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옷, 내가 머무는 작은 공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편한 옷’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결국 행복은 가볍고 따뜻한 스웨터를 입고 가끔 창밖을 바라보며, 책을 읽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후엔 편안한 스웨터를 입고 카페에 나가 책을 읽어야겠다. (2018. 03. 22)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옷장에 좋아하는 옷이 생겼다. 내가 ‘생겼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전에는 좋아하는 옷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옷을 많이 사고 입어왔으면서, 좋아하는 옷이 없다니! 오랫동안 나는 옷을 귀하게 여겨본 적도, 아껴본 적도 없다. 옷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내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입고 즐거워하며, 사랑할 줄을 몰랐다.

 

20대 때, 거울 앞에서 나를 보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내가 아니라, ‘나를 보는 남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냉정하고 집요했다. 내 옆구리에 붙은 군살을 보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찾아내고, 유행이 지난 셔츠나 바지를 비난했다. 그 눈은 아량이라곤 한 점도 없어서 내가 어떤 옷을 입든지 늘 한 가지 이상을 지적했다. 그 눈은 거울 앞에서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내가 스스로의 모습을 싫어한 건 아니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나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그게 신경 쓰였다. 나는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어 작은 키를 보완하려 했다. 옷장을 뒤져 최대한 날씬해 보이는 옷을 찾았다.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화려한 색의 옷을 입어보기도 하고, 유행하는 아이템을 어울리지 않는 옷과 매치해 보기도 했다. 체계 없이 옷을 샀으니 취향이 서지 않았다. 오래도록 내 스타일을 찾지 못했다. 이따금 친구들이 ‘특이하게 옷을 입는다’고 놀렸다. 어떤 옷이 내게 어울리는지, 나를 편안하게 하는지, 무엇보다 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나는 내 옷들과 나눌 말이 없는데 한 자리에 앉은 사람들처럼 서먹했다.
 
“멋 부리는 것도 예전 일이지. 요새는 편한 옷이 제일 좋더라.”

 

며칠 전 만난 친구는 느슨하게 짜인 가디건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편안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편한 옷’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더 이상 예전처럼 하이힐을 자주 신지 않는 이유, 몸의 윤곽을 도드라지게 하는 옷을 입지 않는 이유, 유행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사들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격식을 차려 입고 출퇴근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이제 남들 눈에 예뻐 보이려 애쓰지 않기 때문일 수도, 전보다 체중이 늘었기 때문일 수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나이가 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우리는 말하고 웃었다.

 

이제 나는 좋은 옷이란 ‘견고하고 우아하며 스스로를 편하게 해주는 옷’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와 궁합이 맞는 옷, ‘내가 좋아하는 옷’이 좋은 옷이다.


“결국 옷은 내가 머무는 가장 작은 공간이잖아?”

 

옷을 ‘공간’으로 해석하는 친구의 발상에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를 온전히 담고 있는 작은 공간, ‘나만이 머무는 작은 방’으로서 옷은 얼마나 특별한가? 옷 안에서 내 몸과 정신은 날마다 하루를, 같이, 사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가볍고 따뜻한 스웨터를 입고 가끔 창밖을 바라보며, 책을 읽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후엔 편안한 스웨터를 입고 카페에 나가 책을 읽어야겠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오늘의 책

단어들을 굴려 만든 이야기엔 그의 시선이

이적의 첫 산문집. 어느 단어에서 시작된 단단한 단편들이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도, 울림을 주기도 한다. 시와 소설 같기도 한 이야기들은 그의 음악을 닮았다. 적정한 때에 숨을 고를 수 있는 유머와 우리의 인생의 편린들이 떠오르는. 한 편씩 음미하듯 읽게 되는 이적의 단어들.

우리를 구원할 다정하고 아름다운 소설

백수린 소설가가 등단 12년 만에 펴내는 첫 장편소설.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다시 대면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한 사람의 성장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누구보다 구원받고 싶었던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해 내는 이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큰 용기가 되어줄 수도.

문화와 마음에 대한 현대 진화론의 답

인간은 다른 종과 무엇이 그토록 다를까?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진화생물학과 교수인 저자는 그 답을 문화에서 찾고, 마음과 문화의 서로 되먹임에 주목한다. 나아가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결합해 인간이 된다는 것에 대한 의문을 현대 진화론의 관점에서 답한다.

생각에 관한 필수 지식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며 살아야 즐겁고 성공할 수 있다. 생각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뇌와 몸의 작동 방식을 알면 좋다. 인지심리학, 인지과학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한 이유다. 기억, 집중력, 언어와 사고, 개념과 범주, 인지 편향 등 근사한 통찰로 가득하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