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이들의 컬러, 베이지
『컬러의 말』 연재
나서지 않고 안전하지만 너무 칙칙하다. 베이지색으로 꾸민 임대 공간에 방문하면 금세 질린다. 몇 시간 만에 건물 전체가 한데 어우러져 이를 악물고 일궈낸 무해함의 바다처럼 다가온다. (2018. 07. 09)
듀럭스는 가지각색의 물감을 파는 소매상이다. 베이지색을 사랑하는 이라면 두꺼운 색상 카드를 뒤척이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밧줄 돌리기’, ‘가죽 사첼 가방’, ‘저녁의 보리’ 또는 ‘고대 유물’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면 ‘문지른 화석’, ‘자연스러운 헤센(자루를 만드는 데 쓰는 갈색 천―옮긴이)’, ‘트렌치코트’, ‘북유럽 항해’를 포함한 몇 백 가지 색깔 가운데 마음에 드는 걸 고를 수 있다. 하지만 바쁘거나 기발한 이름이 쓰인 카드를 뒤적이고 싶지 않은 이라면 난감할 수 있다. 지금껏 소개한 옅은 황회색이 실제로 ‘베이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쫀쫀한 모음이 가운데 박힌 이 단어에 매력이 없기 때문일까?(홍보 전문가라면 그런 특성도 헤아릴 수 있다.) 베이지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유래한 단어로 염색하지 않은 양털을 일컫는다. 종종 그래왔듯 ‘베이지’라는 단어는 색깔에도 쓰이지만 강한 열정을 의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런던 소사이어티>에 의하면 1889년 늦가을에 베이지가 유행이었지만 이 또한 ‘멋진 갈색 및 금색과 아름다운 조화’ 때문이었다. 오늘날 베이지는 위에서 읊은 더 아름다운 이름에 밀려 패션계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베이지는 1920년대에 인테리어 디자인을 창시한 엘지 드 울프가 좋아하는 색깔이었다. 그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매료되어 ‘베이지색! 나의 색이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녀 말고도 베이지색을 좋아하는 이는 더 있었다. 20세기에는 많은 이가 베이지를 더 강렬한 색의 바탕색으로 썼다. 두 과학자가 200,000개의 은하계를 조사해,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일종의 베이지색임을 발견했다. 그래서 즉시 더 섹시한 호칭을 찾았고 ‘빅뱅 버프’나 ‘스카이 아이보리’ 같은 이름이 물망에 올랐지만 ‘코스믹 라테’로 타협했다.
그게 베이지색이 짊어진 평판 문제의 핵심이다. 나서지 않고 안전하지만 너무 칙칙하다. 베이지색으로 꾸민 임대 공간에 방문하면 금세 질린다. 몇 시간 만에 건물 전체가 한데 어우러져 이를 악물고 일궈낸 무해함의 바다처럼 다가온다. 집을 파는 비결을 다루는 요즘의 책은 아예 베이지를 쓰지 말라고도 못 박는다. 색깔에 대한 챕터는 부동산 시장에 만연한 색깔의 독재를 비판하며 시작된다. ‘어찌된 영문인지 베이지색을 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사실 상황은 그보다 더 열악하다. 모두가 좋아하리라는 기대를 품지도 않고, 그저 누구의 기분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베이지색을 고르기 때문이다.
베이지색은 부르주아의 핵심 색깔이 될 수 있다. 통상적이고 독실한 척하며 물질적이다. 양에서 따온 색깔이 양처럼 소심한 이들에게 선택받는 색깔이 되었다는 사실은 신기하게도 적절해 보인다. 베이지만큼이나 고상하면서도 밍밍한 소비주의를 상징하는 색이 또 있을까? 듀럭스에서 그런 이름을 잔뜩 붙이는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지루한 베이지색’의 선입견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컬러의 말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저/이용재 역 | 윌북(willbook)
매일 색을 다뤄야 하는 사람이라면 색에 대한 깊은 영감을, 색과 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색을 제대로 이해하는 안목을 안겨줄 것이다.
기자, 작가. 2007년 브리스톨 대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에서 18세기 여성 복식사와 무도회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코노미스트>에서 ‘책과 미술’ 담당 편집자로 일하며, <텔레그래프>, <쿼츠>, <뉴 스테이트먼> 등에 글을 기고했다. 2013년 <엘르 데코레이션>에서 연재했던 칼럼을 정리한 책 <컬러의 말>을 출간했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저/<이용재> 역14,22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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