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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영원함,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 2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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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여유를 만끽하며 구매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슈베르트 음반은 바쁜 삶 속에 잠시 잠들어 있던 여러 감정을 하나하나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고, 냉장고에 쟁여두고 잊고 있었던 재료들로 아주 멋진 요리를 만들어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201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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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아름다운 듯하지만 덤덤하고 아픈 곡, 고작 30대의 나이에 썼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곡,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천성만큼은 밝았던 슈베르트의 곡이다.

 

슈베르트의 곡은 자유롭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듯이 써 내려간 곡이 아니라, 마음과 머릿속에 떠다니던 선율들이 어느 순간 악보라는 그물에 걸려 하나의 음악이 된 것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면 조금 덜 화려하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마음에 꽂히는 음악이다. 특히 이 음반에 실린 슈베르트 소나타 20번을 한 악장 한 악장 따라가다 보면 유유자적하고 평화로운 산책길을 걸을 때도 있고, 갑자기 만난 낭떠러지에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때도 있고, 너무나 울창한 숲속에서 마음이 탁 트이면서도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자유롭지만 꽉 차 있는, 슈베르트가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은 독보적인 정체성을 가진 곡. 어쩌면 재즈 연주자들이 매 순간 자신만의 음악을 가감 없이 연주에 드러내는 듯한 즉흥성마저 느껴지는 그런 곡이다.

 

유독 길었던 추석 연휴,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오후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사실 이번 가을 학기에는 지난 학기보다도 더 많은 강의를 맡게 되는 바람에 학교 일과 공연 이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많이 없었다. 요리를 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필요한 만큼의 재료만 골라서 꺼내 쓰듯이, 추석 연휴 전까지는 학교와 공연에 관련된 생각과 감정에만 스위치가 켜져 있었던 것 같다. 모처럼 여유를 만끽하며 구매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슈베르트 음반은 바쁜 삶 속에 잠시 잠들어 있던 여러 감정을 하나하나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고, 냉장고에 쟁여두고 잊고 있었던 재료들로 아주 멋진 요리를 만들어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눈물로 호소하는 고통보다 더욱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 담담한 미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점점 많아진다. 소나타 20번의 2악장이 그렇다. 드라마틱하게 슬픔으로 치닫는 듯하다가도 다시금 아주 아름다운 선율로 아픔을 덮어주는 것 같은 구성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아픔과 슬픔을 참을 수 없어서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꿀꺽 삼켜 웃는 듯한. 그래서 더욱 30대 같지 않은 성숙함과 진심이 느껴지는 음악이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음반을 녹음하며, "나는 늘 슈베르트의 유작이 된 소나타 작품들에 경의를 품어왔지만, 그와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도 느꼈다. 인생에서 또 한 번 새 시기를 맞이하면서 이들 유작 소나타를 마침내 연주해볼 용기를 가져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물론 음악의 깊이가 나이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순을 넘긴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30대의 슈베르트가 남긴 곡을 연주하기까지 왜 이토록 오랜 시간 마음의 준비를 해왔는지, 음악을 듣는 내내 깊은 공감이 되었다.

 

또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자신의 피아노를 들고 다니며 연주하는 연주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를 직접 본 것은 3년 전, 유럽의 한 공연장에서였다. 지난달 연재했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었는데, 함께 공연을 보러 간 친구가 ‘오늘도 피아노를 가지고 왔으려나?’라고 혼잣말을 하기에 처음엔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생기기 이전의 곡을 연주할 때에는, 작곡가가 의도한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피아노를 직접 들고 다닌다고. 누군가에게는 광적으로 비춰질 정도의 완벽을 향한 세심함을 가진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첫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동시에 ‘그가 생각하는 음악에서 완벽의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밀려왔던 적이 있다. 그리고 3년 후, 그런 연주자가 25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음반을 들으며, 또 한 번 ‘완벽한 음악’이라는 답을 내릴 수 없는 고민에 빠졌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새로운 곡을 창작하고, 즉흥연주를 기반으로 한 공연을 많이 하는 내게 있어 완벽한 음악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관객과의 소통의 정도와 맞물려 있다. 내가 가진 에너지가 오롯이 내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전달되었을 때, 약간의 실수가 있었더라도 감정적으로 시원하게 소통했을 때 더욱 큰 희열이 있다. 그래서 크든 작든 ‘오늘 공연은 완벽했어!’라고 느껴지는 공연을 끝내고 나면 내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멍한 상태가 수 시간 이어지곤 한다. 멍함 뒤에 차오르는 만족감과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정신을 상쾌하게 만든다. 이는 더욱 완벽한 공연을, 음악을 하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이번 음반이, 그 자신이 추구했던 완벽의 결정체일지 아닐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경지에 오른 거장이 예순이 넘어서야 용기를 냈다는 점, 그리고 음악을 위해서라면 피아노를 들고 다닐 정도로 부족함을 용납하지 않는 연주자가 25년 만에 내놓은 음반이라는 점,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슈베르트 소나타 20번, 21번 음반은 들어볼 가치가 충분하지 않을까.

 

 

▶ 앨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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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한(피아니스트, 작곡가)

피아니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美버클리음악대학 영화음악작곡학 학사. 상명대학교 대학원 뉴미디어음악학 박사. 現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음악학과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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