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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다시 만나는 김승옥 작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필집
청년 김승옥을 다시 만나러 갈 수 있는 유일한 타임머신
청년 김승옥의 수필집 『뜬 세상에 살기에』가 오랜 시간을 건너와 다시 독자들을 위로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승옥 작가의 수필집 『뜬 세상에 살기에』를 다시 만든 위즈덤하우스 편집부 정지연입니다.
김승옥은 문학도들이 가장 먼저 필사하고 싶어 하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로 평가받는 「무진기행」을 비롯해 주옥같은 작품들을 써낸 우리 시대의 전설적인 작가입니다.
『뜬 세상에 살기에』는 그런 그가 청년 시절에 처음 출간한 수필집이고, 아마도 마지막 수필집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책의 초판 복간본과 개정판 작업이 우연히 저한테 맡겨졌을 때 판권 부분부터 살펴봤습니다.
제가 태어난 그해 그달에, 이 책도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40여 년 전입니다.
그때 김승옥 작가는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그것을 기념하여 당시 지식산업사에서 책을 만들던 최하림 시인이 그동안 여러 매체에 실린 김승옥 작가의 잡문들을 모아 한 권의 수필집으로 펴내줬습니다.
이 책에는 김현, 김치수 등과 함께 활동한 동인지 《산문시대》 이야기부터 자작에 대한 작가 자신의 흥미진진한 해설, 문학과 시대에 대한 청년 시절 작가의 순수와 열정과 고민, ‘자유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가르치는 걸 공부해 제대로 알고 실천했던 학생들의 4?19 혁명 이야기까지 거침없는 육성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뜬 세상에 살기에』는 청년 김승옥을 다시 만나러 갈 수 있는 유일한 타임머신입니다.
40년 전 작가의 역할을 고민하는 청년은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식장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합니다.
자신이 줄 것은 ‘고통’과 그것에서 비롯하는 ‘초라한 상상’밖에 없다고, 고통을 함께하는 인간끼리는 행복하므로 말입니다. 이 절실한 진심만큼 시대와 사회에 끊임없이 지치고 상처 입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이 또 있을까요. 청년 김승옥의 수필집 『뜬 세상에 살기에』가 오랜 시간을 건너와 다시 독자들을 위로합니다.
야릇
누군가 나를 뒤집어쓰고 있어
병을 불러 아픈 날
곁에 누워 얼굴을 쓰다듬는 계집아이
돌아보면 할머니가 꽃을 안고 웃고 있다
어느 저녁엔
내 몸에 살림 차린 이들
밥물 끓는 소리
등본은 발급되지 않고
번지수가 없어
오늘도 짐 풀지 못한 채
마루 끝에 앉아 있다
누가 불러 나갔는데
나무들 무얼 숨기고 있는지
이파리 하나 흔들거리지 않고
누가 깨워 눈떴는데
벽지 꽃무늬 사이로
사라진 옷자락만
오래 집 비우고 돌아온 날
후다닥 숨는 기척
커튼 뒤의 수군거림
어둔 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닮은 이 있네
문득 나 또한 누군가의 몸에 세 든 것을 알았네
- 『나는 잠깐 설웁다』 (허은실/문학동네) 中에서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어찌어찌 하다보니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십 수년간 했고,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영화평론가’로 불리게 됐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한 번도 꿈꾸진 않았던 ‘영화 전문가’가 됐고, 글쓰기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글쟁이’가 됐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꿈을 지탱할 만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삶에서 꿈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되물으며 변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