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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김현식, 시인과 촌장 뒤에는 그가 있었다

동아기획 김영 인터뷰 1980년대 K팝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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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 생기더라고요.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하는 문제. 답은 빨리 나왔어요. 완성도 있게 만들자는 겁니다. 말은 간단하죠. (2018. 11. 09)

조동진, 김현식, 들국화, 봄여름가을겨울, 빛과 소금, 어떤 날, 장필순, 이소라, 푸른 하늘, 한동준, 박학기... 이 이름들로 뭘 더 언급해야 할까. 198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인기를 날리던 사람들이다. 이들을 모아놓고 한 자리에 중첩시키면 확연히 나타나는 교집합이 있다. 동아기획. 위대한 저들은 바로 동아기획을 배경으로 두고 세상에 등장한 뮤지션들이다. 과거 속히 좀 듣는다고 하는 음악광들은 다들 동아기획 산(産)음반을 들으며 세월을 거쳐 온 셈이다.

 

동아기획은 늘 선두에서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을 배출했고 그 때마다 음악의 판도를 바꿔온 1980년대 K팝의 산실이다. 그 동아기획이 가는 길이 곧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큰 운명이었으니 이들이 걸었던 발자취는 곧 전설의 행보다. 그럼 이 전설을 만든 '보스'는 과연 누구였을까. 이 세계에서 전설의 주인공은 뮤지션의 얼굴을 달고 나온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이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게끔 지원하고 이끈 보이지 않는 진짜 주인공도 존재한다. 동아기획의 대장으로 통한 김영 사장이다. 서울 여의도 한 빌딩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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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사장님 입장에서 보시는 7080이란.


이 세대는 듣는 귀나 분별력이 지금 10대, 20대보다 뛰어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팝송세대가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적어도 1990년대 초까지 내려오며 팝을 미친 듯이 듣던 젊은 세대란 말이죠. 그 사람들은 귀가 열려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시장으로 접근하는 게 이제 숙제입니다. 10대, 20대 때 팝이든 클래식이든 재즈든 민요든 국악이든 닥치는 대로 섭렵하고 듣는 사람들과 아이돌 음악만 듣고 자라는 사람들과 감성이 비교가 될까요.

 

아무래도 기획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 동아기획도 역시 상기하신 명작들만 취급하는 그 방침으로 운영되어 왔지요. 바로 그 부분이 역사적 인정을 받기도 했고요. 이 인정을 받게 해준 명작을 꼽으신다면.

딱 하나 뽑으면 '들국화'죠.

 

1985년 그 해에 나와서 대박을 쳤죠. 그때쯤 부도 위기가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경제적인 문제는 오히려 뜻밖의 질문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경제적인 얘기라 하면 전 늘 부자였습니다. 오히려 전 혜택을 많이 받았죠. 1974년에, 무려 그 시대에 전 제 차가 있었고 운전기사가 있었어요.

 

1974년 그 해가 동아기획이 출범한 해입니까.


아뇨, 그건 나중의 일이죠. 생각해보면 서울 시내에 차도 별로 없을 때에요. 그 해에 전 기사도 있었고 차도 있었으니 부자였던 거죠. 그런데 왜 제가 앞서 '들국화'를 포인트로 꼽았냐하면, 사람들이 모르는 그 전의 이야기가 있어요. 동아기획에서 낸 첫 음반이 1984년에 만든 조동진, 김현식, 우순실의 앨범들이에요. 냈을 때 안 터졌습니다. 좀 나중에 뜬 거죠.

 

그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제가 늘 다른 길을 생각했어요. 사실은 그 세 음반이 나온 줄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홍보를 아예 안 했어요. 그러니까 첫째로 방송국에 음반을 안 돌렸어요. PD가 틀고 안 틀고를 떠나서 적어도 어느 정도 로비를 해야 홍보 효과가 나오는 건데, 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애초부터 스스로 했던 생각이에요. 저와의 약속이고, 제가 지키는 거죠. 그러니 방송에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홍보도 덩달아 안 되죠.

