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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델피에게 스미는 봄
영화 <해피 어게인>
네 주인공만 아플까.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아픔에 빠져 있기보다 타인의 아픔을 위무하며 함께 나누는 키린에게 더욱 빠져든다. (2018. 04. 05)
영화 <해피 어게인>의 한 장면
배우를 따라가면서 보는 영화의 재미는 색다르다. 영화가 ‘이야기’라고 하면 그것은 ‘소설’이나 ‘만화’를 이기기 어려울지 모른다, 영화가 ‘영상’이라고 하면 그것은 ‘광고’나 ‘사진 다큐’를 이기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런데 영화가 ‘배우 예술’이라고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해피 어게인> 에서 50대가 막 된 배우 줄리 델피를 보았다. <비포 선라이즈>의 20대 줄리 델피, <비포 선셋>의 30대 줄리 델피, <비포 미드나잇>의 40대 줄리 델피를 따라가며 본 나에게 그저 이 배우는 아름답다. 여전히 속살거리는 말투, 그러나 간지럽거나 수다스럽다는 느낌보다는 정직하게 자기 표현을 하는 것으로 비치는 연기는 예나 지금이나 흐뭇하다.
<해피 어게인> 에서 J. K. 시몬스는 ‘깜놀’이다. <위플래쉬>의 광적인 완벽주의자 교수 플렛처를 떠올리면, 정말이다. 저렇게 나약할 정도로 순한 얼굴을 가진 배우였던가.
여전히 사랑스러운 줄리 델피와 대변신의 J. K. 시몬스가 연기한 <해피 어게인> 의 프랑스어 교사 ‘키린’과 수학 교사 ‘빌’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조금씩 친해진다. 병이 발견된 지 61일 만에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지쳐 아들 ‘웨스’와 집에서 멀리 떠나온 빌은 우울증 상태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은 교사로, 아들은 같은 학교 학생으로.
불임을 이유로 이혼한 상처를 안고 모든 학생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키린의 자상함과 유머를 좋아하면서도 빌은 그 호감을 자신의 것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은 아내와 여전히 현실에서 동거하는 상태였으므로.
여기에 변수가 생긴다. 아버지의 상태를 눈치 보며 내색하지 못한 아들 웨스는 빌의 우울증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입을 열고 만다. “근데 엄마가 이렇게 살길 바랄 것 같아요?”라며 “잘 들어요, 아빠, 엄마는 죽었어요. 살기 싫은 거면 그냥 확 죽어버리라고요.” 이렇게 독한 말은 표정을 제거하고 들으면 안 된다. 서러움과 안타까움에 포효하는 얼굴을 봐야 한다.
아들 웨스에게도 새로운 학교 생활은 사실 녹록지 않았다. 운동을 해야만 하는 학교 규칙에 따라 크로스컨트리 반에서 활동하지만 첫 달리기를 하고서는 모든 걸 토해낼 정도다. 은근히 무리가 나뉜 친구들 사이에서 서걱거릴 때도 있다. 프랑스어 수업을 같이 듣는 여학생 ‘레이시’를 좋아하지만, 레이시 또한 불화화는 집안 환경에서 끊임없이 면도칼로 자해하는 아픔이 있다.
아내 잃은 빌도 이혼한 키린도 엄마 잃고 전학한 웨스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레이시도,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모두 멀쩡해 보이지만 깊게 아팠던 것이다.
영화 <해피 어게인>의 한 장면
<해피 어게인> 의 네 주인공만 아플까.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아픔에 빠져 있기보다 타인의 아픔을 위무하며 함께 나누는 키린에게 더욱 빠져든다. 이 연기는 줄리 델피만이 가능했을 것만 같을 정도였다. 꾸밈없고 까다롭지 않으나 섬세한 여성의 모습이 배우의 정체성에 녹아들었다.
레이시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고, 웨스에게 다정하며, 무엇보다 빌에게 적극적이면서도 사려깊게 대하는 것은, 아픔을 뛰어넘는 고결한 태도의 증표다. 나도 아프다, 그래서 당신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고결함.
바로 이 태도 덕분에 영화는 종국에 ‘해피 어게인’의 정서를 획득한다. 자동차의 조수석이 거꾸로 매달려 있으면 어떤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질주하는 빌과 키린, 웨스와 레이시의 웃음은 아픔을 품었던 사람의 것이라서 더욱 빛난다.
<해피 어게인> 의 원제는 ‘독신남’이란 뜻의 <The Bachelors>다. 만약 한국에서 원제의 뜻 그대로 개봉했다면 사뭇 다른 영화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다. 가족이 해체되어 ‘독신남’이 된 아버지와 아들의 분투기 정도로. 한국 개봉작 제목 때문에 이 영화는 순하고 살짝 단조로운 이야기 라인을 갖게 된 듯도 보인다.
봄이니까 순해도 좋다. 줄리 델피에게 스민 봄 같은 따스함이 관객에게 전달되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