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직면한 남녀가 서로를 깊게 위안하다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가 박영 인터뷰
삶이 고단해지면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잃어버리게 되는 게 ‘이야기’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래서 제가 가진 조금의 재능을 정말 꾸준한 노력으로 승화시켜 좋은 이야기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위안의 서』는 죽음 앞에 상실감을 가진 두 남녀가 서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해가는 이야기로, 어둠 속에서 빛을 더듬는 문학의 본질적인 물음을 담아낸 작품이다. 출토된 유물에 숨을 불어넣는 보존과학자 남자와 치솟는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정부에서 비밀리에 파견한 공무원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지난해 말(12월 20일) 마감된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에는 모두 105편의 장편소설이 접수되었다. 심사위원단은 옥석을 가리기 위한 2개월간의 심사 끝에 만장일치로 박영 씨의 『위안의 서』를 이번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2015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저씨, 안녕」이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한 박영 작가는 그동안 생업에 종사하며 작품 발표를 일절 하지 않은 채 소설을 썼다. 그동안 아홉 편의 단편과 세 편의 장편을 썼고 그중 이번 당선작이 된 『위안의 서』는 가장 최근에 쓴 작품이다.
수상 통보를 받았을 때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오랫동안 함께한 반려견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걸려오는 수상 통보 전화를 자꾸만 끊었던 기억이 납니다. 전혀 수상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출판사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거든요. 보통 당선이 되고, 첫 책이 나오면 설렘으로 글쓰기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저 또한 2015년 신춘문예로 데뷔한 직후에 조금 그랬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시간에 통보를 받아서인지 그저 숙연해졌어요. 제 소설 『위안의 서』가 죽음에 직면한 남녀가 서로를 깊게 위안하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상실감 앞에서 오히려 더욱 뜨겁게 서로를 껴안게 되는 거지요. 이 세상에는 지금도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다시 한번 결심하게 된 순간이었어요.
이력과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안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에 시험을 봐서 선발하는 학교였거든요. 그러다 보니 정말 공부만 열심히 하는 학생들로 분위기가 늘 삼엄했어요. 겉돌 수밖에 없었죠. 오직 점심시간만 기다렸다 책 들고 교문 밖에 나가 혼자 책을 읽다 돌아오곤 했어요. 제가 찾아낸 해방구는 백일장이었어요. 그날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결석처리가 되지 않았고요. 상까지 받아오면 덤으로 당분간은 조금 별스럽게 굴어도 용서를 받았으니까요.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거의 40회 넘게 기차를 타고 여행하듯 백일장을 다니며 책 읽고 글을 쓰던 시기를 통과하며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저는 일탈하기 위해 글을 썼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소설에는 세상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제 생의 이력은 언제나 나를 묶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며 꾸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안의 서』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는지, 집필 기간은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주세요.
과천에 살다 보니 종종 국립현대미술관에 갑니다. 걸어서 사십 분이면 도착하거든요. 대공원 지나 비탈길을 오르다보면 호수가 보이고, 호수 위를 거의 텅 빈 채 떠가는 리프트, 그리고 우측으로는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탑이 있어요.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해가 강했던 날 우연히 산책을 하다가 미술관에 들렀어요. 정기용 건축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어요. 다름 아니라 그분이 죽은 뒤 그분의 방에 남겨져 있던 물건들을 고스란히 옮겨온 거였습니다. 충격적이었어요. 얼마 전까지 이 사람은 이 세상에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너무나 열정적이었는데, 그 사람은 어디로 갔지 싶었습니다. 전시실에서 조용히 정말 격정적으로 울게 되었어요. 당황스러웠어요. 그때부터 죽어가는 것들에 눈을 떴고, 그 허무맹랑한 죽음과 겨루어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물론 처음 계획과는 달리 유물을 복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데요. 집필 과정에서 보존 과학에 대해 공부하고 이해하는 게 조금 어려웠어요.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하게 되었고요. 3개월간의 구상을 끝내고 3개월간 집중해서 썼습니다. 작품을 쓰며 제가 가장 위안을 받고 말았어요. 우리는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에 결국 하나로 연대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거든요.
