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지혜의 사적인서점
열어 보니 어때요?
그러니까 계속해보겠습니다
나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땡스북스에서 일하던 무렵, 고등학교 축구부 선생님으로부터 축구부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는 일을 의뢰받았다. (2018. 05. 04)
사람들이 책을 안 읽으니까, 책 팔아서 남는 돈이 너무 적으니까… 서점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냥 하고 싶으니까’라는 아주 단순하고 강력한 마음 앞에서 그 모든 이유들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점을 꾸려가는 일도 비슷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는 일. 그러니까 계속해보겠습니다.
서점 주인에 대한 오해 1
“하루에 몇 명 정도 상담을 하시나요?”
책처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럼 나는 상담을 매일 하는 것은 아니고, 매주 금요일과 일요일에만 하루 세 명씩, 한 주에 여섯 명을 상담을 한다고 대답한다(물론 나 외에도 스케줄에 따라 유동적으로 활동하는 두어 명의 책처방사가 더 있다). 상대방은 예상을 밑도는 숫자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곧바로 추가 질문이 따라온다. “그럼 상담하지 않는 날에는 뭘 하세요?”
“상담이 없는 날에는 처방할 책을 고르고, 읽고, 편지를 쓰고, 포장해서 배송하는 작업을 해요. 그리고…입점 문의나 이벤트 제안 메일에 답장을 보내고, 새로 나온 책을 검토해 주문하고, 책이 입고되면 서가 진열을 바꾸고, 소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입고 소식을 알리고, 책을 판매하고, 정산하고, 반품하고, 비품 재고를 파악하고, 사이사이 워크숍이나 북토크도 진행하는데 기획부터 섭외, 홍보 및 모객, 진행까지 모두 담당하고요. 아, 맞다! 매일 청소도 해야 해요”라고 대답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일일이 설명하는 게 귀찮아서 그냥 “이것저것요” 하고 얼버무리고 만다.
대답을 들은 이들은 마냥 부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아마도 손님이 없는 서점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서점을 열기 전까지는 자영업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회사원 시절에는 나도 개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작은 서점이나 카페는 일터가 아니라 안식처라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어떤 느낌일까, 하고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강물 위에서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의 모습이라는걸. 실은 물 밑에서 두 다리를 버둥버둥 거리며 헤엄치고 있다는 걸 말이다.
서점 주인에 대한 오해 2
“여기 있는 책들, 다 읽어 보신 거예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그럴 리가요.” 사적인서점의 서가에 꽂힌 책들은 대략 700권 정도. 파는 책을 제외하고 책처방을 위해 갖고 있는 개인 도서까지 합치면 천 권을 훌쩍 넘기는 양이다. 다른 서점의 장서량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지만, 그렇다고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숫자도 아니다. 한때는 나도 ‘읽어본 책만 파는’ 서점 주인이 되겠다며 자신했었다. 그것이 얼마나 호기로운 장담이었는지는 서점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올 때마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새로 들어온 책을 찾아야 하는 서점이라니!)
책처방 프로그램만큼은 직접 읽어본 책만 권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지금까지 지켜나가고 있지만, 그것 역시 쉽지는 않다. 한 권의 책을 처방하기 위해 서너 권의 후보를 추려 읽어야 하고, 그러는 사이사이 새로 입고된 신간을 읽고 소개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 습관 탓에 도서관을 이용하기가 어려워, 서점에서 버는 돈의 3분의 1 이상을 도서 구입비로 쓰고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책을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사서 보려고 서점 주인이 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책상 위에도 침대 맡에도 읽다 만 책들이 수북이 쌓여 서점과 집을 잠식해나가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서점 주인을 꿈꾸기 마련이다. 그들은 나에게 말한다. 좋아하는 책을 맘껏 읽으면서 돈까지 벌 수 있으니 부럽다고. 하지만 꿈을 이뤘다는 설렘은 아주 잠깐일 뿐이다.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집과 서점을 오가며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일상이 마냥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게다가 해야 할 일은 얼마나 많은지, 하루에도 수백 권씩 출간되는 신간 사이에서 판매할 책을 엄선해 골라야 하는 건 기본이고, 신간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책을 발굴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입고한 책들을 전부 읽지는 못하더라도 대강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어야 완성도 높은 서가를 구성할 수 있다. 그 책임감이 나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가끔은 너무 버겁기도 하다. 나에게 서점을 꾸려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고 반짝반짝하는 ‘꿈’이 아니라 매일매일 번잡스럽고 지난한 과정을 견뎌내야 하는 ‘현실’을 의미했다.
“꿈을 이루느니 어쩌니 하지만, 하루하루는 정말 소박하게 지나간다. 준비, 청소, 육체노동, 피로와의 전쟁. 앞날에 대한 고민과의 격투. 짜증 나고 사소한 일은 최대한 흘려버리고 좋은 일만 생각하고, 예상치 못하게 바쁜 날을 기대하지 않도록 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라디오에 좋은 채널이 없으면, 내 손으로 CD를 편집해서 틀기도 하고, 귀찮아도 설거지는 꼼꼼하게 하고. 마 행주는 하얗게 청결을 유지하고. 얼음은 조금 넉넉하게 주문해서 잡내가 배지 않도록 관리하고. “보통 빙수는 없나? 딸기 빙수 같은 거 말이야.” 손님이 그렇게 백 번을 물어도 “죄송해요. 그 빙수는 우리 가게에 없어요.” 하면서 백 번을 웃는다. 언제나 그런 자잘한 일에 쫓길 뿐이다. 내 경우에는 그것이, 흔히 꿈을 이뤘다고 하는 말의 전모였다. 나는 가장 더운 시간은 피해서 점심때와 해질 무렵을 중심으로 가게 문을 열었지만, 그래도 에어컨 없이 어둡고 좁은 장소에 갇혀 얼음을 계속 갈아 대는 일은 아주 소박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박함 너머에 있는 것을 줄곧 바라보았다.”
- 『바다의 뚜껑』 , 30-31쪽
나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땡스북스에서 일하던 무렵, 고등학교 축구부 선생님으로부터 축구부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는 일을 의뢰받았다. 선생님은 축구부 아이들이 다른 무엇보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현실적으로 축구를 계속할 수 있는 아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이들에게 축구 외에도 다양한 길이 있음을 책을 통해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축구부 아이들을 위한 도서 목록을 정리하면서 처음으로 내가 고른 책 한 권의 무게를 생각했다. 이 한 권의 책이 아이들의 인생에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 권 한 권 허투루 고를 수가 없었다. 내가 고른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 내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 너머에는 그런 단단한 믿음이 있다. 번잡스럽고 지난한 과정 너머에 있는 것. 그것을 믿기에 나는 오늘도 서점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 그동안 <정지혜의 사적인서점>을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젠, 홍대입구 사적인서점, 또는 인스타그램에서 만나요. 곧 단행본도 나올 예정입니다.
//www.instagram.com/sajeokinboo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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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