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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 “아빠 김근태, 먼저 돌다리를 놓으면서 가는 사람”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 기적 같은 남영동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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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 고문 피해자, 라는 면이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잖아요. 말하자면 포스트 트라우마인데요. 그런 게 약간 진절머리 나게 싫은 거예요.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일어서려고 했던 사람이고, 사람을 사랑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이거든요. (2018. 0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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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거기는 따뜻한가요? 등이 시려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던 이곳과는 다른가요? 발걸음은 좀 가벼워졌나요? 이젠 떨리는 손을 슬그머니 붙잡아 숨길 필요 없겠지요? 우리를 보고 있어요? 짝꿍 인재근 엄마가 씩씩하게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나요?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도 보이나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요. 아빠.(5쪽)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된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투옥된다. 2년 10개월의 투옥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다시 1990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간다.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는 김근태가 감옥에 있던 시기에 아내 인재근과 주고 받은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고문 피해자 이전에 실천적 민주주의자였던, 가족을 사랑하는 다감한 사람이었던 인간 김근태의 모습이 편지에 그대로 담겨있다.


“너무 남영동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었던 김병민은 이 편지가 김근태의 다른 면을 알려주게 되기를 바랐다. 저자의 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홀로 고군분투하는 인재근에게 미안하다 진심을 다해 말하고, 남녀차별 문제에 대해 김병준과 김병민에게 긴 편지를 적어 보낸 김근태는 새롭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김근태 아빠, 인재근 엄마). 서로를 친구로 대한다. 김근태는 원한다면 김병준과 김병민이 인병준과 인병민이 될 수도 있다고 자녀들에게 말한다. 여러 의미에서, 이 편지들이 현재의 텍스트로 읽히는 것은 비단 김병민뿐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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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가족들의 이야기


인재근 엄마가 편지 공개를 쑥스러워 하셨다고 했는데요. 책이 나왔잖아요. 반응이 어떻던가요? 여전히 쑥스러워 하세요?

 

의외로 좋아하시더라고요. 좀 쑥스러워 하는 느낌은 여전하죠. 사적인 거라 그런 느낌은 갖고 계신데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족들의 이야기를 알려야겠다는 데에는 공감하고 계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여전히 쑥스러워 하고는 계세요.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와 출간 후의 반응이 달랐나요?


처음의 계획은 인재근 엄마의 편지가 포함되는 게 아니었어요. 김근태 옥중 편지가 다시 세상에 나와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책을 계획한 거였거든요. 그 과정에서 편지를 추리다보니 인재근 엄마의 편지도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인재근 엄마의 편지는 저도 본 적 없던 거예요. 엄마가 편지를 썼었다는 이야기만 알고 있었고, 꼭꼭 숨겨두었던 거거든요. 본 것처럼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본 적은 없었던 거고, 그걸 저도 준비하면서 깨닫게 된 거죠. 마치 구전처럼 알고 있었다는 걸요.(웃음)

 

인재근 엄마는 편지를 다 보관하고 계셨던 거군요.


네, 본인 침대 밑 서랍에서 편지가 나오더라고요.

 

프롤로그 격인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라는 글에서 “인재근 엄마의 편지들을 찾아 읽고 나니 김근태 아빠의 글들이 완성되는 느낌”이라고 했잖아요.


김근태라는 인물이 정말 좋은 사람이고, 이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민주화운동 할 때보다 정치인으로 활동할 때의 평가들이 저는 안타까웠거든요. 우유부단하다든가 대중성이 떨어진다든가 하는 평가들 말이에요. 제가 자라면서 본 걸 떠올리면 특히 대중성이라는 면에서 안타까운 점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번 책도 대중적으로 읽힐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죠. 옥중에서 쓴 편지니까요. 그런데 인재근 엄마의 글이 들어가면서 약간 대중성이 확보되었다고 할까요?(웃음) 평범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누구한테나 해당할 수 있는 가족적 이야기가 완성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엄마의 편지를 보고 하게 됐어요.

