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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작사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골든디스크 어워즈>, <서울가요대상> 등 OST 부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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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의 이즘 인터뷰에서 거미의 목소리는 선하고 부드러웠지만 송곳 같은 날카로움과 묵직함도 잃지 않았다. “제가 살아온 인생사가 그리 길진 않지만 노래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살아온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계속 노래 불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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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최고 시청률을 올린 드라마 <태양의 후예>와 하반기의 화제작 <구르미 그린 달빛>의 OST를 동시 소화한 거미는 「You’re my everything」과 「구르미 그린 달빛」으로 원투 스트레이트 히트를 기록했다. “애절한 혹은 낭만적 러브 신을 타고 흐르기에 더할 나위가 없는 노래”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그의 발라드 가창은 농익을 만큼 농익었다. 중견에 들어선 근래 “전보다 노래가 더 편해졌다”는 호평과 함께 존재감도 급등했다. 이 노래들로 거미는 <서울드라마 어워즈>, <아시아 아티스트 어워즈>, <골든디스크 어워즈>, <서울가요대상>의 OST 부문상을 휩쓸었다.

 

‘OST 여왕’이란 타이틀을 얻었지만 거미는 나아가 ‘콘서트 퀸’의 등극을 요구한다. 공연에서도 강한 위상을 자랑, 얼마 전 끝난 단독 전국투어도 전회 매진의 대성황을 이뤘다. 그는 그러나 드라마와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아닌, 전처럼 음원(혹은 음반) 단독으로 가수의 입지를 상승시키기가 어렵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소속사를 바꾸고 2014년 낸 곡 「사랑했으니..됐어」는 4년 만의 미니앨범이었고 그 이후로는 미니든 풀이든 아예 앨범을 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거미는 대뜸 “곡이 아까워서”라는 이유를 댔다.

 

휘청거린 음악계 현실에 의해 미니앨범을 낼 무렵 노래에 대한 깊은 회의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그는 반갑게도 상반기에 9년 만이 될, 정규 5집을 공개하리라는 청사진도 밝혔다. 소속사 사무실에서 가진, 역시 9년 만의 이즘 인터뷰에서 거미의 목소리는 선하고 부드러웠지만 송곳 같은 날카로움과 묵직함도 잃지 않았다. “제가 살아온 인생사가 그리 길진 않지만 노래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살아온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계속 노래 불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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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활발한 콘서트는 중심이 공연으로 이동한 것을 말해주는 것인가.


1년간 드라마 OST로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1년간 왕성하게 활동을 했는데 아무래도 중심이 OST가 되다 보니 음악적으로는 아쉬움이 있었지요. 공연은 적잖이 그런 아쉬움을 해소하는 장이 됐어요.

 

연속 두 차례의 전국 투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짜 신기하게 전부 매진되었죠. 그것도 2번에 걸친 전국 투어 전회 매진이라서 깜짝 놀랐어요. (소속사 관계자는 옆에서 유효표율 100%인 곳도 많았다고 전한다) 더 기쁜 것은 연령대도 다양해졌다는 거예요. 10대부터 50-60대까지 거의 전(全) 세대였어요. 물론 제가 이제 나이가 든 이유도 있었겠지만.... (웃음) 그렇다고 공연에 포커스를 두는 것은 아닙니다. 전 소속사 YG 때는 활동이 좀 뜸했잖아요. 앨범도 몇 년 만에 한번 나오고 이랬고, 공연이든 뭐든 활동을 좀 자제시키는 편이었죠. 양현석 사장님은 가수들이 반복 노출에 의해 소모되는 것을 싫어했어요.

 

라이브에 쏟아보니 가수로서 뭐가 남든가.


공연을 하면서 계속 배워요. 공연이 공부가 가장 많이 됩니다. 다행히 노하우가 많이 생겨서 예전에는 이렇게 연속으로 공연하면 목이 상했을 텐데 지금은 가면 갈수록 목이 좀 더 건강해지는 방법도 찾았고요. 공연이 신나요.

 

목이 나아진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


2003년 데뷔하자마자 성대 결절이 걸려 위기를 맞았죠. 성대 결절이란 게 가수한테는 치명타죠. 그때 극복을 위한 발성을 많이 연구하고 공부했어요. 2집 「기억상실」 내기 전이었죠. 그 이후에도 계속 연구를 했죠.

 

성대 결절은 거미의 노래 탓인가.


노래의 피치 탓도 있고, 무리한 다이어트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습할 때는 전혀 영향이 없었는데 방송하고 이러다 보니 몸에 힘이 아예 안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적이 없었는데 몸은 힘이 하나도 없고 노래는 높다 보니 목청을 무리하게 많이 쓰게 됐어요. 활동을 하게 되면 리허설을 아침에 해야 하니 잘 시간도 많이 없었고. 제가 잘 몰랐던 거죠.