 

심의도 안 냈다는 건데요.


그렇죠. 방송국에 안 줬으니까. 기본적으로 알릴 길이 없는 거예요. 모색했던 다른 방법이 여기서 시작하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경제적으로 전 무리가 없던 사람이에요. 그때 제가 했던 게 뭐냐면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레코드 가게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곳곳을 차타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겁니다. 가보면 대부분 레코드 가게에 조동진이나 김현식이나 우순실이 없거든요. 그럼 박카스 한통 들고 찾아가서 하나씩만 진열대에 꽂아만 주십시오, 부탁을 해요. 뭐 안 팔리면 반품처리하면 되니까. 그렇게 다 꽂아주며 돌죠. 그러고 나면 한 번 더 돌아요. 이번에는 하나만 틀어 주십사, 하고 말이죠. 그렇게 전국을 다 다녔습니다. 관건은 이거에요. 하나는 진열대에 꽂혀있나, 다른 하나는 가게 스피커로 틀어 놓나.

 

방송국이 아니라 음반 가게를 뚫는 작업이었군요.


레코드 가게 말고 하나 더 뚫는 곳이 있습니다. 1980년대 하면 그나마 음악다방이 많이 있잖아요. 성황이라곤 할 순 없다만, 서울 종로통에는 확실히 있었죠. 그러면 그 음악다방 DJ들에게 또 부탁하는 겁니다. 거기선 더 간단하죠. 파는 일이 없이 틀기만 하면 되잖아요. 음반 가게는 진열, 재생, 확인 작업까지 세 번 가야한다면 다방은 대개 한 번에 되요. 차 한 잔까지 같이 하고 나면 확실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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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1984년의 일이었던 거죠.


그러고 1985년이 왔죠. 그 가을에 '들국화'를 냅니다. 1984년에 조동진, 김현식, 우순실 셋을 냈는데 알려진 게 전무하잖아요. 전국 소매점에서나 틀고 비교적 잘 알려진 음악다방에서 틀고 그게 끝이죠. 이 현상은 들국화 낼 때까지 지속되고요. 그런데 그쯤 되어서, 그러니까 1985년 가을 직전의 1년 정도, 그 사이에 뭐가 바뀝니다. 귀 밝은 PD들이 제 사무실로 찾아오더라고요. "아 김 사장! 음반 냈다며? 나 좀 듣게 줘봐!" 하면서 몇 장씩 가져가죠. 방송에서 틀기 시작합디다. 그러면 부산, 대구, 광주 등 해서 전화가 와요. 음반 왜 안 보내 주냐는 전화죠. 애초에 제가 보내주질 않았으니. (웃음) 그것도 따지듯이 말을 합니다. 방송국들이 그렇게 강압적으로 나왔어요. 그럼 전 더 세게 나가요. 그럼 보내줄 테니까 한 번씩 트는 데 200씩 줄래? 이런 날강도 새끼가 어디 있어. (웃음)

 

동아기획 출신들은 유독 얼굴 없는 가수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들국화가 대표적이었죠. 방송에 출연시키지 않는다는 계약 조건이 그 이유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습니까. 소속 아티스트들의 반대와 같은 것들 말이죠.


예전부터 원칙이었으니까요. 또 그게 그 친구들이 원하는 거였습니다. 들국화가 그랬어요. "우린 방송하지 않는다. 우린 예전부터 방송하길 원치 않았다. (김영) 대장이 하라고 해도 안 할 거다!" 이게 당연한 거죠. 내가 하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애기했으니까. 어쩌면 그런 쪽으로는 들국화가 더 깊게 생각한 걸 수도 있어요.

 

전국 순회 자체 홍보는 언제까지 했습니까.