 

두 분의 톤이 완전히 다른데요. 거기서 오는 리듬감이 있어요.


아빠는 문어체에 가까운 말을 쓰는데 엄마는 거의 구어체로 쓰잖아요. 실제로도 그랬거든요. 김근태 인생을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김근태에게 다소 부족한 대중성을 가지는 부분이 엄마에게는 있어요. 너무 슬프거나 사색적이거나 시적인 것으로부터 탁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느낌, 그리고 다시 가는 느낌이 엄마의 편지에는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을 좀 채우는 것 같았어요.

 

막상 직접 편지를 보고도 꽤 놀라셨을 것 같아요.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르잖아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우선 엄마 편지가 아빠의 편지보다 더 많았거든요. 왜냐하면 김근태는 옥중에서 쓴 편지라 규격봉투에 일주일에 한 번, 이런 제한이 있었으니까요. 또 가족한테만 보내는 게 아니라 동지들한테도 보내야 하잖아요. 아주 계획적인 분이라(웃음) 수신인을 나눠서 쓰셨는데요. 엄마는 면회도 금지된 상태였으니까 아빠가 편지를 많이 기다릴 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바쁜 와중에도 편지를 많이 쓰셨던 거예요. 새벽에도 쓰시고요.

 

새벽에 쓰다 중단한 편지를 아침에 이어 쓰기도 했어요. 인재근 엄마의 편지는 기록 시간까지 적어두셨더라고요.

 

저도 그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노래 가사라든지 시구도 많이 써서 보냈더라고요. 책에 많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편지를 대체한 유행가 가사 같은 것도 많이 보냈어요.

 

편지가 전부 검열되어야 했으니까 그랬을 것 같기도 하네요.

 

저항시 같은 건 다 까맣게 지워지고 그랬더라고요. 편지 실물을 보면 완전히 달라요. 검열 때문에 지워진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저는 이 편지들이 한 가족의 역사 같은 느낌이면서도 민주화운동을 한 가족들의 얘기라는 생각도 했어요. 워낙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계셨으니까요. 이게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구나, 하고 느꼈죠. 당시 민주화운동 하던 분들의 가족과의 교류가 지금도 있거든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1983년 9월 30일 결성)’을 조직했을 때 아빠 나이가 거의 가장 많았기 때문에 2세들 나이가 대부분 저보다 어려요. 이 편지들을 보면서 그 친구들도 생각하게 됐어요. 편지에 담긴 어린 병민이의 얘기가 모두 동생들의 얘기죠. ‘민청련 2세’라고 하는데요. 동생들의 이야기도 담겨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책으로 편지를 묶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겠죠?


제가 가장 잘 아는 저의 부모님과 제 얘기를 하는 동시에 잊힐 수 있는 민주화운동 가족들의 얘기를 생각하게 됐어요. 책을 만들면서 그런 면을 많이 생각하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고요. 제가 미술사를 전공하고, 전시 쪽 일을 했었어요. 추모 전시를 몇 번 했는데요. 김근태 텍스트를 작가들에게 제공하고, 그것에서 영감을 받도록 하려다 보니까 책이 필요하겠더라고요. 책이 없으니까 자료를 복사하고, 제본 떠서 드려야 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제대로 하려면 책도 만들고,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출판사에서 제안을 해주셔서 만들게 된 거죠.

 

 

포스트 트라우마


저는 딸 김병민의 글이 참 좋더라고요. 흑백사진을 보다가 갑자기 컬러사진이 등장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저자의 글로 전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가슴 아픈 부분이 있어요. 김근태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인데요. 저한테는 정말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였어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그런 면보다는 투사, 고문 피해자, 라는 면이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잖아요. 말하자면 포스트 트라우마인데요. 그런 게 약간 진절머리 나게 싫은 거예요. 제가 아는 그 사람의 진가는 그게 아니니까요.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일어서려고 했던 사람이고, 사람을 사랑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이거든요. 일화가 있거든요. 한 번은 아빠가 택시를 탔는데 합승했던 어린 친구들이 “이근안 씨 아니세요?”라고 했다는 거예요. 너무 충격적이죠. 제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김근태 관련 전시를 준비할 때도 한 가족이 와서 “이 분, 그 분이잖아. 이근안.”이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충격이네요.


