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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일본은 서로 배신했다!

칭다오 맥주가 만들어진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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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큰 위협이 될 ‘노란 나라’ 일본과 중국을 미리 제압하자는 빌헬름 2세의 ‘황화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2018. 05. 18)

야마가타의 ‘주권선’ ‘이익선’과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공포

 

빈에서 돌아온 야마가타는 1890년 3월에 『외교정략론』을 발간한다. 이 책에서 그는 ‘주권선’ ‘이익선’이란 희한한 용어를 소개한다. 빈 대학의 슈타인 교수에게서 배운 ‘권세강역(權勢疆域, Machtsphare)’과 ‘이익강역(利益疆域, Interessensphare)’을 일본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번역한 것이다. ‘권세강역’은 ‘주권선’으로 바뀌었고, ‘이익강역’은 ‘이익선’으로 바뀌었다. 야마가타는 타국의 침략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 주권선을 지키는 것이며, 일본의 지리적 우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이익선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라고 선언한다.

 

야마가타는 같은 해 12월 총리대신이 되어 새로운 제국헌법에 따라 처음 열린 제국의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게 된다. 야마가타의 연설은 15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이후 1945년 일본 군국주의가 망할 때까지 일본의 모든 정치, 군사의 기본 노선이 된다. 야마가타의 연설 내용은 간단했다. 일본의 국경인 주권선만큼이나 이익선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익선이 무너지면 주권선에도 큰 위협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거다. 야마가타는 조선이 일본의 이익선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아주 분명하게 언급했다.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 철도는 이미 중앙아시아로 나가 있고, 수년이 안 되어 준공을 보게 됐으니, 러시아의 수도를 떠나 십 수 일이면 말에게 흑룡강 물을 마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시베리아 철도 완성의 날은, 바로 조선이 多事多難한 때가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조선이 多事해질 때는, 동양에 일대 변동이 生할 機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인데, 조선의 독립을 유지할 무슨 보장이 있는가. 이 어찌 우리 이익선을 향하고 있는, 급하고도 극적인 자극과 충격을 느끼지 않고 배길 것인가.’ (허문도, ‘日帝는 조선을 쳐서 일어나고, 조선을 삼켜 敗亡했다’, ‘『월간조선』, 2010년 4월호)

 

야마가타는 ‘일본의 이익선인 조선을 위협하는 것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라는 슈타인의 훈수를 이렇게 일본 정치가들에게 전달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에 이어 동아시아에 뻗쳐올 러시아에 대한 위협을 강조하며 의원들에게 군비확장 예산의 비준을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 세계 최강의 육군을 가진 러시아가, 해군이 주력인 영국의 제지가 불가능한 시베리아를 거쳐 중국이나 조선까지 직접 군사작전을 펼친다면 일본의 위기는 눈앞의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가지는 군사적 의미는 아주 특별했다. 당시 바다는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대서양과 지중해, 인도양의 모든 해로가 영국의 수중에 있었기에 유럽나라들의 아시아 정책은 영국의 허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만이 육로를 통해 아시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의 아시아 지배력은 조선의 거문도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1885년 영국 해군은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하여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에 대한 강한 저항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놓이면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아예 영국의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의 근간까지 흔들 수도 있다. 철도를 통해 이동하는 러시아 육군은 중국, 일본, 조선의 동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영국의 통치하에 있던 인도, 파키스탄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야마가타가 설명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위협에 일본인들은 겁먹었다. 이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거의 공포 수준에 이르러 ‘공로병(恐露病)’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였다. 야마가타의 의회 연설이 있고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일본인들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오츠사건(大津事件)’이다.

 

 

