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교석의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꾸준한 수집품
마지막 회 :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혹시나 딱히 지금까지 특별히 모으는 것 없다면 잡지에 한번 관심을 가져보길 권한다. 요즘 워낙에 다양한 독립잡지들이 늘어나고, 외국 잡지들도 직수입되어 들어오기 때문에 취향에 맞는 것을 찾기 어렵지 않다. (2019. 01. 22)
영화 <어바웃 어 보이>
아이폰도, 카카오톡도, 소셜미디어란 존재는 물론 개념조차 없던 2002년, 영국 워킹타이틀사는 영화 <어바웃 어 보이>를 통해 소확행이나 케렌시아, 1인 가구의 충만함과 같은 오늘날의 풍경과 정서를 일찍이 담아낸 바 있다. 다양한 대중문화를 자양분으로 삼는 닉 혼비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영화답게 영국의 17세기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의 시구를 인용한 본 조비의 산타페 노래가사 ‘Nobody is an island(누구도 섬처럼 혼자 살 수는 없다)’를 비틀면서 시작한다. 휴 그랜트가 분한 윌은 자기 생각에 모든 사람은 섬이라며 TV, CD, DVD, 홈 에스프레소 메이커 등등이 존재하는 현대사회는 1인 가구로 살아가기 매우 적합한 환경이라고 읊조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올바른 물품을 갖출 수 있는 여력과 심미안뿐, 이 두 가지만 있다면 요즘 세상에 혼자 지내는 삶은 천국의 섬에 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공간은 스페인의 이비자쯤 된다고 자부한다.
물론, 주인공 윌이 갖춘 풍요로운 공간과 충만한 일상과 성장을 자발적으로 유예하는 라이프스타일은 절대 마르지 않는 아버지의 위대한 유산으로 가능했다. 따라서 현실적 제약을 초월한 영화나 소설일 뿐이라고 선을 그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윌의 삶의 태도에는 혼자 살수록 공간이 주는 안온함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우선, 윌은 혼자 사는 삶을 외롭고 처량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쳐다보는 타인의 시선에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윌은 혼자여서 편했고, 그래서 바빴다. 그래서 자신의 공간을 스스로 책임지고 가꿔가야 하는 섬이자, 자신의 취향과 편의의 모든 것이 녹아 든 유토피아로 여기는 삶의 태도는 오늘날 1인 가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시대에 더더욱 참고해볼 만하다.
영화는 결국 유사 가족 커뮤니티와 같은 대안적 공동체로 귀결된다. 하지만 <어바웃 어 보이>에서 내가 배운 건 쇼핑을 통해 공간에다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삶의 태도와 로베타 플랙이었다. 지극히 X세대다운 소비 철학이 90년대 이후 생들에겐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내겐 오롯이 나 혼자서 컨트롤 할 수 있는 공간이 주는 안온함에 관한 인생 영화였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책임이란 인간관계에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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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공간에는 자기만의 느낌이 묻어나야 하는 법이다. 비싼 가구나 제대로 컨설팅 받은 인테리어도 물론 훌륭하겠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애정을 보이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성실한 청소와 자신의 물건으로 채워가는 쇼핑에 있다. 자신을 투영하는 어떤 무언가로 자신의 정체성과 감수성을 확인하는 것은 물신 숭배라기보다 정서적 명상 활동에 가깝다. 퇴근하고 대충 씻고, 먹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속에 갇혀 지내는 건 우리를 보호하는 공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며 보금자리를 허술하게 만드는 유지보수 차원의 태업이다.
그래서 자기만의 공간을 꾸미는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늘 모은다. 그렇다고 이베이를 통해, 유럽의 헛간과 모로코나 우붓 길거리를 뒤져가며 비싸고 희소성 있는 무언가를 찾아오는 콜렉터가 될 필요는 없다. 내세울 스토리보다 나와의 접점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 헤비메탈 테이프, CD, 브로마이드, NBA카드, 구숙정 사진과 필모그래피, 플레이모빌, 레고, 광우병 시위로 인해 MB정부가 도검 유통 및 소지허가를 옥죄기 전까지 나이프 수집도 즐겼다. 오늘날에도 리넨 티타올, 그릇, 도마, 유리컵, 영국산 커트러리 등 자금이 허락하는 한 일상을 이롭게 할 물건들에 늘 관심을 갖고 산다. 콜라를 꺼내다 문득, 2013년 그 여름의 감상에 잠시 빠져볼 수 있으니, 냉장고 마그네틱 수집도 훌륭한 꺼리다. 집 안 어딘가 시간과 기억이 어딘가 잊혀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삶에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수집품들은 침대 밑에서, 서랍 깊숙한 어딘가에서 혹은 시내 한 복판에서 언젠가 문득 마주치는 옛 추억과 같다. 다만, 마블의 영화나 스타워즈, 건담, 드래곤볼, 베어비릭 같은 콘텐츠 기반으로 한 상품들은 추천하지 않는다. 키덜트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몸을 던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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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딱히 지금까지 특별히 모으는 것 없다면 잡지에 한번 관심을 가져보길 권한다. 요즘 워낙에 다양한 독립잡지들이 늘어나고, 외국 잡지들도 직수입되어 들어오기 때문에 취향에 맞는 것을 찾기 어렵지 않다. 특히 라이프스타일을 다루는 잡지들은 미적 감각에도 도움이 되고 대리 만족도 가능하며, 독서 훈련과 결정적으로 공간에 애정을 품도록 유도한다. <POPEYE>, <&Premium>, <Casa BRUTUS> 등의 일본 잡지나 <RUM>, <APARTMENTO> 등을 비롯한 여러 해외 및 국내 잡지들을 사 모으는 행위를 통해 좌표를 세울 수도 있고, 그 자체가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나 또한 삶의 지향을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이들에게 경배를 바치며 꾸준히 사 모은다. 그러다 보면 내 공간을 더욱 더 애정 어린 눈망울로 둘러보게 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공간은 이것을 풀어놓고, 숨겨놓은 무대이자 미로다. 누군가의 집에 놀러가는 게 재밌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가는 흥미로운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집에서 살림이 아니라 사람을 보게 된다. 다른 이의 집을 구경하는 재미는 얼마나 넓은지, 어떻게 멋지게 꾸며 놓았는지를 보는 게 아니다. 다른 이는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 지켜보는 데 있다. 정답은 없다만, 스포츠 팀이든, 아티스트든, 책이든, 독립 잡지든, 장인의 공예품이든, 자신의 공간에 자기만의 수집품을 갖추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 자체가 바로 당신이란 인간을 설명하는 단서이자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푸른숲 출판사의 벤치워머. 어쩌다가 『아무튼, 계속』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