물론 이근안 본인이라고 한 게 아니라 이근안과 관련이 있다, 이런 뜻이었지만요. 그런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뭔가 그걸 이겨낼 수 있는 대중적인 텍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많이 생각했어요. 그런 데서 제 글을 시작된 것 같아요.

 

인간적인, 다른 면모를 좀 더 보여주고 싶었군요.


그런데 요즘 또 다시 그게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거예요. 영화 <1987>도 인기고요. 저는 그게 조금 괴로워요. 그 시절을 알리는 데에는 대중적으로 폭발력이 있으니까 좋은 일인데요. 개인적으로는 힘들죠. 기사화 되는 부분도 ‘박종철 열사와 같은 곳에서 당한 김근태’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요. 기사 읽을 때 조금 힘든 부분이 있어요.

 

1호선 남영역에서 보이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에도 못 가봤다.(중략) 어느 날 1호선을 타고 지나가다가 건물과 눈이 마주친 적이 있다. 1초 만에 스쳐 지나갔는데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트라우마의 극복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가 보다.


김근태 아빠가 반인륜적 고문에도 한 번도 정신을 잃지 않고 날짜, 시간, 사람을 기억하고 기록한 이유는 악행의 고리를 끊기 위함이었다. 비인간적인 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시금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고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가까이 갈 생각이다. 좋은 기억만 간직하지 않겠다.(214-215쪽, ‘김병민의 글’)

 

책 후반부에 영화 <남영동 1985>를 아직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적으셨잖아요.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목소리를 내고 전시, 출판 등 여러 활동을 하신다는 점이 중요하게 생각돼요.


사람들이 그런 쪽으로만 연관 짓잖아요. 김근태라는 사람의 삶이 고문 때문에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그것 자체에만 집중되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옳지 않죠.

 

당연히 한 개인에게는 복합적이고 중첩된 면이 있는데 그 사람을 어떤 카테고리에만 두고 한 면만 보는 건 그를 제대로 보는 게 아닐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가족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비극적이고요.


그런데 이걸 하다보니까요. 가족이 먼저 하지 않으면 영원히 잊히거나 그렇게 굳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가족의 역할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일찍 돌아가신 다른 열사 분들도 그렇고요. 제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보니까 예술가도 그런 경우가 많더라고요. 미술사를 전공한 것도 아빠의 영향이 있고, 책을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아빠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숙명처럼(웃음) 저절로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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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텍스트


부모님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게 하고, 김병민을 엄마의 성을 붙여 ‘인병민’으로 부르기도 했던 것을 보고 꽤 놀랐어요. 거기에는 많은 함의가 있잖아요. 두 분은 무엇보다 평등에 대한 의식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저희 집에서 이름 부르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어요. 김근태 아빠, 인재근 엄마, 라는 말이 저한테는 자연스러웠는데요. 이게 우리만의 전통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되더라고요. 아빠는 엄마에게 대해서도 누구의 아내가 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고, 그래서 미안하다는 표현을 말로도 많이 했었어요. 국회의원을 하실 때 ‘사모님 인재근’이 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미안해하셨고요. 지금 저희는 그렇게 아까워하더니 후계자로 만들었다고(웃음) 얘기를 하지만요. 아내가 본인의 이름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그 사랑이 그대로 딸한테도 왔던 거죠. 살면서 부딪치게 될 사회의 남녀차별에 행여 딸이 좌절할까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어렸을 때는 너무 유난이라고 생각도 했었는데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다르더라고요. 아빠가 뭘 걱정하셨는지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이 편지들이 정말 현재의 텍스트로 읽혀요.

 

김근태 아빠의 걱정이 너무 맞아 떨어지는 환경이니까요. 아직도 말이에요.


