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황인찬의 시로 말하다
정교하게 깨진 말들로부터
한인준의 첫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
달변이 아니기에, 정확하게 말한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정확하게 표현되는 것이 있음을 시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한인준의 시는 어렵지 않다.
나는 ‘현대시는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라는 질문이 참 곤란하다. 거기에 대해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답변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정직하게 답하는 것이 어쩐지 아, 시가 어렵긴 한데 그게 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라고 얼버무리는 것 같달까. 나는 오히려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싶다. 낯선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 시란 대체로 낯설긴 해도, 어려운 경우는 상당히 드문 장르다.
한인준의 첫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 역시 그렇다. 그의 시는 매우 낯설지만, 전혀 어렵지 않은 낯섦으로 이루어져 있다.
식탁 위에 놓은 빨간 색은 내가 먹을 수 있는
하지만인가
느낌은 한입으로 쪼개질 수도 있는데
어렵다
어렵다를 뱉는다
나는 나의 뺨을 때린다. 후두둑과 함께 떨어지는
아삭거린다
왜 내가 울지 않는다. 너는 왜 운다
‘왜’라는 말은 언제부터 부드러운 대답 같았나
억지로와 함께 느낌을 먹는다
식탁을 씹는다. 씹는다고 생각하는
아니다
나는 식탁을 못한다. 우리가 지금을 못한다
가지 마
저만큼이 간다. 저만큼이 간다면 정말 멀리 가는 것인데
마주 앉은 네가 운다
나는 나를 먹어야 한다
- 「종언-않」
식탁 위에 놓인 사과(다른 붉은 과일일 수도 있지만)를 보며 시작되는 시다. 그런데 그 사과를 표현하는 말들이 이상하다. 사과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하지만’, ‘어렵다’ 등의 말이 놓여 있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우리가 무슨 생각인가에 골똘히 잠겨있을 때 하곤 하는 말실수를 생각해보자. 운동화를 사야지 생각을 하다가, 누군가 지금 몇 시냐고 물어보면 운동화라고 답한다거나 하는 경험 같은 것들 말이다. 한인준 시인의 작법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이 시가 구사하는 기묘한 치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시의 ‘나’는 울고 있는 ‘너’와 식탁에 마주 앉아 있다. ‘나’는 관계의 파탄을 앞에 두고 있으며, 동시에 식탁 위의 사과를 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 시의 독특한 치환이 시작된다. 눈앞에 놓인 사과는 눈앞에 놓인 갈등과 그로부터 발생된 편편이 흩어지는 생각과 감정들의 은유가 되고, ‘하지만’, ‘어렵다’, ‘억지로’와 같은 부정적인 것을 의미하는 말들이 사과의 자리를 대신하며, ‘너’와의 어긋남으로 인해 위험해진 ‘나’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의 착란 혹은 치환은 의미를 흐리기는커녕 시적 화자의 심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내가 울지 않는다’, ‘너는 운다’라는 문장 사이에 ‘왜’라는 말을 집어넣어 이루어진 비문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울지 않는다’, ‘너는 운다’라는 식으로 상황을 단정적으로 진술하는 문장에 ‘왜’라는 말을 넣음으로써 단정적으로 진술될 수 있는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낯설어지고 멀어진 ‘나’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괴된 언어, 파괴된 문장이기에 오히려 의미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을 ‘나는 왜 울지 않을까, 너는 왜 울고 있을까’라고 표현했다면 과연 시적 화자의 심리적 거리감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었을까?
나도 모르게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을 하고 만다
‘어떤’ 말을 하고 나면 ‘어떤’ 말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중략)
식탁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다. 밥을 먹다가 또
무엇을 말했던 걸까
내 곁에 둘러앉은 ‘어떤’ 침묵들
‘어떤’ 말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말로도 말하지 않는 우리가 대화를 한다
- 「어떤 귀가」
시인이 스스로 설명하듯, ‘어떤’ 말은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말과는 무관한 말일 뿐이다. 시인이 낯선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우리가 아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말을 부수고 바꾸고, 멀리 떨어트리며 한없이 낯설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낯선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오히려 우리의 일상을 우리가 아는 ‘어떤’ 익숙한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리라.
달변이 아니기에, 정확하게 말한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정확하게 표현되는 것이 있음을 시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한인준의 시는 어렵지 않다. 오히려 시적 정황이나 정서 자체는 아주 익숙하고 확실한 편에 가깝다. 다만 그의 언어가 우리의 습관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낯선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낯선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익숙하기에 오히려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았던 일상이 더 정확하고 정교해진다. 이 정교하게 뒤바뀐, 혹은 파괴된 언어가 바로 한인준의 시가 갖는 아름다움이다.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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