그것도 그쯤이었죠. 어느 날은 제가 먼저 지치는 겁니다. 매번 전국 소매상 돌고 음악다방 찾아가는 게. 몸이 피곤한 일이잖아요. 고생이죠. 그래서 들국화랑 상의했죠. 이제는 조금 힘들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들국화가 말을 꺼냈습니다. 우린 공연하면 됩니다. 이게 또 다른 숙제가 된 겁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콘서트라는 용어가 없었어요. 극장 쇼나 리사이틀이라는 형태는 있었는데 콘서트는 없었던 겁니다. 물론 공연은 알고 있습니다. 세션도 붙이고 조명도 붙이고 그 정도를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콘서트는 새로운 마음으로 보게 된 거에요. 전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란 말이죠. 부족한 정보를 퀸(Queen) 라이브 공연 실황 같이 낡아빠진 비디오로 돌려보면서 채웠어요. 어떻게 구성하고 어떻게 진행되나. 눈이 빠지게 봤죠. 그리고 난 뒤 콘서트를 가졌습니다. (서울 대학로) 샘터파랑새에서 했어요. 한 달 치 대관을 미리 내준 계약으로. 경제는 됐다고 했잖아요. 이제 무대만 올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고 들국화가 터졌죠.


이게 말도 안 되는 얘기야. 한 달도 안 돼서 터졌어요. 9월에 콘서트를 했는데 10월에 터진 거야. 1984년 조동진, 김현식, 우순실은 안 터졌는데 콘서트를 하고 나서 이놈의 들국화는 터져버린 거야. 이제 주문이 쇄도하죠. 그러고 혼자 남산 팔각정에 올라갔어요. 올라가면 딱 서울 시내가 보이잖아요. 거기다 대고 오줌을 누면서 속으로 '야 이 새끼들아 내가 해냈다. 내가 해냈다!!' 그 감동은 정말... 나만 아는 거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은 참 알 수 없어요. 들국화가 터지니까 (김)현식이가 다시 터진 거예요. 순서가 그렇게 됩니다. 전에 1984년에 냈던 게. '사랑했어요'죠. 1985년 말, 1986년 초지요.

 

동아기획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거죠. 1986년 전후로 사람들이 동아기획 음반은 거의 다 샀습니다.


그쯤부터 또 새로 시작한 일이, 이게 한국 음반 역사상 최초입니다. 음반에다 '패밀리 카드'를 만들어 넣었어요. 아, 사실 1984년부터 했네요. 그 때 현식이 음반에도 패밀리 카드가 있었죠. 들국화에도 있었고. LP 판이 있고 속지가 있잖아요. 가사집이나. 여기에 별개로 A4 용지 사이즈로 해다가 엽서를 넣었어요. 그럼 질문들도 같이 수록시키는 거죠. 왜 샀습니까, 어디서 샀습니까, 음악은 어떤가요. 이 패밀리 카드도 들국화가 터지고 나서 덩달아 밀려들어옵니다. 제 기억으로는 1987년, 1988년 쯤 회원이 5만이 넘었어요. 이러면 방식이 또 하나 나오게 된 셈입니다. 누구든 신보를 낼 때면 패밀리 회원들에게 사전 편지를 보내요. 몇 월에 '시인과 촌장'이 나온다, 또 몇 월엔 장필순이 나온다. 신보 안내를 보내는 겁니다. 이러면 나만의 시장이 새롭게 열리게 되죠. 노래가 한 번도 안 나오고 방송도 안 탄 상황에서 패밀리 회원들이 발매일 맞춰 막 사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영애, 어떤 날, 장필순 등등 대부분 패밀리 회원제 혜택을 받았죠.

 

당시 아티스트들 계약할 때 단 한 번도 오디션을 안 봤다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딱 보면 아는 건가요? 하자 바로) 예! (웃음) 저절로 된 건 아니겠죠. 여기에는 또 잘 모르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974년부터 차가 있고 기사가 있다고 했죠. 이게 제가 벌어 만든 자금들입니다. 뭐라 해야 하나. 표현이 이상한데, 고등학생 때부터 제가 프로 기타리스트였어요.

 

원래 뮤지션이었나요?


