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연수의 문음친교 시즌2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간 뒤, 우리가 보게 되는 것
엠마뉘엘 카레르의 『나 아닌 다른 삶』과 Leif Vollebeck의 ‘Elegy’
소설적이라고 말할 때 나는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선, 글을 잘 썼다. 소설가란 형식적으로 우아하고 감정적으로 균형 잡혔으며 논리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문장들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뜻하니까.
예기치 않은 사고가 벌어졌을 때, 남은 가족들은 가정(假定)의 지옥에서 헤매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2000년 7월 14일 부일외고 수학여행 참사에서 살아남은 한 생존자가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그 친구와 가족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쓴 글을 통해 알게 됐다. 그 글에는 “살아 있는 사람도 돌봐주세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생존자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처벌이 죄책감입니다. 내가 보내지 않았다면, 내가 가지 말라고 붙잡았더라면, 이 지긋지긋한 ‘만약에’라는 가정이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가슴팍을 짓누르며 숨도 쉴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내게도 잠 못 들던 밤들이 있었으므로 부정하는 가정의 화법이, 즉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시작하는 화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이 간다. 이런 화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하지 않았더라면’을 전제한 세계, 그러니까 이제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세계를 간절히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이 현실은 그 세계로부터 추방된 곳, 그러니까 유배지, 혹은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정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정의 고통은 실체를 지니지 못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의 이웃에게 우리가 어떤 위로도 건넬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위로가 불가능하다면,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위로가 불가능하다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한없이 무기력해지던 어느 날, 나는 엠마뉘엘 카레르의 장편소설 『나 아닌 다른 삶』을 읽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해일이 밀어닥치기 전날, 엘렌과 나는 헤어지자고 얘기했었다.” 몇 페이지를 더 읽으면 여기서 말하는 해일이 2004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스리랑카, 몰디브,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등 인도양 주변 국가로 밀어닥쳐 28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발생시킨 쓰나미를 말하며, 다행히도 그들과, 각자 데려온 두 아이들은 죽음을 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소설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해피엔딩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럼 물어보자. 앞에서 ‘다행히도’라고 썼지만, 정말 다행일까? 맞다. 정말 다행이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이런 말을 중얼거릴 수 있는 까닭은 엠마뉘엘 카레르의 작품들이 위치한 독특한 지점 때문이다. 『나 아닌 다른 삶』은 소설이면서도 소설이 아니다. 실제로 엠마뉘엘 카레르가 겪은 일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소설 속 내용을 그대로 믿자면, 전작인 『적』이나 『러시아 소설』과 달리, 이 소설만은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원고를 미리 보여주며 고치고 싶은 만큼 고쳐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초고의 여백에 등장인물들이 남긴 메모가 본문 속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요컨대 소설적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소설적이라고 말할 때 나는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선, 글을 잘 썼다. 소설가란 형식적으로 우아하고 감정적으로 균형 잡혔으며 논리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문장들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뜻하니까. 둘째, 그는 자신이 쓴 모든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작가라면 이 소설의 화자처럼 등장인물의 마음속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소설가가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소설가란 자신이 안다고 확인한 것만을 문장으로 남기기 때문에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카레르는 이 소설을 쓰지 말았어야만 했다. 아니, 쓸 수 없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소설의 앞부분, 그러니까 같은 호텔에 머물다가 세살배기 딸 쥘리에트를 잃은 제롬과 델핀 앞에서 그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했다. 그녀와 우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었다.”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심연 이쪽에서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헤어지려고 했던 엘렌과 카레르를 강하게 묶어버린다. 그래서 가족을 잃은 타인의 슬픔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이러니를 맛본다. 그래, 좋다. 다 좋다. 그들로서는 다행이다. 그러나 소설만은 쓰지 말았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
이동 중에 차에서 내려 길가에서 다 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필리프가 갑자기 나를 한쪽으로 따로 부르더니 물었다. 자넨 작가 아닌가, 이 얘길 책으로 쓰겠지?
너무 느닷없는 질문이었고, 나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었다. 지금으로서는, 아니라고, 나는 대답했다.