아빠의 말이 거의 그래요. 정치인으로 살려면 반 보 앞서 가야 하는데 다섯 발자국 정도 빨리 말씀하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복지나 평화도 그렇고요. 5년이나 10년 후 이슈가 되는 말들이었거든요. 그것처럼 여성문제, 남녀차별의 문제도 그랬어요. 저는 호주제 철폐 얘기할 때 ‘새삼스럽게?’ 약간 이런 느낌이었어요. 아빠는 학교나 사회에서는 ‘김병민’으로 사니까 너희가 하고 싶을 때는 ‘인병민’으로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아빠는 ‘인병민’이라고 부르겠다, 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거든요. 우리가 아빠만의 아들, 딸이 아니라고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굉장히 소중할 수밖에 없는 아빠였어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그 보호막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죠.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사랑스럽고, 또 애기들을 귀여워하고 잘 돌봐주기도 하는 병민이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싶어 아빠는 잔뜩 긴장하였다.(중략) 학교와 같이 제도로 되어 있는 곳, 법이 요구하는 때에는 불가피하게 김병민, 김병준으로 하되 자유스러운 곳, 예를 들면 어디 놀러 가서든지, 혹시는 학원이나 교회 같은 곳에 다닐 때 인병준, 인병민이라고 해도 이 아빠는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너희들이 그것을 진실로 헤아리고 마음으로부터 이해하여 그렇게 한다면 나는 매우 자랑스러워할 것이다.(134-137쪽, 김근태의 편지)

 

자신의 냉소주의를 고백하기도 했잖아요. ‘틀렸다 부정하고 싶어졌다. 우리 가족의 삶도 하찮게 느껴졌다’고요. 그리고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 2016년 촛불이 있었어요.


솔직히 너무 놀랐어요. 6월 항쟁은 어렸을 때라 다 기억하진 못해요. 엄마를 따라 농성장에 많이 다녔기 때문에 최루탄 냄새 정도는 기억하는데요. 특히 2011년 아빠가 돌아가시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는 너무 많이 좌절했었어요. 모든 시간이 부정되는 느낌이었죠. 그해 12월이 정말 많이 힘들었었어요. 그 다음에도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정말. 이민을 가겠다, 여기서 아이를 못 낳겠다, 하면서요. 그때 남편이 “너랑 나는 전두환 시절에 태어났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런 식으로 정신없이 지냈었는데요. 아빠의 글 중에 ‘익명의 다수가 마음속에 갖고 있는 민주주의, 평화, 평등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올 때 세상이 바뀐다’고 했던 글이 있었거든요. 2016년 촛불 때 그걸 목격한 거죠.

 

정말 많은 분들이 그랬던 것 같아요.


87년을 겪어본 분들은 그걸 믿었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아이들과 이기적으로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촛불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죠. 이런 거구나, 그렇게 민주화에 헌신했던 분들이 먼저 가셨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너무 슬프죠. 이걸 못 보셨잖아요. 1985년 남영동에 가셔서 1987년에는 감옥에 계셨거든요. 생각해보면 6월 항쟁도 보지 못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도 촛불을 못 보셨잖아요. 이걸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민중들이 일어날 시기에 옆에서 함께 가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먼저 돌다리를 놓으면서 가는 사람이라고, 옆에 없는 걸 자위하게 됐어요. 먼저 가시는 분이구나, 옆에 있을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요즘에 많이 하는 생각이에요. 너무 애달파하지 말자, 이렇게요. 

 

이제 그때의 부모님 나이가 되면서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면들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더 느끼는 것도 있고요.


