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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그릇

마음은 변신의 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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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작아 아주 조금으로도 금방 채워지는 그릇. 그런데 뭘 그렇게 더 갖겠다고 손해 보지 않겠다고 남겨 보겠다고 버둥거린 걸까. (2018. 05. 03)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소소한 걱정이 쌓여 조그만 불행이 된다. 조그만 불행이 모여 묵직한 불행으로 바뀐다. 이것은 다시 커다란 불행이 되고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으로 변한다. 마음은 변신의 귀재다. 언제라도 모양을 바꾸고, 부피를 늘리고 줄일 수 있다.


 내 소소한 걱정거리와 크고 작은 불만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겠다고(잔인한 취미) 공책을 펼쳤다. 불안의 원인을 찾고 원하는 일과 원치 않는 일의 세부 항목을 늘어놓으며 남편에 대한 불만까지 곁들이니 금세 두 페이지가 찼다. 정좌하고 읽어보니 한숨이 나왔다. 이토록 불행한 사람이 바로 나라니! 자기연민으로 가득 차 창문을 닫고, 방에 처박혔다. 

 

 다음 날 오후. 파김치처럼 시든 얼굴을 해서 뉴스를 보던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항공회사의 딸들 이야기다. 큰딸은 승무원이 땅콩껍질을 까주지 않는다고, 이미 출발한 비행기를 회항시키며 여의주를 잃은 용처럼 분노했다(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만큼이나 인상적이지 않은가!). 작은딸은 광고대행사 직원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음료를 끼얹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음성파일을 들어보니, 세상에! 그녀는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사람이 언어를 가진 것은 축복이다. 말로 소통할 수 있기에 우리는 상대를 깨물고 할퀴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전할 수 있다. 그녀는 왜 소통하려는 노력 없이 악에 바쳐, 목이 쉬도록 울부짖는단 말인가? 마치 몇 달 금식한 사람처럼, 1년 동안 취미생활을 하지 못한 사람처럼, 3년 동안 친구를 사귀지 못한 사람처럼, 평생토록 사랑 받지 못한 사람처럼! 저럴 일이 아닌데, 정말이지 저럴 일이 아니다. 나는 한 불행한 인간의 전형을 보았다.

 

 텔레비전을 끄고, 남편과 서울 나들이를 갔다. 서점에 가서 다섯 권의 책을 샀다. 미용실에 들러 남편이 머리를 다듬는 모습을 구경했다. 미용사의 가위질에 짧은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졌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미용사의 자세가 검술인 듯 우아했다. 새로 깎은 풀처럼 산뜻해진 남편과 이파리가 작게 돋아난 나무들을 구경하며 산책했다. 우리는 조그만 돌멩이 둘처럼 씩씩하게, 광화문을 걸었다. 거리 인파에 섞여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왠지 좋았다. 익명으로 흔들흔들 걸을 수 있는, 이 평범함이 기뻤다. ‘갑질’로 유명해진 두 자매 덕분이다. 돈이 많아도, 큰 집에 살아도, 아무리 부와 명성을 가진다 해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단언컨대 행복은 가진 것에 비례하지 않는다. 시인 김수영의 말처럼 모래에게 물어볼 일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외출에서 돌아와 작은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선배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조금도 떨리지 않더라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다. 힘들지만 일을 하고 돈을 번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어서였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다. 부모에게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보낼 수 있어 행복하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다. 아직은 일이 좋다고, 몸이 상하고 지쳐있지만 할 수 있는 게 있고 사랑을 주고 뭔가를 해줄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선배는 속이 비어가는 과일 같았다. 충분히 아름답지만, 자기 안쪽의 텅 빈 방은 생각지 않고 퍼주는 일에 시간을 쓰는 사람. 저 그릇은 너무 커서, 나는 밖에서도 안에서도 끝내 다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 나는 작은 그릇이다. 작고 작아 아주 조금으로도 금방 채워지는 그릇. 그런데 뭘 그렇게 더 갖겠다고 손해 보지 않겠다고 남겨 보겠다고 버둥거린 걸까. 잴 공간도 없는데 커다란 자를 가지고 와서 이리 재고 저리 쟀던 걸까. 이제 작은 것만 바라자. 작게 얻어도 충분하고, 잃어도 원래 그릇이 작았으니 크게 잃은 건 없다고, 나를 타일러야지.
 
 문구용 칼을 들고, 방문을 잠갔다. 몰래 치부를 도려내려는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다. 공책을 펼쳐 어제의 투정, 불만, 욕심, 불안, 손해 보지 않으려던 삿된 마음을 살살 베어냈다. 다른 페이지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도려낸 페이지를 잘게 찢어 쓰레기통 깊숙한 곳에다 버렸다. 공책 중간에 나무를 벤 자리처럼 삐죽, 그루터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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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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