자네가 꼭 써야 하네, 필리프가 재차 말했다, 내가 말이야, 글솜씨가 있으면 내가 쓰겠는데 말이야.
그럼 한번 해보시죠. 저보다 더 적임자시죠.(73쪽)
그렇게 말하는 소설가를 필리프는 회의적으로 바라보지만, 1년 뒤 그 일을 써서 책으로 펴낸 사람은 소설가가 아니라 아이의 외할아버지인 필리프다. 심연과 맞닥뜨렸다면, 그래서 그 너머를 알 수 없다면, 소설가는 그 너머에 대해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카레르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애당초 그에게는 이 일을 소설로 쓸 생각이 전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 그는 이 소설을 썼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 아닌 다른 삶』은, 자신이 왜 이 소설을 썼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쓴 소설인 셈이다. 여기에 바로 내가 ‘소설적’이라고 말하는 세 번째 이유가 있다.
소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 가지 이유
350쪽이 넘는 소설에서 지진 해일로 딸을 잃은 젊은 부부를 심연 너머로 바라보는 장면은 80쪽까지다. 그다음은 공교롭게도 해일에 휩쓸려 죽은 아이와 이름이 같은, 엘렌의 여동생 쥘리에트에 관한 이야기다. 파리로 돌아왔을 때, 엘렌은 여동생 쥘리에트의 암이 재발했다는 전화를 아버지에게서 받는다. 카레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소녀 시절 한 차례 암을 앓았다는 것, 목발을 짚고 다닌다는 것, 직업이 판사이며 비엔에서 가까운, 이제르 지방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세살배기 쥘리에트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암에 걸린 그녀와 카레르 사이에도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
그 전해 여름에 찍은 내 영화가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내가 한창 스스로를 명석하고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해 우쭐해할 때였고, 촌구석의 볼품없는 집에 사는 처제뻘 되는 사람이 암에 걸린 생각을 하면, 물론, 가슴은 아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꺼져가는 그녀의 삶은, 활짝 열려 뻗어나가는 듯한 내 삶과는 무관했다.(85쪽)
그리고 다들 예감한 대로 쥘리에트는 서른세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비엔 소법원에서 판사로 일했던 동료, 그 역시 젊었을 때 암에 걸린 적이 있고, 그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절단한 바 있는 에티엔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죽음의 이면에 또 어떤 도래하지 않은 세계가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카레르가 알기 어렵다. 그 외다리 판사는 가정법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의 환상이 모두 사라지고 자신이 앞으로 죽는 게 거의 확실하다는, 그게 바로 자신의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사실을 막 깨닫고 나서 혼자 병원에서 처음 맞는 밤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집을 나서는 카레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첫날 밤의 이야기 말입니다. 당신을 위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124쪽)
그날 밤, 그러니까 쥘리에트가 암으로 숨을 거두고 처음으로 맞는 밤, 카레르는 이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작가의 도구인 펜과 노트를 들고 쥘리에트의 주변 인물들을 찾아다녔는데 다시 만난 에티엔에게서 그 첫날 밤의 경험에 대해 듣는다.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혼자 보내던 첫날 밤에 에티엔은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장기며 척추며 뇌를 갉아먹는 쥐를 상상한다. 그런데 카레르는 이 비유에 익숙했다. 그의 경우에는 쥐가 아니라 여우였다. 에티엔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카레르는 라틴어 시간에 배운 스파르타인 꼬마의 이야기에서 그 동물들의 이미지를 가져왔다. 각자 가진 이 내부의 적이 아이러니하게도 심연 너머 타인에게 건너갈 수 있는 외줄이 된 셈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이제르 지방의 군청 소재지인 인구 3만의 도시 비엔의 두 판사가 대출업체의 덫에 걸려 지옥과도 같은 채무불이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왔는지를 뒤쫓는다. 에티엔과 쥘리에트가 한 일을 사법정의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에티엔의 역할을 설명하며 카레르가 예를 든 보도 검사의 연설은 그게 단순히 기계적인 정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74년 마르세유 지방 검찰청에 재직하던 보도 검사는 젊은 판사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한다.