예. 그렇죠.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우리나라에 통기타 붐이 불잖아요. 심지어 통기타 못 치면 간첩이라고도 할 정도에요. 송창식 윤형주 뭐 이런 사람들 많지 않았습니까. 그 때부터 제가 기타 학원을 열어서 돈을 벌었습니다. 떼돈을 벌었죠. 뭐 기업이나 재벌 개념에 빗대면 뭐 말도 안 되지만 그 연령 때의 똑같은 젊은이들과 비교하면 상상도 못 할 돈을 만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1975년 그 해 대마초 파동이 터지죠. 그렇게 통기타 부대가 구속되고 몰락해요. 붐도 같이 식죠. 그 때 음반을 꽤 만들었어요.

 

운영했던 광화문 소재 음반 가게 '박지영 레코드'는 언제 낸 겁니까?


그게 1978년입니다. (박지영이 누굽니까) 집사람이죠. 1978년부터 1982년까지. 한 번 봅시다. 프로 뮤지션이라 했잖아요. 78년까지 기타 학원을 했습니다. 중간에는 음반 가게 박지영 레코드도 냈고요. 직후에 공부를 엄청 했어요. 현장공부를 한 겁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에요.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음반 가게를 하며 좋은 게, 그 시대의 웬만한 음악들은 다 듣게 된다는 점이죠. 두 번째로 이게 더 중요해요. 시장을 알기 위해 매일 오는 손님들 못해도 손님 열 명 정도는 간단이라도 인터뷰 했다는 거예요. 이 음반을 왜 삽니까, 뭐가 좋아서 삽니까. 그걸 4년 동안 했습니다.

 

어떤 음악이 먹히고, 어떻게 팔아야하고.


그걸 다 알게 된 거죠. 정리가 되는 겁니다. 동시에 들었던 생각은... 사실 말도 안 될 수도 있지만 웃지 마세요! 제 마음 속에 크게 들었던 마음이 애국심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또 다른 숙제였어요. 음반을 팔던 그 때를 다시 들여 보자고요. 8대 2나 9대 1 정도로 팝이나 클래식이 훨씬 팔리던 시기에요. 가요를 누가 삽니까. 이 대목이 제게 충격이었어요. 왜 가요는 안 팔릴까요. 공부를 해보니까 너무 뒤떨어지는 겁니다, 가게에도 제가 음반을 틀어놓잖아요. 비틀스도 틀고 비지스도 틀고 사이먼 앤 가펑클도 틀고. 한참을 틀다가 한국 음반을 틀어보면.

 

차이가 나죠.


무진장 나는 거야. 내가 다 창피할 정도로. 여기서 의식화가 된 거 같아요. 그러면서 이 판을 바꿔야한다 생각한 거죠. 미친 일이죠.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하는 문제. 답은 빨리 나왔어요. 완성도 있게 만들자는 겁니다. 말은 간단하죠. 이제는 어떻게 할까? 에서 또 막혀요. 편곡, 프로듀싱, 레코딩 이런 모든 게 총망라되어야 하잖아요. 한국은 일단 스튜디오 상태도 많이 뒤떨어져 있단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8 채널로 녹음하고 있을 때 미국은 32 채널로 돌렸어요. 기술뿐만이 아니라 연주, 편곡 같은 실력 면에서도 창피하죠. 하지만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 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션도 골라 하고 녹음실도 찾아해야죠. 시간도 그만큼 많이 들여야 하고 돈에 정성까지 엄청 쏟았어요.

 

자주 찾은 스튜디오는 어딥니까.


서울 스튜디오(동부이촌동 소재)죠. 최(세영) 사장 있을 때입니다. 약간 달리 봤던 건, 전 작업은 늘 일류를 고집했어요. 세션이나 편곡자,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인쇄소와 사진, 디자인 모두 일류여야 했어요. 그래야 제대로 된 게 나올 거 아닙니까. 만들어 놓고도 예를 들어 들국화와 당시 딴 가요 음반들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는 거예요.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 음반은 미국 것이라 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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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었던 음반 중에서 제일 매혹적이었던 작품은 뭐였나요.