아기를 낳고 편지들을 읽으니까 달랐어요. 감옥에서 별을 보면서 나의 목소리가 전해지기를 기도하겠다, 고 한 이야기 같은 걸 볼 때 그 감정이 오롯이 나의 아이들을 보면서 살아나는 거예요. 어떤 일을 선택하는 데에 우리가 얼마나 가시 같았을까, 얼마나 가슴 한 켠에 있었을까, 싶은 거죠. 어렸을 때는 우리보다 그 일이 더 중요했겠지, 그냥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민청학련 사건 때 사형 선고를 받고 “영광입니다”라고 얘기해서 아주 유명했던 故김병곤이라는 분이 있어요. 그 분에게 딸이 두 명 있는데요. 어느 글에서 ‘이런 군부독재 시대를 딸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했거든요. 이제는 그런 생각에 대한 공감이 생긴 거죠. 우리도 그런 선택을 하겠다, 이건 아니지만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더 좋은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는 마음에 대해 아이를 낳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받았다, 라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부모님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만큼 우리가 부모님과 보낸 시간은 많지 않았죠.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사랑 받고, 다른 방식으로 보상 받았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거고요. 그런 감정이 아이를 낳은 후에는 더 절실하게 와 닿았어요. 그냥 다른 방식으로 사랑 받았다, 정도가 아니라요. 그 순간, 맨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남영동으로 끌려갔던 그 순간에 우리가 얼마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걱정됐을까, 이런 생각들이 크게 다가와요. 번뇌하고 망설였을 그런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지점이 굉장히 아팠어요.

 

저자가 추억하는 김근태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어요.


굉장히 편안하신 분이죠. 글처럼 말씀도 그렇게 하시는 분이고, 강하게 어필하시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동지들 의견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고 하지 않고 “심정적 동의가 일어나지 않는다”(웃음)라고 에둘러 말씀하는 식인데요. 저한테도 그랬어요. 대학 다닐 때 놀러 다니고 하면 “병민아, 사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도로만 말씀하셨어요. 구구절절 설명 안 하시고요. 말씀이 많진 않았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건 실천하시는 분이었어요. 그러니까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겁죠. 그런 면을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곁에 인재근 엄마가 있었고요.(웃음)


맞아요.(웃음) 아빠의 친구들인데 엄마한테 와서 말을 전해달라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두 분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던 것 같아요. 경찰청에서의 일화가 있어요. 남영동에서 고문당한 직후였는데요. 고문당한 후에 감옥으로 가죠. 감옥에 가면 아주 차가운 곳에서 몸이 다 망가져요. 실제로 하혈도 하고 굉장한 두통에 시달리시고 살도 다 빠지고 그랬거든요. 면회는 못하고요. 그런데 사라진지 20일이 지나면 경찰청으로 송치된다는 걸 엄마가 아시고 그곳에서 2-3일을 진치고 계신 거죠. 거기서 어렵게 만났는데 아빠가 인재근 성격을 아니까 귀에 대고 고문당한 일을 다 말씀하셨어요. 엄마는 뭐든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거고, 실제로 엄마는 열심히 하셨죠. 그 얘기 듣고 바로 그날 기독교회관에 뛰어가셔서 고문 사실을 폭로했고요. 그런 행동력이 있는 걸 아니까 믿고 본인은 정신적인 치유에 애썼던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아빠를 살렸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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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


앞으로 자신의 과제처럼 염두에 두고 있는 일들이 있는 것 같아요. 김근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도 앞으로 계속 할 예정이라고요?


학부에서 역사를,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어요. 아빠가 자료를 정리하거나 자서전을 쓸 틈도 없이 돌아가셨잖아요. 남겨진 자료들을 보면서 내 역할이 이런 것에 있나보다, 생각하게 됐어요. 일부만 알고 있는, 이미지로만 알고 있는 면 외에 다른 모습도 보여줘야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한 거예요. ‘따뜻한 밥상’이라는 추모전을 지난 12월 29일까지 했거든요. 세 번째로 한 추모전인데 하다 보니 점점 발전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김근태 자료만 생각했다가 아내와 가족들 자료로 확대가 됐어요. 사실 민청련 활동을 하신 분들은 다 85년부터 감옥에 끌려가시고 막상 6월 항쟁에 참여하신 분들은 가족들이었거든요. 엄마들이 띠 두르고, 피켓 들고 있는 사진들이 있어요. 그렇게 가족들, 자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든 남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계속 해나갈 예정이에요.

 

여러 목소리, 그 자체가 또한 민주주의잖아요. 사회적으로도 꼭 필요한 일이에요.


