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보기 싫어요
귀로도 듣고, 눈으로도 보게 될 줄 몰랐다. 한국어
극지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바람이 있다. 머리카락을 죄 뽑아버릴 것 같고, 내 몸을 흔들어 관절을 꺾을 것 같은, 그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땅끝에 와 있구나'가 절로 느껴지는 바람. 타이완 섬의 최남단 컨딩으로 가는 길, 이 바람을 만났으니 누구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닌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와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 하면 사람 좀 피해보고 싶어서였다. 가오슝과 한국을 오가는 직항이 생겨서인지, 아니면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을 피하려고 했는지 도심 곳곳에서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래서야 외국에 있는 기분이 들지 않잖아.' 그런 이유로 100km를 달려 컨딩으로 향했다. 하지만 웬걸. 해남 땅끝마을만큼 멀고 해변 옆에 원자력 발전소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이 시골 마을에도 한국어가 들린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는 컨딩에서 2박 3일을 머물렀다. 한 달씩 머무르는 여느 도시와 달리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여행자 거리에, 밤에는 야시장으로 변하는 그곳에 숙소를 찾고 짐을 풀었다. '시간이 없어.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봐야 한다'는 조바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국적인 풍경을 원하면서도 결국 한국인이 많이 몰릴 수밖에 없는 동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힘들게 낯선 풍경을 찾아왔지만 주위에 같은 나라 사람뿐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예를 들어 힘들게 타히티 섬까지 왔는데 앞뒤 좌우를 다 둘러봐도 한국인밖에 없다면 말이다.
어떤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그 경험을 이야기하다 보면 “거긴 한국인이 없어서 정말 좋았어요. 동양인은 우리밖에 없었거든요”라면서 맞장구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최고 여행지는 한국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던 그 어디라고 이야기한다. 또 여행 경험 중 나빴던 여행지의 이유로 “한국인이 너무 많아요”가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외국에서 자국민 만나기를 꺼리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사실 우리도 다를 바 없다. 가능하면 우리의 존재를 숨긴 채 조용히 여행하고 싶어 하니까.
<윤식당 2>가 종영을 앞두고 있다. 어떻게들 알았는지 한국인 여행객들은 그 먼 곳까지 찾아왔다. 여행객은 방송임을 알고 식당에 앉았으니 암묵적으로 신상이 노출되는 걸 허락했을 터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프로그램 자체에서 그들의 대화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비춰주지 않는다. 제작진도 여느 여행객과 비슷한 갈등을 품고 있었으리라.
여행의 환상을 채워줄 낯설고도 멋진 풍경을 어렵게 찾았고, 그중에서도 가급적 한국인이 없는 여행지를 선택했는데 익숙한 표정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면 시청자들이 자연스레 채널을 돌리게 될 상황을 방지하고 싶었을 게다. 방송을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한국인이 보기 싫어하는 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망나니라서 싫어요
이 바다의 주인은 바다거북
컨딩을 대체할 만한 여행지가 필요했다. 그 섬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여기서 배를 타면 어디로 가나요? 그리고 거북이 사진은 왜 이리 많은 거죠?"
어쩐 일인지 페리 터미널 주변이 죄다 '바다거북'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쾌속선을 타고 30분을 가면 작은 섬 '류추향(琉球?)'이 나온다. 일본 오키나와를 ‘류쿠’라고 부르는 타이완 사람들은 이 섬을 가리켜 작은 오키나와, 즉 ‘소류쿠’라고 부르는데 그보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섬 주변에 사는 바다거북이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바다거북 섬'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섬 안의 섬을 누가 찾아갈까 싶었는데 이곳은 대만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란다. 반면 대만 남부를 찾는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여행지이다. 물은 맑고, 거북이는 인간 세상과 가까이 있다. 전동 스쿠터를 타고 섬을 일주하는 동안 마주친 이도 몇 없었다. 왠지 이 섬 안에 한국 사람이라고는 그 여자와 나, 단둘뿐인 것 같다.
타인의 행동, 생김새, 인적 사항 등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해외에 나가는 이 순간만이라도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길 갈망하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이 많든 적든 자기 여행을 즐기는 이들은 한국에서도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일 게다.
그 반대의 사람들은 누가 내 여행을 평가할까 두렵고 내 옷차림, 여행지에서 내가 보고 먹고 느끼는 것들을 평가받기 싫어 한국인들이 없는 여행지를 찾아 나선다. 특히나 내가 한 말들을 알아듣는 게 기분이 나쁘다. 잘 못하는 영어, 여행지에서 어리바리한 내 모습을 들킬까 싶어 두려운 건 아닐까.
오래전에 미국인 친구와 스페인의 한 섬을 여행하며 자국민을 여행지에서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뭐, 우리도 비슷한 거 같아.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고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할까? 미국은 자치권을 가진 여러 개의 주가 모여 이루어진 나라야. 거기다 땅도 넓고 각 주마다 법도 다르니 동부에 있다가 서부로 가면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 또 한 가지, 나라가 넓고 안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다양하니까 평생 외국 한 번 나가보지 않고 미국만이 자기 세상의 전부인 사람도 많아.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거지. 너희가 여행하다가 만난 미국인들은 대체로 미국 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일 거야.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문화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사람들 말이야.”
낯선 곳에서 비슷한 문화 코드를 지닌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답답한 외국어를 벗어나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달랠 수 있으니까. 거기에 더해 그곳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웃의 룰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면 함께 여행도 하고 싶어질 게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망나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기 동네에서도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하고 다니거나, 안하무인처럼 행동하며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그들과 같은 나라 사람이라 해도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고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어쩌면 우리가 같은 한국인이라서 싫었던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다른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무법자처럼 행동하는 자국민의 모습이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