제일?

 

아뇨. 여럿 꼽아도 됩니다. 들국화도 충격이었고 한영애의 '여울목'도 쇼크였을 거고, 푸른하늘 1집도 대단했고요.


그런 건 평론가들이 해주세요. (웃음) 내가 하긴 뭐 하잖아.

 

결정적인 순간엔 다 피하시네요. (웃음)


아니 그게 아니라, 하도 많은 사람들 음반을 내주다 보니 누구라 예를 들 수 없어요. 아닌 사람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다들 대단했어요.

 

이번에 미공개 곡으로 꾸린 김현식 앨범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김현식 편애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김현식에게 빚을 많이 졌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아, 그거는요, 전에 어디 인터뷰에서도 했던 말이 있어요. 음... 그냥 간단히 정리해서 '김영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누구냐'하고 물으면 김현식입니다.

 

진짜 뮤지션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포함되고요, 그것보다는 현식이는 진짜 남자였습니다. 마초라는 의미와는 다른 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현식이하면 가장 좋은 점은 의리입니다. 의리.

 

김장훈과 이소라까지, 최근에 한 걸 포함하면 동아기획 누적 음반판매량이 얼마나 됩니까.


몰라요. (대충도 모르시나요?) 한번은 따져 봐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모두 따져본 적은 없어요.

 

가장 많이 팔린 건 김현식이었죠.


네. '내 사랑 내 곁에'가 300만 이상 팔렸습니다. 1991년이었죠. 또 1995년에 이소라로 100만 장을 팔았어요. 그렇게 딱 두 장이 100만 이상 팔았네요.

 

들국화도 못 했던 기록입니다.


못 했던 기록이에요. 그런데 시장의 규모를 시대별로 비교해봐야 합니다. 들국화 때는 시장 규모가 상당히 작았어요. 그러니 그 전인 1980년대 초는 어땠겠어요. 5만 장만 나가도 성공했다고들 해요. 이게 1985년 이후로 매해 바뀝니다. 1985년 성공 기준이 10만 장이라고 하면 다음 해에는 20만이 되고 그 다음 해에는 30만이 되죠. 아까 말씀드렸죠. 가요 판매고가 팝을 앞지르던 시기. 그게 이때입니다. '푸른 하늘'도 6집까지 만들면서 30만 이하로 팔린 게 없어요. 35만이 될 수도 있고 50만이 될 수도 있는데 아래로 리미트 30만이라는 겁니다.

 

동아기획이 시장 흐름의 축이었네요.


오해를 살 대목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이, 음반 시장이 커지는 그 흐름에 디딤돌을 놓았다고 봐도 돼요. 그 때 제가 음반 시세를 좌우했어요. 동아기획에서 소비자 음반 가격을 2000원으로 정해 놓잖아요. 그럼 다른 기획사들은 1800원에 내놔요. 또 2200원에 내놓으면 뒤 이어 2000원에 내놓고. 내가 출고가를 정하면 총알받이 되기 싫은 사람들이 뒤를 따라오는 형식입니다. 그렇게 시장이 움직였어요. 그래요. 들국화 얘기가 나왔으니까, 1995년에 들국화가 나왔다면 150만까지도 팔렸을 겁니다.

 

장악을 했다고도 할 수 있죠. 그 이후로 어려웠던 시기는 없었습니까. 1992년 봄여름가을겨울 이후로 꺾이지 않았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전혀. 오히려 전 잘 나갔죠. 1992년이 굉장히 중요한 해라고 할 수 있어요. 1991년 8월까지 현식이 '내 사랑 내 곁에'가 30만 장 나갔어요. 그러다가 92년 연말까지 갑자기 300만이 나간 겁니다. 그때 광화문 사옥 옥상에 올라가서 현식이랑 이렇게 얘기했어요. “현식아, 그만하자.” 하늘 쳐다보면서요. 그만 팔자는 뜻이죠. 그리고 하나 더 말을 했어요. “이제 1년 동안 쉬자.” 왜 그랬을까요. 아까 제가 스스로 한국 음반 산업의 대표자처럼도 생각했다 했잖아요. 동시에 들었던 생각은 현식이를 아무도 못 넘는다는 거였어요. 너무 높으니까요. 소매상 수금을 제가 제일 많이 했습니다. 가져갈 판이 없어 미안할 정도였어요.

