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형 “내 동화의 첫 독자는 어른이길”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동화, 『바나나 가족』 펴내
어느 날 우연히 ‘바나나는 송이를 작게 떼어 놓으면 빨리 시든다’는 내용의 글을 읽었는데, 불현듯 이 작품의 가족들이 떠오르더라고요. (2018. 12. 19)
5년째 LA에서 살고 있는 초등학생 규민이에게 아빠는 낯설기만 한 존재다. 9,600여 킬로미터, 규민이가 있는 LA와 아빠가 있는 서울의 거리만큼 부녀의 사이는 멀어져 있다. 그런 아빠가 가족을 만나기 위해 LA에 왔다. ‘규민’이라는 이름보다 ‘켈리’라는 이름이 훨씬 마음에 들고, 갑자기 방문한 아빠 때문에 친구들과의 여행을 포기한 채 가족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이 못마땅한 철부지 딸은 여행 내내 심통이 나 있다. 어색한 동행을 시작으로 한 4박 5일간의 여행은 엄마와 아빠의 다툼으로 마무리되고, 한국에 돌아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본 규민이의 가슴은 자꾸 답답하게 아파온다.
『우리 반 욕 킬러』 , 『슈퍼 히어로 우리 아빠』 , 『진짜 거짓말』 등 아이들의 눈높이를 겨냥한 동화를 쓰는 임지형 작가의 신작 『바나나 가족』 은 멀리 떨어져 사는 탓에 마음까지 멀어진 기러기 가족의 안타까운 현실을 그리고 있다. 수화기 너머로 만나온 아빠를 마주한 규민이는 4박 5일의 여행기간 동안 수없이 변하는 여러 감정을 느낀다. 아빠의 쓸쓸한 뒷모습에 잠 못 이루던 규민이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함께하지 못하는 가족의 이야기
미국 여행 당시 만난 가족의 사연에서 『바나나 가족』 의 이야기를 떠올리셨다고요.
2011년에 패키지여행으로 LA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함께 여행하는 부부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화목하고 좋아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었죠. 여행 일정 중 어느 날, 호텔에서 가이드와 마음이 맞는 여행객 몇 명이 술자리를 가지게 됐는데 기러기 부부 중 남편이 그 자리에 참석을 했어요.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성대모사를 잘하시는 분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재주가 있냐”고 물었더니 그분께서 기러기 생활이 너무 힘들다며 속사정을 털어 놓으시더라고요. 텅 빈 집에 혼자 있기 싫어 여가시간에는 늘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는데 성대모사를 했더니 사람들이 너무 즐거워하며 좋아하더라는 거예요.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여행을 오긴 했지만 아내와 단 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게 너무 어색하다고 하시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겉으로는 단란해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가족을 보면서 ‘가족이란 뭘까’ 생각하게 되었고, 동화로 표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그 당시에 초안을 써 놓았다가 내용을 보완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껴서 오래 묵혀 두었거든요. 때마침 올해 미국 여행을 다시 갈 일이 생겨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당시 여행했던 코스를 그대로 다시 방문했어요. 덕분에 내용을 수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2011년 여행에서 보고 느꼈던 내용을 토대로 전체 스토리를 재구성해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어요.
그간 많은 책을 출간하셨는데, 올해의 마지막 작품을 낸 소감이 어떤가요?
『바나나 가족』 은 올해 나온 7번째 책이고, 개인적으로 통틀어 20번째 쓴 작품이에요. 그동안 제가 써왔던 동화들과 결이 달라서 제 작품을 좋아해줬던 독자들이 실망할까봐 긴장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좋은 평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제가 의도한 부분을 알아주신 것 같아서 고마워요.
가족, 바나나 한 송이처럼
바나나의 특성에 빗대어 가족의 이야기를 한 것이 돋보였어요.
처음에는 단순하게 4박 5일간 여행하는 것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냈어요. 그런데 내용을 먼저 읽어본 주변인들이 가족보다 여행 이야기에 치중한 것 같다는 의견을 들려줘서 제 의도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바나나는 송이를 작게 떼어 놓으면 빨리 시든다’는 내용의 글을 읽었는데 불현듯 이 작품의 가족들이 떠오르더라고요. 곧바로 제목을 ‘바나나 가족’이라 새로 짓고, 바나나를 매개체로 이야기를 수정했죠.
중요한 소재를 인연처럼 만난 셈이네요.
숨고르기를 하며 오래 묵혀둘 때 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어떻게 내용을 풀어갈까 고민하고 있으면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 좋은 소재가 하나씩 제게 다가오는 경험을 하는데, 『바나나 가족』 은 특히 그랬어요. 사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생각이 많았던 작품이기도 해요. ‘바나나가 서로 떨어지면 금세 시들 듯 가족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출간할 때까지 많은 고민을 했어요.
작가의 말에서 그 고민이 느껴졌어요.
