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교석의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는 안온함
겨울용 계절 아이템은 피하는 편이 낫다
실내화를 신는다는 건 집에 돌아왔다는 위안과 안온함을 스스로에게 알리는 의식이다. (2018.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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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화는 실내 생활의 안온함을 위해 필히 들여야 할 습관이자 물품이다. 현관에서 신을 갈아 신는 행위는 집에 들어왔다는 모드 전환 스위치를 누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네 주거 문화에 실내화 개념이 없었던 탓에 여전히 실내화를 거추장스럽게 여기거나 그 즐거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허나 오늘날 대부분이 대청마루와 장판이 사라진 주거 공간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자. 서구화된 입식 주거 문화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관련해 최근 우리 동네에서 굉장히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20여 년 이상 홀 상태나 서비스의 질은 제쳐두고 오로지 음식 맛으로 성업해온 추어탕집과 바지락 칼국수집이 비슷한 시기에 매장의 좌식 상을 입식 테이블로 새 단장했다. 주 고객층이 로컬 어르신이란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인상 깊은 변화다. 입식 선호 사상은 이제 전 세대를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는 상징적인 사례다.
실내화를 잠시 잊고 살았더라도 10월 이후, 바닥에서 서늘한 찬 기운이 느껴질 때면 다시금 생각난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건조한 공기와 서늘한 바닥이 가을을 왔음을 알린다. 보일러를 전격 가동하자니 경제적이지 못하고, 양말을 신고 지내자니 답답하거나 폼이 안 난다. 그래서 룸슈즈를 매일 신고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이때쯤 한 번 더 그 존재의 고마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데 추위로부터 발을 보온하는 기능은 실내화의 참다운 매력이라 하기 어렵다. 실내화를 신어야 하는 이유라는 리스트가 있다면 높게 쳐줘봐야 여섯, 일곱 번째 정도에 위치할 만한 정도다. 우리가 실내화를 신어야 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다. 실내화를 신는 다는 건 휴대폰과 같은 모바일 전자기기를 집에 돌아와 충전 잭을 꽂는 행위나 거친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는 선원들을 반기는 등대의 따뜻한 불빛 같은 거다. 내 발에 맞게 익은 실내화는 발을 감싸는 감촉부터 우리가 지금 아늑하고도 평화로운 공간에 머물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어느 순간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실내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홈 스위트 홈’에 안착했다는 안온함이 퍼진다. 발에 오장육부가 담겨 있다는 한의학적 해석이 맞다면 이 또한 일리 있는 이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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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깨끗한 바닥을 위해서다. 여기서 바닥이란 발바닥과 방바닥 모두를 포함한다. 실내에서 맨발로 다니다보면 청소를 매일 열심히 하지 않는 한 이런저런 먼지가 발에 묻게 된다.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우리 땀과 기름기, 목욕 후 물기 등으로 인해 방바닥에 찍히는 발자국이다. 우리 발에선 생각보다 많은 땀이 난다. 그러니 혹시 다한증이 있다면 실내화는 꼭 신는 게 좋다.
세 번째는 실내화를 통해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층간 소음 문제를 어느 정도 경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신을 끌면 안 된다. 그건 경박한 거다. 또한, 족저근막염이나 관절염, 통풍을 비롯한 의학적인 이슈로 인해서도 필요하고, 인테리어 차원에서도 실내화를 신는 것과 맨발로 서 있는 것은 미관상 큰 차이가 있다. 같은 이유로 온 가족이 생활하는 집보다 혼자 살 때 실내화와 함께하는 습관을 들이기 훨씬 좋다. 정리를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자칫 현관 앞이 훨씬 어수선해지기 때문이다.
실내화를 고를 때는 겨울용 계절 아이템은 피하는 편이 낫다. 따뜻해 보이는 시각 효과는 분명하지만 땀이 많이 차서 쉽게 불결해지는 탓이다. 그런 이유로 천 실내화도 선호하지 않는다. 실내화는 세월을 함께한 낡은 느낌이 나야 ‘코지’하기 마련인데 헤지고 때가 탄 천 실내화만큼 초라한 존재도 드물기 때문이다.
추천하는 아이템은 바부슈(babouche)다. 전통 모로코 가죽신을 뜻하는 불어로 ‘다리를 덮는 것’이란 페르시아어가 어원이다. 아랍어로는 브루가라고 부른다. 낙타, 염소, 양, 소 등 다양한 가죽으로 만드는데, 앞코가 뾰족하고 신발 뒤축을 꺾어 신는 형태이자 스타일이 포인트다. 모로코에서는 원래 실내외용 신발을 따로 구분하지 않아서 엄밀히 말하면 실내화는 아니다. 혹시 패션에 관심이 많다면 익숙한 단어일 것이다. 마놀로 블라닉으로 대표되는 뮬에 이어 2016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끈 블로퍼(backless, lofer, sliper의 합성어다)와 함께 백리스 슈즈 스타일의 대표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구찌, 셀린느, 3.1 필립 림, 베트멍, 아크네, 아페세 등등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부터 대중적인 브랜드까지 모로코 스타일의 바부슈는 지난 한해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다.
전통적인 바부슈는 크게 볼 때는 앞코가 뾰족한 베르디와 베르베르인들이 신었다는 이른바 아웃도어용 바부슈인 다프로프트, 그리고 앞코가 둥근 실내화로 나뉜다. 사실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실생활에서 많이 쓰이며, 패션 브랜드에서 흔히 바부슈라 부르는 건 모두 베르디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바부슈란 앞코가 둥글고 몸통은 부드러운 양가죽으로 두르고 바닥에 단단한 소가죽을 댄 실내용이다. 실내외겸용을 선호하는 모로코인들에게는 베르디에 비해 활용도가 떨어지는 신발이었지만 2010년대 초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큰 인기를 누리면서 이제 주력 수출상품이 됐다.
모로코 바부슈의 매력은 발에 착 감기는 부들부들한 양가죽 특유의 감촉에 있다. 신고 벗기 편한 형태는 물론이고, 오래 신을수록 발에 맞춰 모양이 갖춰지면서 더더욱 편해진다. 맨발로 있는 듯한 편안한 착화감이 진정한 매력이다. 천연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슬리퍼 특유의 발 끄는 소리도 잘 안 나고, 안창도 가죽인지라 땀으로 인한 오염과 냄새에도 강하다. 단점은 물기를 만나거나 바닥상태에 따라 미끄러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그런 흉악한 경우는 아직 겪은 적이 없다. 기왕 산다면 모로코산 바부슈를 구매하는 게 가장 좋다. 일본의 수공예 브랜드인 마츠노야 등에서 절찬리 판매 중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리빙숍에서 다루고 있다만 안타깝게도 수급이 늘 원활한 건 아니다. 초반 며칠간 가죽 냄새가 있을 수 있는데 왁스 코팅된 제품이나 가죽 제품이 갖는 고유의 성질이다.
실내화를 신는다는 건 집에 돌아왔다는 위안과 안온함을 스스로에게 알리는 의식이다. 아늑한 공간에서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면 그에 맞는 신발이 필요하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당신이 딛고 있는 그 공간이 그 어느 곳보다 안락한 궁궐이 될 것이다.
푸른숲 출판사의 벤치워머. 어쩌다가 『아무튼, 계속』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