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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 한 바구니와 소설 한 권, 그리고 고타쓰

『돈 없어도 난 우아한 게 좋아』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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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어도 난 우아한 게 좋아』는 마흔두 살 사카에와 지우의 연애를 그린다. 마흔두 살이라니. 그리고 그들은 돈도 없다. 독자들이 하나도 좋아할 리 없는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이 소설은 몹시도 사랑스럽다. (201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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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내가 고타쓰를 산 건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라는 일본영화 때문이었다. 스물세 살 백수 아가씨 다마코가 고향집에 내려와 하루종일 데굴데굴 구르는 영화였다.

 

저러다 뭐라도 하겠지, 라며 러닝타임 78분을 기다렸지만 다마코는 끝끝내 데굴데굴하기만 했다. 그녀가 만화책을 보고, 아버지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곳은 고타쓰 안이다. 고타쓰란, 테이블 상판 아래에 전기히터를 달고 커다란 담요를 덮어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만든 일본식 난방 기구다.  그러니까 도톰한 방석 하나 깔고 앉아 고타쓰를 덮은 담요 안에 다리를 쏙 집어넣고 앉으면 그야말로 따끈따끈, 세상 더 부러울 것이 없어지는 상태에 금세 다다르게 되는 거다.

 

“앉은뱅이 된다. 진짜 앉은뱅이 된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하는 거야.”

 

내가 고타쓰를 사겠다고 하자 친구가 그렇게 경고했다.


충분히 그럴 듯한 경고였지만 나는 고타쓰를 샀다.

 

강아지와 둘이 살던 시절이었다. 강아지는 고타쓰 담요 아래로 쪼르르 기어들어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귤 바구니와 소설책 한 권 곁에 두고 고타쓰 앞에 앉으면, 어느 새 누워버렸고 또 어느 샌가 나는 잠들었다. 택배 아저씨가 초인종을 눌러도 고타쓰를 빠져나오기 싫었다면 말 다 한 거다. 아무 것도 하기 싫었고 그래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도 졸업한 다마코가 고타쓰 안을 벗어나지 못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왕이면 만화책이 고타쓰와 더 어울리겠지만 우리 집에는 만화책이 없었다. 진심을 다해 경고했던 친구는 고타쓰 앞에 서서 “들여오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어이 들여왔구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곧 그 안에 다리를 뻗고 잠이 들었다. 나는 베개를 가져다 주었다. 

 

어느 새 부쩍 추워진 날씨에 창고에 처박아두었던 고타쓰를 주섬주섬 꺼냈다. 묵은 먼지를 잘 닦고 담요도 빨았다. 거실 한 가운데 놓은 고타쓰는, 아무리 보아도 예쁘다. 잘 샀다. 이제 귤 바구니와 책 한 권을 챙겨 와야지. 책장을 훑다가 딱 마침맞은 책을 찾아냈다.

 

한 남자를 사랑하면 60매의 단편소설을 쓸 수 있다. 연애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한다. 슬프고 기쁘고, 또한 달콤하다. 이런 감정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사치스럽다. 나는 마음의 사치를 아는 남자와 여자가 정말 좋다.

 

정말 멋진 말이지 않은가. 이런 글이 담긴 책이다. 야마다 에이미의 『돈 없어도 난 우아한 게 좋아』. 제목조차도 사랑스러운 연애소설. 예전 『풍장의 교실』로 알게 된 작가다.

 

『돈 없어도 난 우아한 게 좋아』는 마흔두 살 사카에와 지우의 연애를 그린다. 마흔두 살이라니. 그리고 그들은 돈도 없다. 독자들이 하나도 좋아할 리 없는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이 소설은 몹시도 사랑스럽다. 마흔두 살이라도 아직 두 사람은 아이 같다. 건들건들, 나른나른, 걱정도 없다. 두 사람의 연애담은 그래서 행복하다. 아무 것도 없어 홀가분하기 때문이다. 소소하고 평범한 연애가 주는 따뜻함이 저절로 느껴진다.

나는 어느 장면을 읽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어지기로 작정했던 지우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사카에의 집에 찾아왔을 때 사카에는 고타쓰에 발을 넣은 채 누워서 자고 있었던 거다. 고타쓰에 발을 넣은 채 누워서 이 책을 읽고 있던 나는 그만 킬킬 웃고 말았다. 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 사카에가 하는 말은 고작 “지우, 왔네?”다. 나도 문득 고개를 들어본다. 누군가 나를 지우처럼 찾아온 건 아닐까 싶어서. 아무도 없다. 다행이다. 일단 고타쓰에 들어가 누우면 누가 오는 것도 하나도 반갑지 않으니 말이다.  겨우겨우 팔을 뻗어 귤 한 안을 집는다. 노란 귤은 제법 달다. 귤처럼 이 소설도 몹시 달다. 달콤하기 짝이 없다.

 

책을 덮고 이제는 원고를 써야 할 시간.

 

하지만 예감이 좋지 않다. 나는 또 노트북을 들고 고타쓰 앞에 앉았다가, 누웠다가, 저만치 굴러다니는 리모컨을 발끝으로 겨우겨우 집었다가, 그러고는 기어코 잠이 들겠지. 원고 써야 하는데, 원고 써야 하는데, 걱정만 하다가 가을과 겨울이 금세 다 흐르겠지. 그러고야 말겠지.


 

 

돈 없어도 난 우아한 게 좋아야마다 에이미 저/김난주 역 | 민음사
시각, 후각, 촉각 등의 오감이 모두 살아 움직이며 기쁨부터 아픔까지, 뜨거움부터 서늘함까지 감각의 향연을 벌이는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이 작품을 통해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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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돈 없어도 난 우아한 게 좋아

<야마다 에이미> 저/<김난주> 역9,9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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