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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의 얼굴이 좋았다
대관절 아는 얼굴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날이 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얼굴의 전혀 다른 표정을 보게 되는 날. 잘못한 것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잘못한 것만 같은 날. (2018. 05. 17)
언스플래쉬
나는 G가 좋았다. G의 얼굴이 좋았다. 희고 동그란 얼굴에 웃을 때 반달이 되는 눈매가 좋았다. 어떤 삿된 기운도 쉽게 내려앉지 않을 것 같은 맑은 기운이 그녀의 얼굴에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원피스와 어깨 너머에서 넘실거리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모습에 우아함을 보태주었다. 나보다 몇 살 위일까, 가늠해 보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저런 얼굴이라면, 나이가 얼마인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G는 작은 액세서리 공방을 운영했다. 처음 봤을 때는 열여덟 살 먹은 늙은 개, 까시와 함께 있었다. 얼마 뒤 까시가 보이지 않아 안부를 묻자, 떠났다고 했다. 슬픔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충분히 사랑하다 헤어진 이들이 보여주는 긍정의 얼굴.
G의 공방은 밖에서 보면 꽃집으로 착각할 만큼 식물이 많았다. 작은 화분에 담긴 다양한 식물들이 그녀가 만든 액세서리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방은 습도와 온도가 알맞아 어느 계절이고 들어가면 쾌적했다. 나는 이따금 G의 공방에 들렸다. 친구에게 선물할 귀걸이를 사거나 내가 직접 찰 목걸이나 팔찌를 샀다. 공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녀의 가게 앞을 지날 때면 저절로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나는 여러 번, 길고양이와 비둘기에게 밥을 챙겨주는 G의 모습을 보았다. 아는 체 하지 않고 길 건너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았고, 안심이 됐다. G는 내게 작은 공방에 깃든 우물 같은 여인이었다.
G와 사적인 이야기를 길게 나누는 일은 없었다. G는 내게 식물을 키우는 법이나 보석을 가공하는 일에 대해 말했고, 나는 동네를 산책한 이야기나 최근에 시작한 운동 이야기를 하는 게 전부였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누가 G에 대해 물어보면 머뭇거리다가, 조금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카페에서 G가 한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인사를 하려다 G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 다가가지 못했다. 그녀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 보는 얼굴처럼 낯설었다. 나도 모르게 구석 자리를 찾아 숨듯이 앉았다. G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누구인지, 애인인지, 남편인지, 친구인지, 일 때문에 만난 사람인지 추측할 수 없었다. 나는 그토록 빛나던 G의 얼굴에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늘이 드리우고, 미간이 좁아질 수 있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습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그런 날이 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얼굴의 전혀 다른 표정을 보게 되는 날. 잘못한 것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잘못한 것만 같은 날. 공기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날. 내가 아는 얼굴들, 그리고 나를 아는 얼굴들을 떠올려 보게 되는 날. 대관절 아는 얼굴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때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방식으로 상처를 받는다. 내가 쌓아올리고 내가 무너뜨린 환상 때문에 얻은 상처. 상처라고 할 수도 없는 상처다.
G가 나를 보기 전에 카페를 나왔다. 허둥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이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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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