편파적이 되십시오. 무게가 같지 않은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한쪽으로 추를 기울여야 합니다.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채권자보다는 채무자에게, 사주보다는 노동자에게, 사고 운전자의 보험회사보다는 사고 피해자에게, 경찰보다는 도둑에게, 법원보다는 소송인에게 우호적인 선입관을 가지십시오. 법은 해석하는 것입니다. 법은 여러분들이 읽고자 하는 대로 읽힙니다. 도둑질한 사람과 도둑맞은 사람을 놓고 도둑맞은 사람을 처벌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216~217쪽)
약하고 가난하고 아픈 자들을 향한, 이토록 편파적인 판단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보도 검사가 어떻게 이런 태도를 지니게 됐는지는 소설에 나오지 않지만, 에티엔과 쥘리에트의 경우는 223쪽부터 그다음 쪽에 걸쳐, 이 소설에서 가장 멋진 간주 부분으로 설명된다. 즉 쥘리에트를 처음 만났을 때, 목발을 짚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에티엔은 생각했다. ‘좋았어! 절름발이 여자.’ 두 사람은 다리 저는 일을 통해 둘 사이의 심연을 건너간 것이다. 카레르가 자기 안의 여우를 통해 에티엔의 쥐를 이해한 것처럼. 이렇게 가장 아픈 부분을 통해 타인에게 건너갈 수 있다면, 판사는 판사의 일을 할 수 있고, 소설가는 소설가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감동은 이제부터다.
슬픔도 이처럼 씩씩한 리듬일 수가 있어
이 글을 쓰느라 다시 읽으며, 아주 오랜만에 나는 소설 속으로 푹 빠져드는 경험을 했다. 쥘리에트가 에티엔에게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읽었을 때.
열일곱 살까지는 춤을 췄어요. 아직 얼마 춰보지도 못했는데, 열일곱에 다시는 춤을 출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지난달에 시아주버니 결혼식에 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부러워 죽겠는 거예요. 웃고는 있었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 자리에 있는 게 행복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두 다리가 멀쩡하던 시절에 수없이 들었던 ‘YMCA’가 갑자기 들리는 거예요, 아시죠? 와아이-엠-씨에이! 그 노래가 나오는 5분 동안 노래에 맞춰 춤을 출 수만 있다면 아마도 기꺼이 제 인생에서 10년은 떼줬을 거예요.(261~262쪽)
또 쥘리에트가 죽은 뒤, 남편인 파트리스가 그녀를 기억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 슬라이드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에티엔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존재하지 않는 사진이니까 당신이 만드는 슬라이드에는 들어갈 수 없겠지만, 나한테 딱 한 장만 고르라고 하면, 고르고 싶은 사진이 있어요.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우리 넷이서 리옹에 있는 극장에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쥘리에트하고 당신, 나탈리와 나 이렇게. 우리가 먼저 도착해서 로비에서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어요. 당신이 그녀를 안아서 함께 높은 계단을 올라왔어요. 그녀는 당신 목에 팔을 두르고 있었어요. 웃고 있었죠. 아름다웠어요. 행복해 보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 보였으니까요. 그것도 아주 많이. 당신 역시 자랑스러워 보였어요. 다들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길을 비켜주더군요.(353쪽)
그러니까 자신들의 가장 아픈 부분들을 통해 서로를 가르는 심연을 건너간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은, 고통과 불행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 웃음이라는 것,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랑과 웃음과 아름다움 안에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건강하다는 것. 여기까지 읽고 나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어느 틈엔가 이야기가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이 마치 마술과도 같아서. 이것이 이 다큐멘터리를 ‘소설적’으로 만든 세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 이 글은 캐나다의 싱어송라이터 레이프 볼르벡의 ‘Elegy’를 들으며 끝낸다. 슬픔도 이처럼 씩씩한 리듬일 수가 있어서. 이 리듬은, 말하자면 노래하는 사람의 마술이라서.
관련태그: 나 아닌 다른 삶, 엠마뉘엘 카레르, Elegy, Leif Vollebeck
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이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섰다. 대표작에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