『위안의 서』는 어떤 소설인가요?
독자 분들에게 편지를 적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원래 소설을 쓸 때는 제 세계에 빠져들어 쓰게 되는 편이거든요. 제가 그때 사로잡혀 있는 문제들, 그리고 제 눈앞에 아른거리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너무나 쓰고 싶어 쓰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어요. 시작부터 저는 얼굴은 본 적 없지만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분들의 삶을 상상하며 썼거든요. 밤마다 그분들에게 말을 거는 마음으로요. 우리는 지금의 삶과 고통에 치여 허덕이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 시간이 우리에게 영원히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이곳을 떠날 때 내게 소중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깨닫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인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그 사실을 빨리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이번 당선작 『위안의 서』가 데뷔 이후 첫 발표작이 되었는데, 문학상 수상작으로 독자들을 찾아가는 만큼 감회 역시 남다를 듯합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럼요. 저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책을 내고 싶다,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나누고 싶다는 갈망을 갖고 살아왔어요. 이번 황산벌청년문학상 장편 공모에 도전한 이유도 은행나무에서 책을 출간해주기 때문이었어요. 처음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을 때 저는 잠시 밖으로 나와 그냥 밖에 서 있었어요. 차도로 차들이 지나다니는 일상적인 풍경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책을 내고 싶다고 생각만 했지 정말 그런 순간이 올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거든요.
『위안의 서』라는 책으로 시작하게 되어 좋아요. 저는 삶이 고단해지면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잃어버리게 되는 게 ‘이야기’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래서 제가 가진 조금의 재능을 정말 꾸준한 노력으로 승화시켜 좋은 이야기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를 기억하지는 못하시더라도 제가 쓴 이야기는 기억에 남아 쓸쓸하고 힘들 때 도피처가 되었으면 합니다.
출토된 유물을 복원하는 일을 하며 죽음에 사로잡힌 남자 정안과 더없이 쓸쓸한 내면을 갖고 있음에도 타인들의 자살을 막으려는 여자 오상아의 선명한 배치가 눈에 띕니다. 소설 속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요?
죽음에 사로잡힌 남자 정안은 사실 제 개인의 내면을 투영하고 있는 인물이에요. 제가 오래도록 폐쇄적으로 살았거든요. 사실 지금도 아직 세상으로 완전히 걸어 나오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어딘가에 들린 듯 공상하고 상념에 사로잡혀 지내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해요. 좋아하는 사람들을 붙잡지도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소설 속 정안이 누군가를 만나 정말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햇볕도 쬐고 바람도 쐬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그렇게 생동감 있게 말이에요.
그리고 오상아는 제가 알고 있는 분의 이야기예요. 건너건너 그분의 삶에 대해 듣고 있었는데 이번에 소설 속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참, 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오히려 죽어가는 정안이 살아 있는 오상아를 위안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원형의 시간은 직선의 시간과 달라서 하나로 연결되는 둥근 원 같은 거래요. 그런 시간처럼 이들이 만나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서로 만나서 죽음과 삶이 무화되고 그런 둥근 시간 속에 들어가 영원히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 또는 문학적 포부에 대하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당분간은 『위안의 서』와는 조금 다른 소설들을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지금 퇴고하고 있는 다른 두 편의 장편 또한 조금 달라요. 장면, 장면에 천착하고 오래도록 음미하게 되는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빠르게 진행되는 소설을 써볼 생각입니다. 사람들을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탈피할 수 있게 해주는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이며 짜릿한 그런 이야기를요. 스릴이 넘치고 위태롭지만 너무나 아름답게 기억되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 밤에 잠도 못 자고 깨어 있을 때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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