함께 살고 싶어도 사정상 그럴 수 없는 가족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어떤 가족은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안정적일 수도 있고요. 저 또한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더 쓰였어요. 하지만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가족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자는 거였기 때문에 그 의도가 왜곡되지 않고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가의 말을 썼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가족이 서로 더욱 사랑할 수 있을지 되짚어볼 수 있는 이야기로 읽히길 바랄 뿐이에요.
이들 가족과 내내 여행을 함께하는 ‘광주할머니’는 또 다른 주인공처럼 보였어요.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슬픔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안타까웠는데요.
광주할머니가 규민이에게 하는 말들은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이었어요. 저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고, 형제들은 다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혼자 살았거든요. 당시에는 외롭다는 생각을 별로 못 했는데 결혼을 해서 가족을 꾸리고 나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외롭다고 말하면 정말 외로워질 것 같아 감정을 애써 부정하고 살았던 거예요.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무의식적으로 제가 힘들었던 부분을 광주할머니에 투사해 규민이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또 실제로 미국에 여행을 갔을 당시에 홀로 오신 할머니가 계셨어요.(웃음) 미로 같은 호텔에서 길을 잃을까봐 걱정하시는 모습에 제가 한 방을 쓰겠다고 자처해서 모시고 다녔거든요. 그분이 광주할머니의 모델이 되었어요.
『바나나 가족』 에서는 규민이가 그 역할을 하며 할머니와 줄곧 함께 다녀요.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는 것도 광주할머니를 통해서고요.
저는 아이들 스스로 문제를 개척해나가는 이야기를 자주 써왔어요. 그런데 기러기 가족의 아픔은 어른의 입장에서도 해결하기가 어려운 일이잖아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이가 혼자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게 작위적이라 생각했어요. 세월을 오래 산 어른이 규민이에게 힌트를 주면 좋을 것 같아 할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왔죠.
전작 『슈퍼히어로 우리 아빠』에는 타인을 구하느라 가족을 등한시하는 아버지가 주인공인 반면, 『바나나 가족』 에서는 가족을 위해 홀로 헌신하는 아버지가 주인공으로 그려집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가족 내의 ‘아버지’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요. 그만큼 어려운 존재였거든요. 아이들은 부모님이 싸우면 혹시 이혼하지 않을까 가장 먼저 두려워하는데, 저는 ‘저러다 두 분 중 한 분이 먼저 돌아가시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모님이 치열하게 싸우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죠. 중학생 때 엄마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비로소 싸움이 끝났고, 이제 제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결핍이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쓰는 작품 안에 좋은 아버지를 원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아버지가 소홀한 것에 대해 불평불만을 갖는 아이가 나오는 이유는 그 때문인 것 같아요. 그토록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가 아니라 따뜻하고 포근한 아버지가 갖고 싶었던 거죠. 가족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한없이 따뜻했으면 해요.
어른이 동화를 읽어야 해요
최근 몇 년 사이 꾸준히 여러 권의 책을 펴내고 계세요. 이렇게 많은 작품을 쓸 수 있는 비결이 궁금해요.
제겐 이 일이 생업이니까요.(웃음) 악착같이 쓰거든요. 2008년에 등단한 뒤로 첫 책이 2012년에 나왔는데요. 그땐 아이들 독서논술 지도하는 일을 겸업으로 했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글을 써도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아동문학상에 계속 도전했지만 번번이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고, 일을 마치고 집에 와 새벽 3-4시까지 글 쓰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다 상했어요. 그래서 2015년경에 남편에게 부탁했죠. 경제적으로 힘들더라도 글만 쓰고 싶다고요. 그때부터 하루도 안 쉬고 직장인처럼 앉아 글을 썼어요. 그러다보니 작품이 많이 쌓였고, 어느 순간 출판사와 줄줄이 계약이 이루어지더라고요. 요즘도 글을 안 쓰면 불안해서 정해진 분량은 무조건 쓰고 하루를 마쳐요. 강연으로 바쁜 날에도 ‘한 줄이라도 쓰자’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죠. 그게 쌓이는 것 같아요.
어린이 문학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고등학생 때부터 소설가가 꿈이었는데, 사정상 대학을 안 가고 10년 넘게 일을 했어요. 하지만 작가라는 꿈을 포기하지 못해 광주대학교 문창과에 뒤늦게 입학했어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다 보니 답답하고 힘들더라고요. 그러던 참에 한 선배가 합평 모임에 참여하지 않겠냐고 제안해서 나가보았더니 동화합평반이었어요. 그 모임을 계기로 처음 동화를 읽게 됐어요.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동화는 아이들이나 읽는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때부터 동화에 푹 빠져들었죠. 그렇게 동화를 읽고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동화가 나를 자라게 한다는 느낌이 문득 들더라고요. 부모님이 돌아가실 무렵에 성장이 멈춘 내 마음 안의 어린 아이가 동화를 읽으며 성장하는 것 같았어요. 동화는 아이들에게는 성장제이지만, 어른들에게는 치료제예요. 지금도 저는 동화가 제일 재밌어요.