 

너무 잘 나갔으니까요.


그때 서태지가 등장하죠. 여기서 하나 보셔야 할 것은 방송 순위는 다 가짜입니다. 기획자 입장에서 진짜로 보이는 것은 도소매상에 판매되는 숫자에요. 그렇게 봤을 때, 시장을 딱 보면 현식이가 다 덮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도 못 뚫어요. 시장이 바뀌려면 현식이가 그만해야 하고 다음으로 제가 신보를 그만 내야해요. 그래서 1992년에 현식이와 결심을 했다는 겁니다. 저도 모든 음반을 멈췄어요. 김현철 '그대 안의 블루'는 영화에 쓰일 곡이니까 당장 내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이니 누구니 하는 음반은 다 그만했죠. 어차피 내 마음이니까. 대장이 하라니까 또 다들 그만 하는구나 해요. 속뜻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러고 나서 서태지가 터지고 신승훈이 올라왔어요. 반가운 거죠. 박수를 쳤습니다.

 

그렇게 판이 바뀌었죠.


그런데 1993년 되어선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 전까지는 음악 장르나 유형의 시대가 빠르게 바뀌었어요. 들국화가 시대를 열면 밴드가 나오고 현식이나 소라가 시대를 열면 또 솔로 가수들이 뒤이어 나오죠. 동아기획 안에서 신촌블루스가 열고 나오면 부활, 시나위, 백두산, 송골매, 이렇게 안 보이는 그룹들이 쭉 등장해요. 이제 서태지를 봅시다. 서태지가 새로운 시대를 열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댄스 가수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졌습니다. 쏟아지는 양을 봐서는 도저히 다른 시대가 올라올 여유가 보이질 않아요. 여기서는 위기를 느꼈습니다. 내가 스톱을 한 건 잘 된 일인데, 그 다음 상황은 아 이건 안 되겠구나 하는 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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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김현식이 죽고 나서 엄청난 앨범판매고를 기록했지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김현식 앨범을 좋아했을까요.


두 가지죠. 하나는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서른둘에 떠났다는 아쉬움. 그 다음은 '내 사랑 내 곁에'가 담고 있는 혼, 혼이랄까. 그 소리가 지금도... 아마 나중도 마찬가지 일거예요. 바이올린 인트로를 듣고 있으면 뭉클하게 오는 뭔가가 있어요. 인트로에서부터 잡는 음악 별로 없어요. 모든 음악이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런데 '내 사랑 내 곁에'는 달라요. 그렇게 노래가 시작하면 현식이가 목소리로 뱉죠.

 

녹음은 언제였나요.


녹음은 1989년에 했습니다. 여기도 비화가 있어요. 현식이는 보컬이 되는 사람이에요. 보컬을 찍어내며 녹음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해당되지 않고. 완(完)창할 수 있는 사람, 현식이가 그랬어요. 스튜디오에서 최사장이랑 제가 지켜보고 현식이가 들어가서 노래를 부릅니다. 한 번 부르고 노래의 흐름을 알아야하니 한 번 또 불러요. 그러면 대강 다 익히거든요. 그러고 이제 나와서 담배를 피든 소주를 마시든 합니다. 제가 얘기하죠. 이건 그냥 연습이다. 녹음 들어가는 게 아니란 의미에요. 그러고 다시 들여보내면 맘 가는대로 불러요. 이때부터 엔지니어랑 제가 초긴장을 합니다. 현식이 모르게 녹음을 뽑아내는 거예요. 가장 좋은 상태로 가는 거죠. 현식이는 모르지만 나랑 기사는 느낌을 딱 받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녹음하자고 다시 나올 거 아닙니까.


