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맛본 문학의 쓴맛, 그러나 오래 남는 깊은 맛
『단순하지만 충만한, 나의 전원생활』 편집 후기
많은 독자들이 벌린 클링켄보그의 글을 읽고 자연을 마주했을 때 그가 느꼈던 ‘날카로운 부끄러움’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18. 06. 26)
“내가 내고 싶은 책을 내고 싶어서” 1인 출판사를 시작했지만, 막상 ‘내가 내고 싶은 책이 잘 팔릴까?’라는 생각이 들면 그나마 있던 몇 방울의 자신감마저 말라 버린다. 그럴 때마다 자꾸 ‘팔랑귀’가 되어 주변 사람들의 이런저런 추천과 조언에 귀를 쫑긋 세운다.
목수책방의 열세 번째 책은 문학 편집 경험이 많은 한 편집자의 추천에 ‘혹해서’ 선택하게 된 책이다. “「뉴욕타임스」에 오래 연재한 시골생활을 주제로 한 칼럼을 묶은 책이고요, 저자가 제2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고 불린다네요.” 다른 건 모르겠고 깐깐하게 필자를 고른다는 「뉴욕타임스」가 선택한 ‘검증 받은’ 필자라는 점, 그리고 생태주의 문학의 고전 『월든』 과 비교되었다는 점이 귀에 쏙 들어왔다. 망설임 없이 일단 일사천리로 계약 진행!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시골생활’을 꿈꿔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고, 글도 기본 이상은 할 테니 일단 해 보자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번역 초고를 받아보았는데, 예상했던 대로 나대지 않으면서도 조용하게 빛나는 문장들이 참 좋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내 앞에는 정말 넘어야 할 ‘큰 산’이 놓여 있었다. 명확한 뜻의 단어들이 연결되어 있는 자연과학서의 문장이 아닌 단어 하나에도 여러 뜻이 담겨 있고, 어떤 ‘뉘앙스’를 살려서 단어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문학적인 문장으로 이어진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책에 비해 편집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고, 원문과 다른 의미로 수정이 되어 번역자가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킨다고 ‘삽질’도 꽤 많이 했다. 게다가 양도 무척 많아서(11년 치 일기 일기를 모았으니!), 6교를 볼 때쯤에는 글자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어쨌거나 이번 책은 번역이, 그리고 문학 번역서 편집 작업이 글 쓰는 일만큼이나 공력이 들어가는 어려운 일이었구나, 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또 하나 새삼 깨달은 사실은 읽을수록 계속 어딘가 숨어 있던(?) 오자가 튀어나온다는 것과, 매번 읽을수록 ‘다르게’ 읽힌다는 것! 어쨌든 이 책은 기본부터 다시 차근차근 공부해야겠다며 스스로를 질책하게 만든 책으로 기억될 듯하다.
만만하게 생각했다가 큰 코 다친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벌린 클링켄보그의 글은 정말이지 훌륭했다. 보도자료에 집어넣을 인용문을 고를 때 어떤 것을 빼야할지 무척 고민이 될 정도로 밑줄 친 부분이 차고 넘쳤다. 벌린 클링켄보그는 “시간을 좀 더 정교하게 의식하고 싶어서” 시골에 이사를 왔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동안 열한 번 계절이 바뀐다. 매일매일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저자는 시골생활을 하면서 자연이 제공하는 그 다양한 시간들, 함께 생활하는 뭇생명들이 만들어 내며 쌓아 가고, 앞을 나아가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같은 듯 다른 시간의 궤적에 매료된다. 이건 모든 것이 빨리 나타났다 사라지고, 어떤 장소에서 겪은 것들이 쌓이지 않고 허무하게 증발해 버리는 도시에서 경험하기 쉽지 않은 시간 감각이다. 저자의 일기를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저자가 느꼈던 것처럼 계절의 순환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속적으로, 그리고 아주 예민하게 감지하며,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들은 개, 말, 거위, 오리, 돼지, 말, 여우, 새 등 농장 안과 밖에서 저자와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의 이야기다. 동물이야말로 인간보다 더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 주는 거울이다. 동물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예속이나 계약이 아닌 ‘약속’이라는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우리가 다른 생명을 향해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 모를 수오리의 깃털 속에 손을 넣어보는 장면이나, 평생 자신의 곁을 지킨 말의 죽음을 바라보는 이야기는 다시 읽어도 묵직한 감동이 몰려온다.
막연하게 ‘아,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한번 차분하게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성공적인 귀촌 노하우 따위는 없지만, 이 책은 가르치려들지 않으나 언제나 한결같이 준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자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알게 해 준다.
마지막으로 힘주어 밑줄 친 문장 하나를 소개한다. 많은 독자들이 벌린 클링켄보그의 글을 읽고 자연을 마주했을 때 그가 느꼈던 ‘날카로운 부끄러움’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연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는다. 경제가 무너져도, 정치가 부패해도, 혹여 개인적 슬픔이 찾아와도 자연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이 농장의 다른 생물들은, 이 놀랄 만치 긴장된 인간의 계절에 내가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겁먹은 채 사로잡힌 그 느낌, 무언가 근본적인 것을 잊어버렸다는 느낌에서 나는 날카로운 부끄러움을 느낀다.”
단순하지만 충만한, 나의 전원생활벌린 클링켄보그 저/황근하 역 | 목수책방
가축과 야생동물들과 교감하며, 계절의 순환을 온몸으로 느끼며 11년 동안 담담히 써 내려간, 무뎌진 삶의 감각을 깨우는 아름다운 전원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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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풀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생태’ 전문 1인 출판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9종의 책을 출간했으며, 1인 출판사의 생존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는 10종 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장세이 작가와 함께 옥수동에 ‘생태공간 목수’를 운영하며 ‘자연과 사람을 이어 줄 수 있는’ 이런저런 일을 도모하고 있다.
<벌린 클링켄보그> 저/<나이젤 피크> 그림/<황근하> 역19,800원(10% + 5%)
제2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 불린 벌린 클링켄보그가 1997년부터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시골생활’을 주제로 한 칼럼을 엄선해 엮은 책이다. 저자가 뉴욕 업스테이트 지역의 작은 농장에서 초록의 자연과 벗하며, 가축과 야생동물들과 교감하며, 계절의 순환을 온몸으로 느끼며 11년 동안 담담히 써 내려간, 무뎌진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