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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집이 없어도 괜찮아
삶에는 우열이란 게 없다. 방식이 있을 뿐이다.
이상은 낮아지고 우정은 사치가 되고 잔은 혼자만 드는 시대에서 어떤 이는 비극을 읽겠지만, <소공녀>는 '빈곤 속의 풍요'에 주목한다. 영화 속 한 대목, 미소와 한솔은 미소의 월세방에서 오랜만에 관계를 가지려 한다. (2018. 03. 15)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나의 학창 시절 기억의 뉴런을 형성하는 단위 하나는 ‘청춘물’이다. 중학생 시절에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를 보며 낭만의 대학 생활을 꿈꿨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1989)는 고입을 준비하며 본 영화다. 바닥을 치는 성적 때문에 바닥을 치던 기분이 영화에서 얻은 위안으로 공중부양하는 기분을 느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TV 드라마 <내일은 사랑>(1992~1994)을 즐겨봤다. 학과 공부는 내팽개치고 극 중 이병헌과 고소영과 같은 예쁜 사랑을 하려고 (과장 조금 보태) 하루가 멀다 하고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엇! 이렇게 쓰고 보니 ‘연식’이 드러나 좀 민망한데 (예, 저 40대 중반의 아저씨입니다) 아무튼, 청춘물이 크게 인기를 끌던 시절을 통과하다 보니 대표적인 작품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이상은 높았고 우정은 깊었고 잔은 동등했던 당시 청춘의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 눈앞에 떠오른다. 그림자처럼 뒤를 돌아보면 계속해서 따라오는 형상처럼 청춘물은 나와 친구들의 가장 파릇했던 시절을 소환하는 일종의 거울이다. 어디 나만 그럴까, 시대별로 각 세대를 대표하는 청춘물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의 20~30대가 지금 내 나이가 됐을 때 소환할 청춘물은 어떤 작품이 될까.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 도 한 편의 후보가 될 만하다.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의 <소공녀> 세라는 이제 한국에서 30대가 되어 미소(이솜)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원작 동화에서는 멋진 숙녀가 되는 해피엔딩을 맞이했는데 한국 영화에서는 가진 게 별로 없어 보인다. 친구 집을 전전하며 가사도우미 일로 일당 45,000원을 벌고 이 돈을 아끼려 쌀을 얻는 경우도 있다. 일당을 쪼개 월세를 모으고 세금을 납부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작은 사치라면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몇 대 정도. 옆에 남자 친구 한솔(안재홍)까지 있으니 가진 게 없어도 별로 힘들 걸 모르겠다.
미소가 느끼는 것과 다르게 어떻게 그렇게 사니, 힘들겠다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미소보다 물질적으로 가진 게 많은 친구들이다. 사연인즉 월세가 오르자 미소는 ‘작은 사치’를 포기하는 대신 집을 버린다. 요즘 말로 하면 ‘소확행’, 애당초 가질 수 없는 것을 무리하게 꿈꾸느니 효과가 확실한 잔행복을 추구하겠다는 미소의 삶의 철학이다. 대학 등록금을 대출받아 어렵게 졸업해도 빚을 떠안고 사회로 나와야 하는 젊음은 얼음판 위에 선 스케이트 입문자의 처지다. 어설프게 얼음을 지치고 나가 엉덩방아를 찧고 낙오하느니 가장자리일지라도 두 발로 설 수 있는 지금의 위치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처한 시대의 환경에 따라 해당 세대는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한다. 어떤 세대는 자신들의 생존법이 만병통치약 인양 아래 세대에게 강요하고는 한다. 용기가 없다고, 야망이 부족하다고,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자기자랑을 갈음하여 배설하는 충고는 불안감을 조성해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을 철없는 행동으로 비하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 집을 포기한 자발적 홈리스 미소는 20대 시절 함께 밴드 생활을 했던 친구들의 집을 찾아 잠자리를 해결한다. 그러면서 맞닥뜨린 친구들의 행복의 기준은 음악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외쳤던 청춘 때와는 너무나 달라졌다.
드럼의 대용(이성욱)은 무리한 대출로 아파트를 얻고도 아내와 헤어져 매일을 술로 보낸다. 키보드의 현정(김국희)은 당연한 수순처럼 결혼 생활에 발을 담갔다가 남편과 시부모 뒷바라지에 자기 인생은 증발했다. 기타의 정미(김재화)는 돈 많은 남편에게서 넉넉한 삶을 보상받으려 과거를 숨겨야 하는 처지가 안쓰럽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 등과 같은 기성의 가치에 혹한 친구들에게 미소는 결혼도 안 하고 가정도 없고 자식도 없고 집도 없고 뭐도 없고, 결론은 대책 없는 N포 세대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누구의 삶이 더 가치 있을까. 아니 이런, 기성세대 같은 질문하고는. 삶에는 우열이란 게 없다. 방식이 있을 뿐이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자신 명의의 집은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은 되더라도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월급 450만 원과 일당 4만 5천 원은 액수의 차이로 구분될 뿐 만족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자식의 학원비에 매달 기백 만 원을 들여야 하는 맞벌이 부부에게 450만 원은 생활하기 빠듯한 액수다.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대의 담배에서 위안을 얻는 미소에게 4만 5천 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소공녀> 를 연출한 전고운 감독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미소 캐릭터를 떠올렸다. “집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버리며 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정반대의 인물이 보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집을 버리는 캐릭터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작은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향과 정반대로 사는 인물일지라도 그만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만들어낸 캐릭터다."
내가 학창 시절에 즐겼던 청춘물은 더 많을 것을 누릴 수 있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 경제가 수준급의 위치에 올랐음을 만방에 알린 이벤트였다.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X세대는 여전히 상승 곡선을 타던 경제 발전 속에 과거에 접하지 못했던 온갖 문화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최초의 인류였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노래가 히트할 정도로 모든 게 풍요로웠던 시절이었다.
시대는 변했다. 청년 취업률은 60대 취업률에 미치지 못한다. 보통의 월급쟁이 생활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20년을 모아야 서울 변두리의 20평 정도 아파트 한 채를 겨우 살 수 있는 시대다. 청춘들에게 포기는 일상이 되었다. 이상은 낮아지고 우정은 사치가 되고 잔은 혼자만 드는 시대에서 어떤 이는 비극을 읽겠지만, <소공녀> 는 '빈곤 속의 풍요'에 주목한다. 영화 속 한 대목, 미소와 한솔은 미소의 월세방에서 오랜만에 관계를 가지려 한다. 하지만 난방이 들지 않아 옷을 벗다 추워진 연인은 대신 옷을 입은 채로 포옹을 하며 온기를 나누고 추운 겨울을 이겨내려 한다. 이에 관한 전고운 감독의 말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관통한다. "추운데 같이 사니까 반가워. 함께 잘 버텨보자" <소공녀> 는 그렇게 동시대의 청춘에게 작게 입을 오므린 반달의 '미소'로 위로의 뜻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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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