그림1-오츠사건.jpg

 오츠사건(大津事件).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불안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건설로 인해 더욱 커졌다. 급기야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공식에 참가하기 직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인 순사가 그를 칼로 습격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후에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되는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Alexadrovich Romanov, 1868~1918)는 1891년 5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릴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공식에 참석하기 전, 일본을 방문했다. 5월 11일, 교토 인근 시가현(滋賀縣)의 현청 소재지인 오츠(大津)를 산책하던 니콜라이 황태자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때 오츠의 경비순사였던 쓰다 산조(津田三藏, 1854~1891)가 니콜라이 황태자를 습격했다. 시골의 일개 순사가 러시아 황태자의 머리를 일본도로 내려친 것이다. 칼날은 빗나가 황태자의 머리를 살짝 스쳤다. 쓰다는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본 방문이 일본 침공을 위한 사전 시찰이었다는 당시 소문을 듣고 암살을 시도했다고 자백했다.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지난 몇 십 년간 서구 열강들에게 호되게 당했던 일본인들에게 러시아의 보복에 대한 공포는 엄청났다. 나라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겁먹은 일본 국민들은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집단으로 사과의 전보를 보냈다. 사건 이틀 뒤에는 메이지 천황이 직접 교토까지 방문해 사죄했다.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 악화를 걱정하는 한 일본인이 교토부청 앞에서 자살하는 일도 벌어졌다.

 

 

1945년까지 계속된 일본의 ‘주권선’과 ‘이익선’

 

러시아에 대해서는 그토록 두려움에 떨었던 일본이 아시아의 오랜 맹주였던 청나라에 대해서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특히 한반도에 대한 패권 다툼에서 일본은 결코 청나라에 밀리지 않으려 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일본과 청나라가 동북아시아 세력균형을 위해 체결했던 1885년 ‘톈진조약’의 핵심은 ‘상호통지’였다. 앞으로 조선에 한쪽 나라가 파병할 경우, 반드시 상대편에게 통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겁먹은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그해 6월, 청나라가 파병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군대를 급파한다. 동학농민운동이 잠잠해 진 이후에도 일본은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오히려 청나라 군대를 습격한다. 이어 평양과 산둥반도 일대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청일전쟁’이다. 전쟁 초기, 일본은 청나라와 조선을 적국으로 전쟁한다고 선언했다가, 이후 조선을 적국에서 슬그머니 빼낸다. 이후, 야만국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선전과 더불어 ‘동양 전국(全局)의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을 만들어낸다. 당시 일본인들은 청일전쟁을 서양을 대신한 ‘문명’으로서의 일본과, 동양의 ‘야만’을 대표하는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이해했다.

 

 

그림2-청일전쟁.jpg

일본이 생각했던 청일전쟁. 일본인들은 청일전쟁을 문명을 대표하는 일본과 야만적인 청나라의 전쟁으로 생각했다. 또한 야만적인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구해내는 전쟁이라고 믿었다.

 

 

청일전쟁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상이 많이 달라진다. 청일전쟁은 영국과 러시아의 대리 전쟁이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했다. 바다는 자신들이 지킬 수 있지만, 육지를 통해 남하하는 러시아와 대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894년 영국은 일본과 ‘영일통상항해조약(英日通商航海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영국은 일본에게 ‘치외법권’을 폐지하고 ‘관세자주권’을 부분적으로 폐지하는 선물을 주는 대신,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 역할을 일본에게 맡겼다. 반면 청나라는 급속히 성장하는 일본의 북상을 저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같은 입장이었다. 해양세력인 영국과 일본이 한쪽에 있고, 대륙세력인 러시아와 청나라가 반대편에 있는 형국이었다. 이후 일본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오가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일이 결정된다. 최초로 ‘대본영(大本營)’이 히로시마에 설치된 것이다. 최초의 대본영이 히로시마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태평양전쟁 당시 원자폭탄이 최초로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은 히로시마를 원자폭탄의 희생 지역으로 ‘기념(?)’하고 있지만, 수십 년간 일본 침략주의의 사령탑이었던 대본영이 처음 설치된 곳이었음은 숨기고 있다.

 

일본 침략주의의 상징적 기관인 대본영은 청일전쟁을 필두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다시 설치되어,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본영은 오늘날 개념으로는 ‘합동참모본부’라고 할 수 있다. 천황 직속 통수기관인 대본영의 설치는 1893년 5월 19일에 ‘전시 대본영 조례’에 의해 법제화되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전시에 천황의 대본영이 육해군을 지휘하는 총사령부가 되고, 참모총장이 천황의 막료장이 되어 육해군을 지휘하는 명령체계가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대본영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본영에 대한 정치가들의 개입이 철저하게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대본영에서 결정된 일을 정부에 통고하는 형식의 ‘대본영 연락회의’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청일전쟁 당시, 수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대본영의 회의에 겨우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림3-히로시마 대본영.JPG

