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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살찐 나는 싫지만

내 몸 고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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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찐 나도 여전히 가치 있다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나는 나의 적극적인 검열자이기도 했다. (2018. 08. 31)

드디어 헬스장 짐을 찾았다. 트레이너가 없는 때를 틈타 후다닥 도망치듯 샤워볼과 밑창이 깨끗한 운동화, 로션 따위를 들고 나왔다. 스스로도 왜 내가 숨어야 하는지 모른 채 울고 싶은 심정으로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헬스장을 마지막으로 찾은 건 작년 11월. 7월에 1년 이용권을 등록했으니 네 달 다니고 나머지 8개월은 말 그대로 헬스장에 기부한 셈이다. 변명이라면 변명이지만 그럴싸한 이유랄까 계기가 있었다.

 

작년 가을 즈음 이러다 죽겠다 할 정도로 일이 많았다. 모두가 떠난 어두운 사무실, 불 켜진 마지막 자리가 내 자리였다. 일이 끝나 집에 도착하면 고꾸라져 자기 바빴다. 운동은 자연스레 뒷전이 되었다. 그러다 간만에 틈이 나 헬스장에 갔다. 수건을 받고 탈의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트레이너가 말했다. "너무 오랜만에 오시는 거 아니예요? 자주 오셔서 운동하세요~." 그날이 헬스장을 찾은 마지막 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트레이너는 그냥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물론 방법이나 태도가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각종 숫자와 업무에 쫓겨 이미 자존감이 바닥을 친 상태라, 나를 공격하는 작은 말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이미 게임 중반에 다다라 막대가 얼마 남지 않은 구멍투성이 젠가나 마찬가지였다.

 

 

솔직말_사진1 젠가.jpg

             언스플래쉬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걸까. 마치 처음부터 회원권은 넉 달짜리였다는 듯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뒀다. 전화라도 해서 양도나 잠시 멈추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어야 하는데, 전화조차도 하기 힘들었다. 나는 우울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면서도 도망친 나를 용서하지 못해 어쩔 줄 몰랐다. 운동 대신 나를 위로한 건 음식이었다. 오랜 폭식 습관은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마음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음식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나 혼자, 내 아파트에서 음식으로 나를 달랬다. 음식은 나를 판단하지도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먹을 때는 오로지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 『헝거』 , 140쪽

 

나는 비대해졌다. 먹은 만큼 정직하게 살이 붙었고, 운동하며 쌓은 근육 대신 셀룰라이트가 자리잡았다. 자연스레 자존감이 낮아졌다. 페미니스트로서 몸매나 생김새가 나를 규정짓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살찐 나도 여전히 가치 있다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나는 나의 적극적인 검열자이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최고 몸무게와 최저 몸무게를 곱씹으며 가장 무게가 적게 나갔을 때의 나를 진정한 나라고 믿었다. 언제든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 한편으로는 최고 몸무게를 돌파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일에 관한 지적이나 다른 핀잔은 견뎠으면서 유독 몸 관리를 향한 지적에서 무너진 이유는 자명했다. 내 몸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 부끄러워하는 법을 먼저 배운 탓이었다. 오랜 수치심이었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 에서 수치심을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해 느끼는 고통이라고 설명한다. 인형과 동화책을 통해 어떤 몸이 이상적인지 알았다면, 주변의 시선과 핀잔으로 내 몸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나는 발목이 두꺼워 다리가 더욱 굵어 보이고, 전체적인 그림에 비해 팔뚝살이 많다고 했다. 부끄러워졌다. 좋아하는 옷 대신 몸의 단점을 감출 수 있는 옷을 골라 입었다.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전에 몸이 어떻게 보일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엄마는 샤워하려는 나를 위아래로 훑고 부위별로 댓글을 달았다. 딸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좋은 엄마. 우리 엄마. 엄마는 어떻게 해야 딸이 기존의 질서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잘 알았다. 그러나 딸이 행복하고 안전할 수 있는 길은 몰랐다. 보이지 않을뿐더러 상상조차 어려웠겠지. 그렇게 집에서조차 나는 전시되었다. 존재하기에 앞서 전시되는 몸. 살이 붙자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졌다. 섣부른 사람들에게 자기관리 못하는 사람으로 판단 당할까 두려웠다. 그로 인해 나도 내 몸을, 자기 관리 못한 나를,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답습해버리는 나를 싫어하고 마니까.

 

나는 나를 싫어한다. (중략)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내 몸을 싫어한다고. 나는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을 싫어한다. 내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방식이 싫다. 내 자아의 가치를 내 몸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것도 싫고 이 동일시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싫다. 나의 인간적인 취약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싫다. 내 몸을 내 사이즈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수많은 여성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싫다.
- 『헝거』 , 173쪽

 

 

솔직말_사진2 손.jpg

            언스플래쉬

 

 

여성의 몸이 읽히고 말해지는 방향은 두 가지이다.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고백의 대상이 되거나. 『나쁜 페미니스트』 를 쓴 록산 게이는 『헝거』 를 통해 강간당한 후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살찌운 후 비만인으로서 느낀 사회적 시선과 스스로를 향한 모순된 감정을 고백한다.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에는 어린이부터 동양계 미국인까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여성이 등장한다. 그들 대부분 마르든 뚱뚱하든 모두 자기 몸에 만족하지 못한다. 처음엔 만족한다고 말한 사람도 인터뷰가 계속되자 수많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다 자기 자신조차도 타인을 몸매로 판단하곤 한다고 털어놓는다. 원래는 참여할 생각도 못했던 경기인데도 매번 그 경기에 지고 있다고 느낀다며 말이다. 두 책 모두 다이어트에 성공했다거나 뚱뚱한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극복담이 아니다.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고백록이다.

 

그럼에도 고백은 힘이 크다. 여기서 힘은, 나만 힘들지 않다는 위로보다는 나도 고백하고 싶어지는 용기에 가깝다. 친한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다가 다이어트 이야기가 나왔다. 직장 생활하며 살이 쪘다, 저녁에 샐러드를 배달시켜 먹는데 좋더라, 요즘에 유행하는 운동이 어떻더라 따위의 이야기였다. 평소라면 회피하며 침묵했을 텐데, 그날은 헬스장에서 받은 상처와 폭식 습관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며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음에 보탬이 된 운동 경험을 말해주었다. 고백하고 나자 운동 얘기만 나와도 위축되었던 전과 달리, 앞으로 어떤 운동을 할까 고민할 수 있었다. 지금은 춤을 배워보고자 알아보는 중이다. 운동 대신 몸짓으로 시작하자는 마음에서다. 여전히 살찐 내가 싫고 내 몸을 사랑하는 법은 모르지만,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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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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