론에 대한 해석에 또 다른 해석이 덧칠되면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가는 폐쇄적인 학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는 사회학을 지향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인생극장』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