청일전쟁 당시 히로시마에 설치된 대본영(大本營). 일본의 독일 참모제도 흉내 내기는 청일전쟁 당시 히로시마에 대본영을 설치함으로서 완성된다. 대본영은 오늘날의 ‘합동참모본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첫 번째 대본영이 히로시마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잊혀졌다. 히로시마는 원자탄이 처음 떨어진 곳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 장소인 히로시마는 일본의 잔인한 침략주의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정치가들의 배제와 더불어 일본의 대본영이 가진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는 육군 주도였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육주해종(陸主海從)’이다. 이미 설명했듯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을 모델로 했고, 일본 육군은 프로이센, 즉 독일제국의 군대를 모델로 했다. 해군력은 함대의 무장력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해전이 일어날 경우, 물량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계산하여 작전을 수립하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일본해군은 줄곧 취했다. 그러나 육군을 달랐다. 병참을 고려하지 않는 전략으로 일관하는 일본육군이 대본영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 군대의 고질적인 문제가 이미 청일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의 대본영은 육군의 최고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당시 일본 군대는 청나라 군대보다는 훨씬 효율적인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병사들은 소총, 탄약과 더불어 18킬로나 되는 배낭을 짊어지고 혹독한 더위에 한반도를 행군해 중국까지 올라가야 했다. 압록강 인근에서 맞은 겨울은 혹독했다. 일본 병사들은 그런 추위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병사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당시 제1군 사령관으로 출전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절대 포로가 되지 마라’고 엄명했다.

 

전쟁터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알아서 해결해야 했던 일본군은 더욱 잔인해졌다. 민간인에 대한 학살도 아주 쉽게 자행되었다. 청일전쟁 당시, 뤼순(旅順)에서 일어난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 학살사건은 세계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정신력’이 물질적인 제반 조건을 초월한다는 일본군 특유의 ‘무대뽀(無鐵砲)’ 전략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만세돌격(万歲突擊)’, ‘옥쇄(玉碎)’와 같은 일본군 특유의 개념들은 일본 육군의 병참전략 부재를 감추는 단어들이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상자의 실상을 살펴봐도, 일본군대의 무모함은 바로 드러난다. 전쟁 후, 일본군 전사자와 중상자는 17,282명으로 보고되었다. 청일전쟁에 참가한 일본군 전체 병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다. 황당한 것은 전체 전사자와 중상자의 90퍼센트 이상이 동상이나 흑사병, 각기병, 이질, 콜레라와 같은 전투와는 무관한 질병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1894년 1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 1군 사령관은 적극적인 동계 작전을 지시한다. 그러나 추위와 일본 군대의 병참 실태를 고려할 때 야마가타의 작전은 누가 봐도 무리였다. 그러나 육군의 최고 원로인 야마가타를 저지할 사람은 없었다. 야마가타 휘하의 장군들은 당시 총리대신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긴급한 사정을 보고한다. 이토 총리는 천황에게 진언하고, 천황은 이를 받아들여 야마가타를 귀국시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야마모토 아리토모와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대신을 서로 번갈아 맡아가며 일본의 침략주의를 진두지휘했으나, 문관이었던 이토와 육군 지휘관이었던 야마가타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극적으로 차이가 났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된 후로는 야마가타 주도의 ‘육주해종(陸主海從)’이 지속되었고, 수십 년 후 일본의 군국주의는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그렇게 갑자기 죽지 않았더라면 야마가타의 폭주는 멈출 수 있었을 거라며, 안중근 의사에 대한 요상한 섭섭함(?)을 토로하는 이들이 가끔 있다.

 

어쨌든 1895년 4월, 청일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된다. 순식간에 산업화된 일본을 봉건적 구태가 여전했던 청나라 군대가 당해낼 수는 없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과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한다. 청나라가 항복한 것이다. 이 시모노세키조약에서도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첫 번째 조항에 포함된다. 강화도조약에서 조선과 일본이 함께 서명한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내용을 청나라가 다시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독일의 배신(?)과 일본의 복수

 

일본은 의기양양했다. 승전의 전리품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단독으로 조선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청으로부터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넘겨받고 2억 냥의 배상금도 받게 되었다. 2억 냥은 당시 일본 돈으로 3억 엔에 해당한다. 일본의 한해 예산이 1억 엔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계산하면 엄청난 규모의 배상금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선을 북쪽으로는 조선을 지나 랴오둥 반도에까지, 남쪽으로는 타이완까지 넓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개화 초기부터 자신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고, 자신의 편이라고 굳게 믿었던 독일이 느닷없이 배신한 것이다. 더구나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러시아, 프랑스와 한 편이 되어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랴오둥 반도를 도로 빼앗아 간 것이다. 이른바 ‘삼국간섭(三國干涉)’이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지 겨우 5일이 지났을 때다.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일본에 랴오둥 반도의 소유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소유하는 것은 청나라의 수도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여 극동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한다는 이유였다. 이 같은 요구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독일의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고 만주까지 진출한다면 극동아시아의 러시아 지배권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 되리라 여겼다.

