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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연결하는 것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이 영화, 와인의 과일향처럼 향긋하고 ‘탄탄하다’. 와인 맛, ‘구조가 탄탄하다’는 것은 얼마나 들음직한, 먹음직한 평가인가. (2018. 05. 17)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의 한 장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와인을 마시지 않는 건 유죄. 와인은 술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땅의 맛이고 계절의 맛이고 인생의 맛이니까, 내 앞의 잔에 당도하기까지 그 숙성의 과정을 거쳐온 와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한 모금 입안에 머금는 순간의 감흥이란.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의 원제는 ‘Ce qui nous lie’, 우리를 연결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무엇이 ‘어린 나’와 ‘어른 나’를 화해하게 하는가. 무엇이 아버지와 아들을 뒤늦게 용서하게 하는가, 무엇이 삼남매를 이해하게 만드나, 무엇이 이 영화와 나를 연결하는가.
와인 영화가 좀처럼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은 역시 와이너리 풍경 때문이다. 극장에 앉아 저 멀리 포도밭을 내 안에 품을 수 있게 해주는 영화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게다가 이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 부르고뉴다. 작년 봄에 부르고뉴 와이너리 여행을 다녀온 나로서는 극장에서 마음 들썩거려서 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유명한 ‘로마네 꽁띠’ 와이너리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되살아났고, 와이너리 저장고에서 마셨던, 아니 입안에 머금었다 뱉었던 열 몇 가지 와인의 추억이 나를 못 견디게 흥분시켰던 것이다.
선대부터 와이너리를 운영한 부르고뉴의 삼남매 집 장남 ‘장’은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과 압력을 못 견디고 집을 떠난다. 그리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10년 만에 귀향. 여동생 ‘줄리엣’은 그사이 아버지 밑에서 와인을 만들고 남동생 ‘제레미’는 이른 결혼, 장인의 와이너리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리웠고 그래서 소식 없던 장에게 원망이 쌓였던 두 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로에게 ‘연결된’ 와이너리를 놓고 고민한다. 공동 소유권으로 남겨진 와이너리, 팔지 않으면 상속세를 낼 수 없는 상황이고, 팔기엔 애정과 사연이 많다.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의 한 장면
매일 아침, 봄 여름 가을 겨울 창밖의 풍경은 다르다. ‘어린 장’은 매번 새로운 풍경과는 달리 자신이 전혀 변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지겨워 떠났지만 ‘어른 장’은 돌아와서 그 풍경을 달리 받아들인다. 포도알을 맛보며 수확기를 결정하고, 포도와 가지의 비율을 어느 정도로 담글 것인가 고민하고, 발효되기 시작하는 포도들을 두 다리로 휘저으며 으깨어주고, 막 나온 와인을 시음하는 삶. 고향을 떠나 떠돌다가 여인 ‘알리시아’를 만나 호주에서 정착, 아들을 낳고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장으로서는 와인과 뗄 수 없는 삶이다. 고향을 떠나서도 와인과 함께하는 삶이었으니.
“잊고 있었다. 프랑스 겨울은 끝이 없다는 것을. 땅을 일구다 보면 내 소유가 된 듯이 느껴진다. 땅문서나 재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땅이 내게 속한 듯한 느낌이 들 때면 나도 땅에 속해 있다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장의 고백. 100년 지속될 수 없는 포도나무를, 할아버지 때부터 심겨진 포도나무들을 정리하면서 장은 자신이 이 땅에 속해 있다는 자각을 분명히 한다.
호주에서 갈등 관계에 있던 알리시아는 아들 벤과 함께 예고 없이 부르고뉴의 장을 찾아오고(포도밭을 달려가는 장의 표정은 감동), 부르고뉴에서 머무는 동안 장을 이해하며(새로운 상대방을 발견) 더 큰 가족인 장의 동생들과 와이너리를 함께 지켜온 사람들을 품게 된다(아름다운 대망의 결말).
이 영화, 와인의 과일향처럼 향긋하고 ‘탄탄하다’. 와인 맛, ‘구조가 탄탄하다’는 것은 얼마나 들음직한, 먹음직한 평가인가. 장은 다시 호주로 떠나되 부르고뉴의 와이너리를 팔지 않게 된다.(내 그럴 줄 알았지만) 영화 끝나고 마시는 와인의 맛처럼 구조가 탄탄하다.
인생처럼 쓰고 시고 달고 향긋한 와인의 세계에 기꺼이 빠져들 준비! 영화 보기 전에 왜 와인부터 구입했겠는가. 와인 영화와 나는 이렇게 또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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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