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거울 속의 거울

상담을 하며 보내는 시간을 점점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정말 훌륭한 상담이란 뭘까를 말과 이야기로는 절대 다 보여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2018. 04. 04)

메인.jpg

          언스플래쉬

 

 

내 이름을 걸고 작은 의원을 연 지 두 달째다. 개원하고 처음 한 달은 무척 불안했다. 남들 다 한다는 인터넷 광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병원 홈페이지조차 없어서 ‘과연 누가 나를 찾아와줄까’ 하며 걱정했다. 그전에 큰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환자를 한 명 보든 백 명을 보든 월급은 꼬박꼬박 나왔고, 전기료나 병원 관리비를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독립해서 진료하다보니 ‘환자가 적어서 임대료와 직원 월급도 못 주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상상이 불쑥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운이 좋은지, 얼마 전부터 ‘망하지는 않겠구나’ 하고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면 나를 찾는 분이 꾸준히 있겠지’라는 믿음도 강해졌다. 의사도 생활인인지라, 적자 걱정에서 벗어나니 진료라는 본질에 더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다 보니 상담을 하며 보내는 시간을 점점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즐긴다는 표현을 써서 환자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만큼 내가 상담에 더 몰입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즐거움을 넘어 감동을 느낄 때도 많아졌다. “환자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의사 자신이 감동을 느낀다니 그게 말이 되냐!”고 언짢아하실 분도 있겠지만... 한 세션이 끝났을 때 벅차오르는 듯한 감정이 느껴질 때가 분명히 있다. 고통을 해결해주지도 못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내담자에게 선명한 길을 보여주지도 못 했는데, 뭐라 표현하기 힘든 벅차오름을 그가 느꼈다는 것이 전해질 때가 있다. 무슨 거창한 해석을 내놓은 것도 아닌데 환자 스스로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모든 환자에게 다 적용할 수 있는, 또 모든 치료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일정한 치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는 환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든 일단 따라가 보는 게 중요하다. 그의 이야기를 이런 저런 각도에서 살펴보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로에게 비춰주다 보면 어느 순간 ‘이거구나’ 하는 게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과연 상담이란 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효과를 발휘하는 걸까? 오서독스한 정신분석이든 카운슬링이나 코칭이든, 그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면, 그게 도대체 어떤 기전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건 심리 전공자라면 누구나 궁금해 하는 주제다. 나도 그렇다. 언젠가 꼭 책으로 엮고 싶은 것도 “무엇이 우리 마음을 치유하는가”이다. 이미 잘 알려진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내용이 아니라, 어떤 두 사람의 만남이 치유적일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요리로 치자면 잘 알려주는 레시피가 아니라, 셰프가 몰래 쓰는 조미료를 밝혀내 보고 싶은 것이고.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 일으키는 긍정적 변화를 포착해내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고, 그 무엇을 깨닫게 되어도 말로 이야기해낼 자신이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정말 훌륭한 상담이란 뭘까를 말과 이야기로는 절대 다 보여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폴 데스몬드와 게리 멀리건의 「Two of a Mind」 를 듣다가 ‘아 어쩌면 의사와 환자가 나누는 치유적인 대화란 이런 음악일지도 모르겠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두 대의 색소폰이 대등하게 음을 주고받으며 음악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한 시간짜리 상담을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클라이막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흥분을 시키는 것도 아니다. 슬쩍 슬쩍 음을 던지면, 다른 한 대의 색소폰이 뚜르르 하고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한 대의 색소폰이 독백처럼 길게 음을 늘어놓으면 다른 색소폰이 아무 소리도 없이 기다려준다. 그러다 이게 정말 끝인가, 하며 여운을 남기고 음악은 닫혀 버린다. 뚜렷한 결론이나 매듭도 없지만 다 듣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두 대의 색소폰은 정해진 악보대로 규칙을 따라 가는 게 아니라, 언제 솔로 연주를 시작해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뒤에서 받쳐주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듯했다.

 

 

1339058367_1.jpg

 

 

한 시간 상담으로 묵직한 전율이 느껴질 때는 아르보 패르트(Arvo Part)의 「Spielgel im Spiegel」에 흐르는 피아노와 첼로 소리가 연상된다. 흐느끼는 첼로와 그런 첼로의 울림에 보조를 맞추는 피아노. 피아노는 첼로가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뒤를 따른다. 절대로 앞지르는 법이 없다. 다그치지도 않는다. 몰아가지도 않는다. 나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나 첼로는 환자, 피아노는 의사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과연 나는 내 진료실에 앉아 「Spiegel im Spiegle」의 피아노처럼 연주하고 있을까, 하고 내 모습을 떠올려 보곤 한다. 과연 나는 제대로 의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음악이 바로 이 「거울 속의 거울」 이다.

 

 

1.jpg

 

 

치유는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켜놓겠다는 목표 지점에 도달했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 그 자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치유는 어떤 목적을 갖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풍부하고 활발한 화학작용이 일어날 때 생기는 부산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러니 우리가 고달픈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나를 무엇인가로 바꿔놓으려 목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이야기의 목격자가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겁니다. ( 『당신이라는 안정제』  중에서)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오늘의 책

트럼프의 귀환,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거머쥔 트럼프. 글로벌 무역 질서를 뒤흔들 트럼프 2기 정부의 명암과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국제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박종훈 저자의 신간이다. 강경한 슈퍼 트럼프의 시대에 직면한 대한민국이 어떠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지 그 전략을 제시한다.

이래도 안 읽으실 건가요

텍스트 힙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독서가 우리 삶에 필요해서다. 일본 뇌과학계 권위자가 뇌과학으로 입증하는 독서 예찬론. 책을 읽으면 뇌가 깨어난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해력이 상승하며 즐겁기까지 하다. 책의 장르는 상관 없다. 어떤 책이든 일단 읽으면 삶이 윤택해진다.

죽음을 부르는 저주받은 소설

출간 즉시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 관련 영상을 제작하려 하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소설 『밤이 끝나는 곳』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이 함께 떠난 크루즈 여행 중 숨겨진 진실과 사라진 작가의 그림자가 서서히 밝혀진다.

우리 아이 영어 공부, 이렇게만 하세요!

영어교육 전문가이자 유튜브 <교집합 스튜디오> 멘토 권태형 소장의 첫 영어 자녀 교육서. 다년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 영어 교육의 현실과 아이들의 다양한 학습 성향에 맞는 영어 학습법을 제시한다. 학부모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과 실천 방안을 담았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