 

러시아는 일본이 랴오둥 반도 반환에 대한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하면 러시아 함대를 앞세워 일본과 일전까지도 불사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이 청나라를 이겼다지만, 청나라는 ‘아시아의 병자(the Sickman of Asia)’일 뿐이었다. 일본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러시아는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을 야금야금 삼켜오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의식해야 했다. 먼저 독일에 협조를 요청했다. 프랑스는 1894년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차관까지 제공한 상태였다. 구태여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은 1907년 영국까지 참여하면서 ‘삼국협상(Triple Entente)’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삼국협상은 독일 주도의 ‘삼국동맹’과 대립하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독일에서는 외교정책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절묘한 외교정책으로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했던 비스마르크는 1889년에 즉위한 새로운 황제 빌헬름 2세와 대러시아 외교정책을 두고 갈등했다. 비스마르크는 채 1년을 못 버티고 1890년 3월 실각했다. 8년 후, 비스마르크는 사망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빌헬름 2세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묘비에 ‘황제 빌헬름 1세의 진정한 독일의 충신(Ein treuer deutscher Diener Kaiser Wilhelms I.)’이라고 새겨달라고 했다. 빌헬름 1세의 손자인 빌헬름 2세와 자신은 아무 관계없다는 이야기다. 독일의 철혈재상도 이렇게 뒤끝이 길었다.

 

 

그림4-비스마르크 떠나다.jpg

 실각하는 비스마르크. ‘늙은 수로안내인 배를 떠나다’는 제목은 영국의 「펀치(Punch)」에 실린 시사만평.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쫒아내고 ‘우리도 해가 비치는 우리 자리를 요구할 뿐이다’라며 영국처럼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차지하려 했다.

 

 

빌헬름 2세는 이른바 ‘세계정책(Weltpolitik)’을 주창하며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책(Realpolitik)’과는 거리를 두려 했다. 1871년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의 독일제국은 1871~1889년까지의 ‘현실정책’ 시기와 1889~1918년까지의 ‘세계정책’ 시기로 나뉜다. 빌헬름 2세는 중부유럽의 강자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얻고자 했다. 빌헬름 2세의 외교정책은 당시 외무부장관이었던 베른하르트 폰 뷜로(Bernhard von Bulow, 1849~1929)가 다음과 같은 말로 명확하게 표현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누구를 음지로 밀어 넣으려는 생각은 없다. 단지 우리도 해가 비치는 곳에 우리 자리를 요구할 뿐이다(Mit einem Worte: Wir wollen niemand in den Schatten stellen, aber wir verlangen auch unseren Platz an der Sonne.)”

 

참으로 분명하게 자신들의 욕심을 표현했다. 우리도 영국처럼 지구 반대편에 식민지를 얻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뷜로 외무장관이 빌헬름 2세의 오른팔이었다면 왼팔은 해군장관 알프레드 티르피츠(Alfred von Tirpitz, 1849~1930)였다. 당시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육군의 나라였다. 그러나 통일 후 독일해군 양성의 필요성이 급하게 제기되었다. 독일 산업이 발전하면서 독일의 해외교역량이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주된 해외무역 경로인 북해와 발트해를 영국 해군이 봉쇄할 경우, 독일에겐 그 어떤 대안도 없기 때문이었다. 티르피츠는 대형전함 건조를 추진한다. 그러나 티르피츠가 추진한 독일 함대 건설은 제1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원인이 된다. 지정학적인 단어로 설명하자면 영국 주도의 해양세력에 대한 대륙세력의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영국과의 군비 경쟁을 야기했던 티르피츠의 독일의 해군증강 계획은 청일전쟁 직후에 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중단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독일은 갑자기 조급해졌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독일은 조선, 청나라에 개입하기를 꺼려 했다. 전쟁으로 치닫는 청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중재하기 위한 영국의 노력에 동참하는 것도 거부했다.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극동아시아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자, 독일은 아시아에서 해군기지를 가져야 한다는 욕심을 갖기 시작했다.

