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의 후폭풍
<월간 채널예스> 2018년 10월호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불평만 할 뿐, 네가 밥할 생각은 안 해 봤지? (2018. 10. 02)
지지지난 번 칼럼에 인간의 관습에 관해 썼는데 최고봉은 역시 명절 아닐지. 명절이 다가오면 마트나 백화점엔 선물용 상품이 진열될 테고 각계각층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누구한테 얼마짜리를 보내야 할지 방정식을 도출하려는 물리학자가 무색할 지경으로 고민할 테고 이윽고 지하철엔 스팸 선물세트를 든 사람이 빈번히 출몰하겠지. 나는 서울에 살고 부모님은 수원에 계셔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셈이지만 매해 명절 도로를 보면 아찔하다. 명절을 쇤 다음엔 이혼율이 증가한다고 한다. 대체로 해당 사항이 없는 나도 이토록 피곤한데 온갖 관습을 다 지켜야 하는 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그런데도 어째서 이 방식을 바꾸지 못하고 꾸역꾸역 답습하는지 모르겠다.
다들 그러니까?
원래 그랬으니까?
몇 해 전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시외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대여섯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바가 말했다.
“재미있는 거 보여 줄까? 딱 세 명만 줄 서면 다들 따라 선다.”
진짜였다. 일행 네 명이 표지판 앞에 줄을 만들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최면으로 건 암시가 작동하듯 일제히 모여들었다. 자기들이 먼저 왔는데도 별 말 없이 우리 뒤에 섰다. 오히려 소수인 네 명이 섰을 뿐인데도 ‘다들’ 서니까, 이제 막 만들어진 줄인데도 ‘원래’ 저기가 줄인가, 하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데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세 명만으로도 그런 효과를 낼 수 있으니 오랜 세월에 걸쳐 전국에 퍼진 바이러스는 막을 길은 없으리라.
“어느 정도의 관습은 인정해야 해. 관습이 왜 생겼겠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야. 왜 많은 사람들이 그러겠어? 인간은 사회적이기 때문이야. 너라고 관습을 싹 무시할 수 있어? 너도 명절에 부모님 댁에 가잖냐. 가족과 관계를 유지하는 행위도 관습인데…….”
명절을 앞두고 명절 얘기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하자 노바가 이어서 말했다.
“명절에 명절 얘기 하는 게 어때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거라고.”
글쎄…… 나는 명절 얘기조차 그다지 사회적이지 않을 텐데…….
난 집에서 예외적 존재다. 회사 다니는 몇 년간 죽도록 야근하는 모습을 본 부모님 눈에 나는 일이 아닌 데에는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으로 굳어졌고 웬만한 집안 행사에는 열외가 되는 관습이 생겼다. (그러게. 노바 말처럼 관습도 때때로 인정해야겠군.)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실천하는 방안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명절 방문이다.
부모님과 큰 조카에게는 용돈, 작은 조카에게는 레고 프렌즈를 준비한다. 작은 조카도 곧 중학생이 되니 앞으로는 레고 프렌즈 대신 용돈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연휴 첫날 점심시간에 맞춰 간다고 말씀드려도 당일 오전이면 지금 어디인지, 언제 도착하는지 묻는 어머니의 전화는 어김없다.
“왔냐?”
“왔어요.”
“다들 힘들다는데 하는 일은 여전하냐?”
“그럼요. 잘하고 있어요.”
내가 아는 지구인을 통틀어 가장 과묵하신 아버지와 대화 두 합을 치르고 나면 소재가 고갈된다. 선물을 푼다. “맨날 돈만 쓰고 가서 어떡한디야.” 10여 년째 어김없이 등장하는 어머니의 대사다. 조카에게 레고를 건네는 순간엔 10여 년째 등장하는 아버지의 대사도 어김없다. “이제 장난감은 그만 가지고 놀고 공부해야지.” 조카가 걷기 시작한 해부터 그러셨던 것 같다. ‘전 지금도 가끔 미니카 사는데요’ 따위 소리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그러고 나면 더 이상 할 말도 할 일도 없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본다. 밥 먹는 시간만 빼고 내내 본다. 명절 프로는 매년 같은 자료 화면을 쓰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막힌 도로, 시골집 방문하는 자식 가족, 한복 입고 고궁 나들이 간 시민 인터뷰, 외국인 노래 자랑……. 보고 보고 본 장면을 또 봐야 한다면 영화가 그나마 낫겠는데 식구 중 누군가가 예능 프로를 틀면 너무나 괴롭다. 예능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 것도 싫고 남들 노는 모습을 왜 텔레비전까지 동원해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책 읽는 시늉을 할 차례. 예능 프로의 소음 속에서 글이 제대로 들어올 리 없다. 예전에는 명절 연휴를 독서 기간으로 잡아 긴 시간 집중할 시간이 없어 읽기 힘들었던 책을 가지고 갔는데 이제 집중할 필요가 없는 책 위주로 챙긴다.
어머니가 혼신을 다해 준비한 저녁 밥상에서 내 젓가락은 채소와 고기로만 향한다. 해산물을 다루는 어머니의 방식이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아서다. 어머니는 내가 해산물을 안 좋아하는 줄 아시지만 사실은 좋아한다. 특히 생선.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식구에게 1년치 정성을 다 들이고 싶은 어머니는 중세 봉건지주의 만찬을 준비하듯 차리신다. 게걸스럽게 먹지 않으면 앓아 누우신다는 사실을 잘 아는 우리는 무리해서라도 가능한 한 많이 먹으려고 노력한다. 그러고 나면 1주일간 식욕이 돌아오지 않는다. 고기를 많이 먹어야 더 좋아하시므로 작심하고 고기를 공략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어머니가 준비하시는 고기의 양은 점점 더 늘어나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남는 고기가 많아지는 교착 상태에 빠진다.
“드디어 나왔다!”
“뭐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불평만 할 뿐, 네가 밥할 생각은 안 해 봤지?”
“그야…….”
“넌 깨야 할 관습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이고 마땅히 지켜야 할 관습은 비겁하게 측면으로 공격하면서 내칠 궁리만 하잖아.”
갑자기 공격받는 바람에 반격할 태세를 미처 갖추지 못했다고 항변하고 싶지만 사실은 선전포고한 후에 서서히 다가왔더라도 반박할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제사와 차례를 폐지하겠다고 선포한 일화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연세 드신 어머니와 형수를 위한 결정이라는 점에서 그나마 진일보한 사건이지만 지난 세월 그 일을 아버지나 자식들이 나서서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느냐는 노바의 질책에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불편한 마음을 알량하게나마 달래고자 전이나 부치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러고도 관습 얘기 할 테냐?”
관습을 벗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는 건 그만큼 관습에 묶였다는 반증인가 보다.
에세이 『저, 죄송한데요』를 썼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