아빠 추모전을 준비하다보니 제 이야기가 나오게 되잖아요. 첫 추모전 전시 때는 막 울면서 준비했거든요. 그런데 한 번 활자화되고, 사람들한테 보이게 되니까 많이 해소가 되더라고요. 치유 받는 경험이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제가 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본인이 살았던 얘기가 남겨지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같은 것들이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민청련 2세들과도 엄마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우리도 책을 엮어볼까 하고 얘기 나누고 있어요. 거창하지 않더라도 그런 일을 하나씩 하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차원에서 이 책도 다양하게 해석되면 좋겠네요.


이 책은 남영동에서 나온 이후 감옥에서의 편지들이잖아요. 저는 그 사건보다 김근태라는 사람이 그 이후에 어땠는지 좀 더 알려지길 바라요. 얼마나 본인을 치유하려고 스스로 노력을 많이 했고, 가족들이 거기에 어떻게 힘을 더했는지를 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너무 남영동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저는 박종철 열사의 이야기를 알게 될수록 아빠의 남영동 이후의 삶이 기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성장한 이후 이야기인데요. 어렸을 땐 다시 아빠가 돌아오는 게 당연하다, 이제야 돌아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그런데 다 큰 다음에는 약간 보너스 같은 삶이었다는 걸, 나에게만 찾아온 행운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 시간이 더 소중하고요.

 

사랑이 짙은 책인데요. 특별히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줬으면 하세요?


저는 딱 제 또래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어요. 특히 여성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남녀차별에 관한 이야기도 꽤 있고 그래서요. 김근태와 인재근을 어렴풋이 안다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고요. 너무 무거운 내용, 민주화 운동이나 고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특수한 상황이지만 평범하게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와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나누는 이야기들이니까요. 그런 공통점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근태의 특수한 상황만 너무 부각되는 것 같은데요. 잘 몰랐던 사람들, 젊은 분들이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김병민 저 | 알마
해맑은 웃음과 따뜻한 손을 기억하는 김병준, 김병민 남매는 그런 김근태 아빠에게 받은 ‘무조건’인 사랑을 다시 돌려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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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연선

읽고 씁니다.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

<김병민> 편12,600원(10% + 5%)

보일러공, 민주화운동가 그리고 김근태 아빠… “외롭고 나약했던 시절, 가족을 위해 눈물 흘렸던 아빠를 사랑합니다” 김근태 아빠의 눈물겨운 속삭임 2011년 김근태가 타계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민주주의자’라고 말했다. 또 민주화의 대부, 양심 정치인, 평화주의자, 반(反)신자유주의자로 그를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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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첨단 도시 송도를 배경으로 한 세태 소설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화려한 고층 건물에 살고 있는 중산층부터 그들의 건물이 반짝일 수 있도록 닦아내는 청년 노동자까지 오늘날 한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계층의 서사를 써냈다. 그들의 몸을 통해 욕망과 상처로 얼룩진 저마다의 삶을 복합적으로 표현했다.

사유와 성찰의 회복과 공간의 의미

빈자의 미학' 승효상 건축가가 마지막 과제로 붙든 건축 어휘 '솔스케이프’. 영성의 풍경은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 사유하고 성찰하는 공간의 의미를 묻는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공간이야말로 건축의 본질이기에, 스스로를 어떻게 다듬으며 살 것인가에 대한 그의 여정은 담담한 울림을 선사한다.

당신의 생각이 당신을 만든다.

마인드 셋 전문가 하와이 대저택이 인생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알렌을 만났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집어 들었던 제임스 알렌의 책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담담하게 써 내려갔다. 생각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지는 내면 생각의 힘과 그 실천법을 만나보자.

그림과 인생이 만나는 순간

‘이기주의 스케치’ 채널을 운영하는 이기주의 에세이. 일상의 순간을 담아낸 그림과 글을 통해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소재를 찾는 것부터 선 긋기, 색칠하기까지,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인생이 배어 있다고 말한다. 책을 통해 그림과 인생이 만나는 특별한 순간을 마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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