 

독일이 소외된 채,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일본이 청나라 분할 경쟁을 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갖게 된 것이다. 이때 빌헬름 2세는 앞서 설명한 ‘황화론(Gelbe Gefahr)’를 주장하며 러시아의 적극적인 극동정책을 요구한다. 사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빌헬름 2세의 공격적인 ‘세계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1894년 동맹을 맺었지만, 아시아의 청나라 분할에서마저 적이 될 까닭은 없었다. 일본을 제치고 적당히 협상하여 나눠가지면 될 일이었다. 더구나 훗날 큰 위협이 될 ‘노란 나라’ 일본과 중국을 미리 제압하자는 빌헬름 2세의 ‘황화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5-티르피츠.png

독일의 티르피츠 해군장관. 빌헬름 2세는 티르피츠를 통해 독일해군 전력을 키우려고 했다. 독일 해외무역량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북해와 발트해의 해로를 안전하게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간섭’을 통해 독일이 산둥반도를 조차지로 차지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티르피츠는 이후 해군장관이 되어 독일의 대형전함 건조에 앞장선다. 영국과의 해군군비경쟁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다.

 

 

독일, 러시아, 프랑스는 공동으로 1895년 4월 23일 일본 외무성에 랴오둥 반도를 포기할 것을 공식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당황했다. 러시아 한 나라만 상대하기도 벅찬데, 독일과 프랑스가 동시에 랴오둥 반도의 반환을 요구한 것이었다. 더구나 적어도 자신들에게만은 적대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독일마저 배신했다. 영국에 외교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으로 인해 유럽에서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나라들과 구태여 부딪힐 필요는 없었다. 일주일 후, 일본은 뤼순 항을 제외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겠다는 꼼수를 역제안 했으나, 3국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결국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3천만 냥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게 된다. 청나라에 반환하는 형식이었지만, 일본이 포기한 랴오둥 반도의 뤼순과 다롄을 러시아가 바로 차지하게 된다. 독일은 몇 년 후 산둥 반도의 자오저우 만(膠州灣)을 차지했다. 칭다오(靑島)가 있는 곳이다. 독일 맥주보다도 더 독일스러운 칭다오 맥주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러시아는 물론 독일도 드디어 극동아시아의 ‘부동항’을 차지한 것이다. 독일이 산둥반도 조차권을 차지하는 이 과정에 적극 관여한 이가 바로 티르피츠다. 그는 이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1897년 본국으로 소환되어 해군장관이 된다.

 

독일의 배신에 일본은 바로 복수한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뒤늦게 영국과의 군사동맹을 구실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 반도를 바로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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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오늘의 책

첨단 도시 송도를 배경으로 한 세태 소설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화려한 고층 건물에 살고 있는 중산층부터 그들의 건물이 반짝일 수 있도록 닦아내는 청년 노동자까지 오늘날 한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계층의 서사를 써냈다. 그들의 몸을 통해 욕망과 상처로 얼룩진 저마다의 삶을 복합적으로 표현했다.

사유와 성찰의 회복과 공간의 의미

'빈자의 미학' 승효상 건축가가 마지막 과제로 붙든 건축 어휘 '솔스케이프’. 영성의 풍경은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 사유하고 성찰하는 공간의 의미를 묻는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공간이야말로 건축의 본질이기에, 스스로를 어떻게 다듬으며 살 것인가에 대한 그의 여정은 담담한 울림을 선사한다.

당신의 생각이 당신을 만든다.

마인드 셋 전문가 하와이 대저택이 인생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알렌을 만났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집어 들었던 제임스 알렌의 책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담담하게 써 내려갔다. 생각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지는 내면 생각의 힘과 그 실천법을 만나보자.

그림과 인생이 만나는 순간

‘이기주의 스케치’ 채널을 운영하는 이기주의 에세이. 일상의 순간을 담아낸 그림과 글을 통해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소재를 찾는 것부터 선 긋기, 색칠하기까지,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인생이 배어 있다고 말한다. 책을 통해 그림과 인생이 만나는 특별한 순간을 마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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