 

미니앨범과 디지털 싱글만이 있지, 풀 앨범이라고 할 작업은 「미안해요」의 2008년 이후 9년간 깜깜이다.  5집 앨범이 나오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뭔가.


제일 큰 이유는 ‘곡이 아까워서’입니다. 정규 앨범을 만들 때 사실 타이틀곡 말고도 딴 수록 곡에도 무진 신경을 기울이는데 그래도 예전 앨범이 팔리던 시기에는 고루 사랑을 받았잖아요. 지금은 미는 곡 외에는 관심이 없죠. 정말 스튜디오에서 막대한 산고(産苦)를 겪으며 열서너 곡을 만드는데 한두 곡 빼고는 묻혀버리죠. 이 이유가 커요. 한동안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어요. 이 회사 들어오고 첫 번째 미니 앨범 내기 전인가 후쯤에, 그런 심적 고통은 가수가 되고 처음이었죠. 성대 결절로 목이 아프고 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노래를 계속해야 하나”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그래도 앨범이 갖는 가치가 있지 않나.


제 욕심으로는 지금쯤은 5집 정규 앨범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선 말리는 거예요. 다들 같은 생각인 거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곡이 아깝지 않냐”, “차라리 미니 앨범이든 싱글이든 나눠서 지속적으로 하는 게 어떤가” 하는 조언을 하지만 그래도 해야죠. 지금 준비 중이에요.

 

앨범 활동 안 하다가 ‘OST 가수’ 소리 듣는 것 아닌가.


실제로 요즘은 그런 얘기를 듣기도 하죠. (웃음)

 

OST에 참여하는 것과 정규든 미니든 자기 음원을 만드는 것에 사고의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당연히 있죠. 말씀하신 대로 ‘참여’와 ‘주도’의 차이랄까요. 책임감이 다르지요. 앨범이나 싱글을 제 이름으로 할 때는 책임감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드라마 OST는 스토리가 딱 있으니 거기에 맞게 감정을 실어주고 도움을 주면 되는 거지, 제가 이끌어가는 건 아니죠. 확실히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덜합니다. 반면 앨범은 이야기를 제가 만들어야 하고 거미라는 가수의 타이틀에 누가 되면 안 되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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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상으로 볼 때 거미라는 가수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은 소울 풍이건 알앤비 풍이건 그 풍에 기초한 전형적인 발라드에 있다. 물론 다양한 스타일에 걸쳐있지만 타이틀곡이 되고 히트를 기록한 곡은 대부분 발라드들이다. 근데 「미안해요」부터 EDM스러운 것도 등장하고, 2010년, 2013년 앨범을 들었을 때 느낌은 스타일의 다양화 실험 속에서도 여전히 선율의 흐름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Because of you」가 대표적이지 않나. 리듬에 변화를 주되 발라드 패턴을 유지하는 접근이랄까. 중견이 되어가는 상태에서 장르적 고민이 없는지.


장르를 가리는 편은 결코 아닙니다. 히트가 되고 활동했던 곡들은 발라드에 기초를 뒀지만 저와 비슷한 장르의 음악을 하는 가수들과 비교를 보면 제가 제일 다양한 장르에 걸쳐있다고 봅니다. 「미안해요」도 그렇고 「남자라서」도 그렇고. 사실 「기억상실」, 「어른아이」도 그때 당시에는 없는 스타일이지 않았나요. 「사랑은 없다」도 그랬고. 모든 장르에 가능성을 열어두고는 있는데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르는 시도하지 않으려는 생각은 있습니다. 갑자기 록을 한다든가 댄스 음악을 한다든가 그런 거만 아니라면.

 

그래도 「미안해요」에는 춤추지 않았나.


춤을 추긴 했는데 음악 자체는 요즘 어린 친구들의 댄스랑은 다르죠. 그런 건 그 친구들이 잘하지, 제가 해봤자 곡의 맛이 살지도 않고. 그렇게 약간 춤을 춰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건 저 한 사람이 계속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봐요.

 

잠은 잘 자는 편인가.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예전에 <나는 가수다> 나갈 때는 부담이 되고, 그러면 잠을 못 자고 그랬어요.

 

2003년 데뷔 앨범의 수록곡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가 대중과 접점을 마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거미 하면 가장 먼저 그 곡을 떠올린다.


