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덕질의 나날
쌓은 덕이 산을 이루었다
서버를 증설했다는데 영 불안하다. 58분인데 창이 열리지 않는다. 잽싸게 새로고침을 누르고 크롬으로 하나 더 창을 연다. 5분, 10분,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2018. 03. 27)
회사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면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다. 그러나 대체로 콘서트 예매하는 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저녁 8시 모 아이돌 그룹 콘서트 티켓팅이 있었다. 친구가 팬이라, 7시 45분 마시던 술잔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PC방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다가 도중에 일어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다. 요즘 제일 핫하다는 그룹의 단독콘서트는 가정용 랜선으로는 감당이 안 될 일이라 PC방으로 간 거다.
얼마 만에 와본 PC방인지 모르겠다. 기웃기웃 PC방 입구를 어색하게 힐끔거린다. 술도 살짝 취했겠다, 호기롭게 두 자리를 달라고 했더니 알바 하는 분이 무심하게 "저기 무인기에서 결제하시면 돼요"한다. 까짓 거 무인기야 자주 쓰는 거니까, 자신 있게 결제를 하려는데 아무리 긁어도 카드를 인식하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지나가던 알바분이 툭 한마디 던졌다. "카드를 꽂으세요" 시간은 7시 50분. 티켓팅은 8시부터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드디어 친구가 결제에 성공했다. 524번. 다시 다음자리를 결제하려는데 둘 다 걱정이 태산이다. "연이은 자리가 아니면 어쩌지?" 걱정이 무색하게 다음자리는 525번이다.
자, 이제 표를 들고 자리를 찾아 나서는데 아무리 찾아도 넓은 PC방 어디에도 524번, 525번 자리가 없다. 한 층 더 내려가야 하나? 이제 티켓팅 시간은 7분이 남았다. 고등학생들이 가득한 자리 사이를 비집으며 500번대 자리를 찾다가 포기하고 카운터에 가서 물었다.
"500번 대 자리가 어디에요? 오 여기 떡볶이도 팔아!"
PC방에서 짜장 떡볶이도 판다. 분식집인지 PC방인지 알 수가 없다. 잠시 티켓팅이라는 과업을 잊을 뻔했다. 알바하는 분이 위아래로 우리를 훑어보며 "아무데나 앉아서 그 번호를 입력하시는 거예요"한다. 아, 그렇구나. 아무 자리나 앉아본다. 그런데 바로 뒷자리에서도 같은 콘서트 티켓팅을 시도하고 있다. 괜한 경쟁심이 치솟는다. 지금이야 사그라진 열정이지만, 왕년에 쌓은 덕이 산을 이루었다. 다년간의 덕질로 갈고 닦은 티켓팅 실력을 보여주리라 결심한다.
어느 한때 영혼으로 흔들었던 응원봉
그런데 애초에 PC방 컴퓨터는 어떻게 켜는 건가. 오, 모니터가 커브다. 좋다. 감탄하는 동안 그래도 나보다는 어린 친구라 다행히 컴퓨터를 켜는 법을 찾아내었다. 그런데 이 525번을 어디에 입력하라는 건가. 한참을 헤맨 끝에 번호를 넣었다. 마침내 컴퓨터가 켜졌다. 얼른 티켓팅을 시도한다. 시간이 4분 남았다. 슬슬 미쳐버릴 것 같다.
서버를 증설했다는데 영 불안하다. 58분인데 창이 열리지 않는다. 잽싸게 새로고침을 누르고 크롬으로 하나 더 창을 연다. 5분, 10분,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여기 PC방은 랜선이 별로인가, 차라리 기업 랜선을 쓰는 회사 컴퓨터가 나았으려나. 이 그룹의 팬은 대체 몇 명인 거야. 내 아이돌 콘서트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온갖 생각이 머리를 휘감는데 그 순간 창이 열렸다. 클릭클릭클릭. 으아아아, 창이 또 열리지 않는다. 숨이 턱턱 막힌다. 옆자리 친구가 그 순간 소리친다. 열렸단다. 손톱을 쥐어뜯으며 창이 넘어가길 기다린다. 왜 안열려 왜 안열려. 뒷자리도 마찬가지다. 티켓팅은 무통장입금이 기본이다. 카드결제창 따위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 8시 17분 초조하게 친구는 손을 모아 잡고 있고, 나는 F5를 계속 누르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주가 폭발했다.
예매 성공.
옆에 누가 있거나 말거나 소리를 깩 지르며 손을 모아 잡고 등을 때리고 꽉꽉거렸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친구와 나를 쳐다본다. 돈이 많았으면 골든벨이라도 울려 드리련만. 끽끽꺅꺅 원숭이 같은 소리로 기쁨을 표현하며 가방, 책상, 상대의 팔뚝을 마구 쳤다. 뒷자리분들은 아직도 새로고침 중이다. 괜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친구는 성취감에 자아대폭발 상태다. 우리는 미련없이 시간이 남은 PC방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기양양하게 승리의 맥주를 먹으러 갔다.
PC방 신기하군요.
*그동안 <고여주의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를 애독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합니다.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라는 변명 아래 책과 전자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작년부터 알코올 알러지를 앓고 있는데 개가 똥 알러지 같은 소리라는 핀잔만 듣고 있습니다. 고양이 4마리, 개 1마리와 살며 책에 관한 온갖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