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병률, 어떻게 혼자일 수 있겠니
중심은 중요하다. 중심이 있음으로 ‘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면에서 아주 그렇다. 한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여러 사람이 어울려 친구가 될 때도 그 중심은 기둥이 되고 지붕이 된다. 플로리스트는 꽃다발을 만들 때 가장 생기가 좋은 상태의 꽃을 중심으로 해서 나머지 꽃들을 돌려 묶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많은 ‘그룹’들은 왜 오래 묶이지 못하고 깨지거나 그중 일부만 따로 남는 걸까.
한 그룹이 있었다. A는 귀여운 수준을 벗어나는 정도로 거짓말을 하는 데 능했고, B는 돈을 꾸고 꾸다 해외로 도주를 했으며, C는 우리가 헤어진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안타깝게도 자살이라는 극단 방식을 택했다. 나는 그 세 사람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적고 있지만 그들은 나머지 한 사람인 나를 무어라 한 줄로 적게 될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인, 지금의 시점에서 말이다.
또 한 그룹이 있었다. 꽤 친하게 지내던 네 사람 사이에 내가 들어가 다섯이 되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룹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며 듣기 좋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자주 모였고 정말이지 어떻게 그렇게 매일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일 만났다. 셋이나 넷이 모이는 건 무효처리 되었고 다섯이 돼야 합체였다. 이제 와서 이 그룹이 깨어진 이유를 돌아보니 서로 너무 좋아해서였던 것도 같고, 서로가 서로를 가족이라 칭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한 데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또 여러 그룹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생각만 하는 것으로 입 안이 쓰고 맵다. 지나간 것은 그렇게 쓰고 맵고 짜고 텁텁하다.
깨졌기 때문에 우리는 더 함부로 말할 자격을 갖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든 전체를 전체로 이끌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그 좋은 시절을 지금까지 이끌고 오지 못했다는 패배감을 어떻게든 덮으려 하다 보니 쓰디 쓴 사실만 도드라지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최선을 다했단 말이야, 라고 절규라도 하고 싶은 것일지도.
그렇다면 중심은 누구였을까. 중심이 없었다면 그토록 만나지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 질문에 무게를 두어본다. 중심을 확보하지 않으면 그룹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의 문틀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영혼이 빠져나간다.
인스타그램에는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생중계되고 있다. 연애하는 모습이 모습만으로 좋아 보여 모르는 사람임에도 팔로우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이별 후, 추억의 장면들을 모두 삭제한 것이다. 삭제키를 누를 때의 손가락은 어느 정도 마취를 한 상태일까. 한때는 들끓고 암팡졌던 순간들을 써내려간 문장을 지우는 손가락의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언젠가 내가 살던 동네에는 수영장을 갖춘 아파트가 있었는데 수영장을 이용하기 위해 그 아파트에 사는 동네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남의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때도 친한 사람이 아니면 도서관 카드를 빌릴 수 없으니 마찬가지였다. 바다가 보이는 별장이 있는 사람과도 친해질 수 있다면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친구가 되겠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친구가 아닌 사이가 되고 만다.
“그때 그 친구 잘 있어? 요즘도 자주 봐?”
“어? 아니, 그게… 안 본 지 꽤 됐네.”
그럴 때마다 왜냐고 묻는다. 묻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어김없이 왜냐고 묻는다. 나는 그 사람을 흉볼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는데도 자꾸 왜냐고 묻는다. 그래도 대답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를 안 좋은 인물로 진술하고 만다. 그럴 때 ‘뭔가 저질렀을 수도 있었을’ 나의 속물적 입장은 배제된다. 미치겠다, 정말.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간 것일까.
“그렇게 친구들이 좋으면 친구들하고 살아. 집에 들어오지 말고.”
이 말은 청춘을 지나며 어머니께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이다. 사실 친구들이 더 좋았다. 더군다나 집에 들어가는 건 정말 싫었고. 그래서 바뀐 게 있는데, 안타깝게도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로 바뀌었고, 다행스러운 건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 일찌감치 집을 나와 독립이라는 걸 했다. 그래서, 그 과거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 있는 것일까. 돌이키려니 나는 너무 멀리 와 있고 그곳으로 되돌아가자니 낡고 해진 부위를 꿰맬 재간이 없다.
누군가가 좋아질라치면 나는 먼저 끝을 생각한다. 맨 끝 말이다. 좋아도, 좋지 않아도 끝은 끝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결말의 지점을 이제 와서는 자연스럽고 좋은 것이라 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모든 관계가 시간 앞에서 감히 영원할 수도 없으며 감히 이상적일 수도 없다면, 그렇게 끝은 끝인 채로 완성일 테니.
나의 어떤 경우는 처음부터 관계의 끝을 예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섭지도 않다. 그냥 무조건 그 사람에게 잘해주게 된다. 너무 잘해주다 보면 나 스스로가 감동해서 내 콧등이 자주 시큰거릴 때가 있는데 언젠가 닥쳐올 끝을 생각하면 내가 더 잘해주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런다. 미치겠다, 정말.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인정하지 않으려는 걸까? 아니면 끝과 관련된 기억들을 락스로 빡빡 지우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걸까. 아무리 끝이 안 좋았었다고 그 끝 자체를 모른척하려 해도 분명 ‘최고의 끝’이란 건 존재하는 것 같다. 무의미한 끝이란 것도 없지는 않은 것 같고 말이다.
여행이란 말과 ‘거시기’가 합쳐진 ‘여행뽕’이라는 말이 있다. 여행지에서 우리의 허전함은 우연히 만난 누군가와의 특별한 시간을 염두에 두면서 슬쩍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는데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 그 한 사람에게 무작정 빠져들지만, 막상 여행지에서 돌아와서는 그 감정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말 앞에서 나도 모르게 동공이 열리고 마는 것은, 우리가 한때 같이 지낸 사람들과의 그 시절은 그저 여행뽕이거나 ‘사람뽕’에 취한 상태에 불과했던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2005) 등이 있으며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