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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을 들고 하는) 산책

가끔은 행복의 다른 이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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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걸 알지만 해보는 일들이 있다. 그렇게 해서 더 즐겁고 덜 심심해지면 ‘이거면 됐지.’ 하고 웃어 보인다. (2018.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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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는 걸 알면서 굳이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가령, 글을 쓸 때 쉼표를 자주 쓰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쉼표는 강제로 흐름을 끊고 그게 많아지면 유연하지 못한 글이 되기도 한다. 작법에 대한 수많은 책이나 작가, 교수가 그렇게 말해왔다. 쉼표에 기대어 문장을 완성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쉼표가 좋다. 온점을 찍고 난 뒤에 드는 완강한 기분과 다르게 쉼표를 쓰고 나면 느슨하고 허술해진다. 탈고할 때는 쉼표가 알맞은 지점에 들어가 있는지를 본다. 애매한 곳에 있다면 걷어내고 고민해서 가장 귀여운 자리로 배치해준다. 쉼표에 대한 어떤 안 좋은 얘기를 들어도 그가 하나도 없는 글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늦여름의 저녁, 한라산 한 병을 들고 산책했다. 한라산은 제주에서 만들어진 소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다. 투명한 병이 예쁘고 맛이 맑다. 술집에서 문어 숙회와 함께 마시다가 반쯤 남긴 것이 아까워서 들고 나왔다. 병째 손에 들고 걸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조심스레 들고 있던 한라산 뚜껑을 열어 물을 마시듯 한 모금 마셨다. 옆에 있던 친구가 웃었다. “왜 웃어?” “언니가 술 마시니까 좋아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음주는 연중행사였다. 술을 잘 마시는 친구는 그간 내가 같이 술을 마셔주지 않는 게 아쉬웠다고 했다. 요즈음의 행복 중에 내가 술을 마시게 된 일이 있다고 하기에 나도 웃었다. 술은 일종의 추임새 같다. 뭐랄까. 술 없이도 잘 지내왔지만 이것의 도움으로 어딘지 모르게 ‘얼쑤!’ ‘지화자!’ 같은 일들이 생긴달까. 글에 쉼표를 쓰는 일과 비슷하다. 지나치면 망칠 수 있지만 적당하면 귀여울 일이다.

 

술에도 잘 맞는 조합이나 예절 같은 게 있다고들 하지만, 그냥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신다. 오늘처럼 한라산을 병째 입에 대고 마시기도 하고, 물병에 소주나 화이트와인을 담아 공항에 가기도 한다. 와인을 와인잔에 마시지 않을 때, 술을 안주 없이 물처럼 마시면 어쩐지 더 맛있고 멋지다. 혼자 하면 재미가 덜하고 매번 같이할 사람을 찾는다. “종이컵이랑 와인 들고 등산 갈래?” “놀이터에서 그네 타며 막걸리 마실래?” 우리는 함께 익숙했던 방식에서 살짝 옆으로 빗나간다. 술을 마시다가 옆에 있던 친구가 아이처럼 웃으면 내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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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다리가 아파 개울가에 앉았다. 거기 앉아 남은 한라산을 더 마시다가 징검다리를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적당히 취해서 몸이 흔들거렸는데 돌이 꽤 넓어 넘어지지는 않았다. 점프할 때는 춤을 추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리듬대로 걸어볼까, 싶어서 덩실거리며 길을 따라 걸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강이 나왔다. 개울가에 앉았던 자세로 한강 둔치에 다시 앉았다. 한강이 선명하고 밝게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배가 고팠다. 친구와 가까운 만둣가게에 가서 갈비 만두와 치즈 라면을 시켜 먹었다. 취한 배에 따뜻한 것이 들어오니 졸음과 함께 웃음이 쏟아졌다. 취해서인지 졸려서인지 집에 오던 길은 생각이 잘 나지 않고 웃음소리만 어렴풋이 생각난다.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점점 더 심심해질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 때가 있다. 학창 시절에는 잘 몰랐던 기분이다. 나와 친구들이 더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런저런 일을 궁리하곤 한다. 나를 위해 쉼표를 귀여운 자리에 찍어 보고, 친구를 위해 엉뚱한 자리에 술을 올려둔다.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해보는 일도 있는 거다. 한라산을 들고 산책한 날의 일기에는 ‘가끔은 행복의 다른 이름을 알게 되기도 한다.’라고 적혀있다.


밖에서 공기놀이 하는 언니들 틈에 끼어들다 눈총을 받고 울먹이며 집에 돌아온 날이다. "윤미와 동네 산책을 하는데 윤미는 동네 언니들 공기놀이에 관심이 많다. 저도 한몫 끼겠다지만 통할 리가 없고 호되게 애들한테 야단만 맞는다. 집에서야 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토록 서러워 좋아하는 얼음과자도 안 통하고 저녁 내내 울어댔다. 윤미도 이제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열화당 사진문고 전몽각』  중에서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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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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