그렇죠. 현식이는 이제 녹음해도 되냐면서 나오는 거죠. 하지만 저랑 엔지니어 둘은 이미 녹음을 끝낸 상태입니다. 다시 들어가서 이제 시작하는구나 하고 노래 부르면 그때는 대강 전체의 느낌을 봐요. 그러면 끝입니다. 대장이 됐다고 하면 된 거죠 하고 끝내는 거예요. 이게 평소 녹음할 때 현식이입니다.

 

그럼 '내 사랑 내 곁에'는 달랐나요?


더 부르겠대요. 나랑 최세영씨는 다 끝냈어요. 그런데 걔는 시도 때도 없이 녹음한 거예요. 사실 보컬 혹사하면 안 되잖아요. 넉넉잡아 세 시간 하면 힘들거든요. 어떡합니까. 자기가 하겠다는데. 제 입장에서도 녹음은 끝났지만 더 좋은 게 나올 수 있으니. 좋은 게 매일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녹음은 1989년에, 발매는 6집에 수록되며 1991년에 됐습니다.


타이틀곡 선정은 100 퍼센트 제가 결정합니다. 원래대로라면 '내 사랑 내 곁에'도 '넋두리'와 함께 5집에 실렸어야죠. 그런데 그 때 생각했던 건 '내 사랑 내 곁에'는 6집 레퍼토리로 쓰자하는 거였어요. '추억 만들기'도 그렇고요. '내 사랑 내 곁에'는 너무 잘 녹음됐어요. 타이틀이 될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수록시키지 않은 상태로 5집을 다 끝냈죠. 믹싱이며 레코드며.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어요.

 

새 음반이 나왔습니다. 어떤 경위로 나오게 되었나요.


말씀드렸듯 1992년 현식이한테 제가 그만하자 했잖아요. 얼마 전까지도 전 그걸로 얘기가 다 된 줄 알았습니다. 끝이었죠. 여느 때랑 마찬가지로 길을 걷는데 갑자기 현식이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대장, 왜 내꺼 안 내.” 딱 그거였어요. “대장 왜 내꺼 안 내.” 그런데 오늘 현실을 보면 음반 시장이 이미 죽어있어요. 게다가 녹음된 노래들이 카세트잖아요. 디지털도 아니고 아날로그도 아니고 아예 카세트다 보니 소리를 잡아내려면 보통 일이 아닌 겁니다. 그렇게 계속 미루고 미루는데 현식이가 그 얘기를 하네. 왜 안 내냐고. 마스터링하러 갖다 줬어요. 카세트를 CD로 떠서 들어봤는데 이게 대책이 서질 않아요. 결국 모든 문제는 이 소리들을 어떻게 살려내느냐.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앨범 반응은 어떻습니까.

 

초토화된 음반 시장 속에서도 대강 판매량이 10위권은 됩니다. 그렇게 보면 전 행복한 거죠. 그런데 전 다른 그림이 있어요. 그 정도 양이 팔리면 제겐 또 부족한 결과에요. 하지만 전 다른 그림을 그립니다.

 

다른 그림이라면.


아직 안 끝났어요. 이 그림은 총 3막짜리입니다. 지난해 10월, 언론을 통한 홍보가 첫 시작이에요. 그리고 2막은 SBS에서 12월 방영한 김현식 다큐멘터리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김현식을 소재로 뮤지컬과 드라마를 만들 거예요. 올해 될 것 같습니다.

 

1980년대, 1990년대 초반까지 만든 동아기획들의 음반들, 이걸 저희는 시대의 소리였다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 생각이죠. 대표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는 업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새로운 시장을 연 것, 시장을...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터뷰 : 임진모, 이수호
정리 : 이수호
사진 : 이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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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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