작품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있다면요?
아이 때는 실컷 노는 게 의무인데 요즘은 그게 어려운 시대잖아요. 학원에 가고 공부를 하느라 마음껏 뛰어놀 시간이 없다면 책 속에서라도 재미있게 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만약 『바나나 가족』 처럼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아이들이 있다면 동화를 읽으며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제 동화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위로의 쉼터였으면 좋겠어요. 그 마음으로 글을 써요.
강연, 북토크 등을 통해 수많은 독자들을 만나고 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어린이 독자가 있나요?
작년에 일산에서 강연을 했었는데 몇 개월이 지나서 그때 강연을 들은 아이에게 메일 한 통을 받았어요. 저를 만나서 인생이 바뀌었다는 내용의 편지였어요. 제 강연을 듣고 난 뒤 흥미가 생겨 책을 다 찾아보았고, 그 책을 다 읽고 나니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책도 읽게 되었는데 책을 많이 읽으니 글이 쓰고 싶어졌다며 커서 작가가 되겠다는 거예요. ‘작가라는 꿈을 갖게 해주었으니 작가님이 내 인생을 바꾼 것’이라고 쓴 메일을 보고 정말 큰 감동을 받았어요.
눈물이 날 것 같은 메시지네요.
실제로 많이 울었어요. 너무 좋아서요. 그때 인연이 됐던 사서 선생님께 들었는데 그 아이가 그해의 독서왕이 됐대요. 이전까지는 책을 정말 안 읽던 아이였는데 말이에요. 뿌듯하고 기쁜 마음에 아이에게 답장을 했는데, 또 한 통의 메일이 왔어요. 메일 쓰는 방법을 배워서 처음 편지를 쓴 대상이 저였다고 하더라고요. 강연장에서 만나는 많은 아이들이 다 기억에 남지만 특히 그 아이의 메일을 보면서 ‘이래서 작가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더욱 더 사명감을 갖고 글 쓰고, 아이들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죠.
좋은 동화책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요?
구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이가 어떤 문제를 맞닥뜨리고 그걸 받아들이면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그 안에서 몸과 마음이 성장하는 이야기겠지요. 그런데 제게 있어 동화의 첫 번째 독자는 어른이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을 대변할 수 있어야 좋은 동화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동화 속에서 아이들이 만나는 문제는 어른들이 만든 경우가 많잖아요. 『바나나 가족』 에 등장하는 기러기 가족의 문제도 그렇고, 학업에 찌들어 힘들어하는 어린이의 모습 등도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겪는 일들이에요. 아이들의 어려움과 고민을 알기 위해서는 어른이 동화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시사적인 내용을 동화로 풀어내는 이유도 그 때문이죠. 아이들의 문제는 어른들의 문제이고 그건 곧 부모의 문제이기도 하거든요.
어른들은 아이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맞아요. 실제로 강연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보면 어른 못지않은 생각과 어휘로 저를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라서 잘 모른다는 건 어른들의 착각일 뿐이죠. 오히려 어른들이 아이들의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제가 『우리 반 욕 킬러』 라는 책을 썼을 때 동화에 이렇게 욕이 나와도 괜찮냐는 의견이 있었어요. 그때 너무 놀랐어요. 현실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초등학생 또래 아이들에게 그 글을 보여주며 “여기 나오는 욕 중에 너희가 쓰는 것과 다른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욕이 너무 시시하다”고 대답하더라고요.(웃음) 어른들이 동화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특히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부모님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아이들을 올바로 알고, 힘들 때 손내밀어줄 수 있어요.
『바나나 가족』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책이 좋은 이유는 나와 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에요. 읽으면서 계속 ‘나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이 우리 가족에 대해 한 번쯤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한 사람만 잘한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 가족을 더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떠올려보실 수 있길 바랍니다.
바나나 가족임지형 글/이주미 그림 | 스푼북
규민이가 엄마에게 전하고 싶은 이 말처럼, 가족의 참 의미가 흐려져 가는 이 시대에 가족의 정을 느끼기 힘든 요즘 아이들이 이 책을 통해 가족의 사랑과 중요성을 깨닫게 될 거예요.
<임지형> 글/<이주미> 그림9,900원(10% + 5%)
“이 바나나, 꼭 가족들이 모여 사는 것 같지 않아? 그래서 누가 떼어 가면 떨어지기 싫어, 안 돼, 가지 마! 하는 것 같아.” 바나나 꼭지에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바나나들을 보면 마치 한 가족 같지 않나요? 가족은 함께할 때 그 의미가 생기지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늘 힘이 되는 그러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