그래요. 제 주변에서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실 데뷔 앨범에서는 「그대 돌아오면」으로 활동을 했거든요.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목 때문에 활동을 못했는데도 오히려 그렇게 됐어요. 제 노래의 대중적 정체성이랄까요, 그게 구현이 된 노래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당시와 지금이 뭐가 달라졌기에 OST 대박 넘버 「구르미 그린 달빛」과 「You are my everything」이 예전 거미보다 노래를 더 잘한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성숙해진 것인지, 노래를 더 맛있게 처리하는 면에서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인지.


두 가지 다인 것 같아요. 저의 예전 노래들을 들으면서 발성을 연구해보니 아쉬운 부분들이 발견되더라구요. 물론 슬픈 노래고 이별 노래니까 절규하고 처절한 감정을 표현해야지요. 전에는 막 울고, 눈물만 나고, 붙잡고 싶고 미련이 들고 그런 감정들이었죠. 어릴 때 제 감정이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사랑, 이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다스린다고 해야 하나요. 그리고 그걸 표현하는 소리를 연구하게 된 것도 있구요.

 

전환의 계기가 있다면.


제가 싫었어요. 들으면서 힘들더라고요. 들으면서 해소가 되고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야 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물론 고음에서 절규하는 건 좋고 그렇게 느끼실 수 있겠지만, 저는 뭔가 시원한 느낌은 아닌 겁니다. 계속 소리가 걸리는 거예요.

 

9년 전인 2008년 이즘 인터뷰에서 거미 노래는 테크닉 위주라는 인상을 준다는 질문에 “나는 그냥 부르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테크닉으로 들린다”며 그게 고민이라는 얘기를 한 바 있다. 기억나는지. 이제 팬들이 테크닉 아닌 자연스러움을 포착한 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애드리브가 많은 노래를 했었고 지금은 멜로디가 중심이 되는 노래가 많아 더 편안하게 들으시는 것 같네요. 톤이나 표현 감성의 변화겠지요. 부르는 제 입장에서 좀 더 편안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있든 없든 테크닉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을 부를 때 하고 「어른아이」 부를 때 하고 차이는 없다?


그렇죠. 전혀 없어요. 단지 톤의 차이죠. 「구르미 그린 달빛」도 「어른아이」만큼 탑 노트가 높은데, 「구르미 그린 달빛」은 오히려 계속 위에서 노는 노래입니다. 근데 「구르미 그린 달빛」이 더 편하게 들리는 건 발성이나 톤의 차이지요.

 

백지영도 그랬고 태연도 그렇고 드라마 OST를 통해 커리어점프를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OST의 강세에 대한 생각은.


저는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에요. 이렇게라도 음악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늘어나면.... 요즘 우리 음악이 다양해지긴 했어요. 어떤 가수라서 잘 되고 이런 것도 없어진 것 같고. 그래도 좋은 음악이 오래 사랑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그건 아직 아닌 것 같아요.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요. 근데 드라마랑 영상이 동반되면 사람들이 조금 더 오래 기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음악의 힘이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음악을 즐겨 듣던 때의 날씨, 같이 있었던 사람.. 이런 것들을 동시에 기억하게 해주는 게 음악인데, 요즘은 그런 기억을 같이 갖고 있는 음악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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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데뷔해서 14년 동안 활동하면서 음악적으로 가장 뿌듯한 점이 있다면 뭔지. 세 가지만 꼽아 달라.


그걸 최근 들어 느껴요. 먼저 가수로서 지금도 뛰고 있다는 점. 아직 방송에서 노래하고, 공연하는 현재진행형 가수라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죠. 다음으로는 좀 전에 얘기했지만 전국투어를 해서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셨다는 것, 대단한 기쁨이었어요.

 

두 번째 전국투어는 입소문이 작동하면서 더 성과를 거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공연은 어떤 메뉴로 구성하는지.


저는 이것저것 다 해요. (웃음) 공연은 무조건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가수가 노래를 잘해도 관객들이 알지 못하는 노래만 연속으로 하거나 느린 노래만 쭉 하거나 하면 진짜 재미가 없지 않나요. 그래서 재미와 흥을 부여하는 구성에 최선을 다해요. 코너도 만들고 널리 알려진 곡을 커버하기도 하고. 제가 음악 예능 프로를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커버 곡도 많아요. 대신 히트곡은 편곡을 하지 않고 오리지널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공연의 오프닝과 마지막 곡은 주로 어떤 곡을 하는지 궁금하다.


매번 달라요. 제게 의미가 있거나 팬들에게 의미가 있는 그런 노래를 할 때도 있고,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마음에 뭐가 하나 남아서 돌아가셨으면 하는데 제 노래는 그러기엔 이별 노래가 너무 많아서.... (웃음) 앞으로는 다른 인생 얘기를 담은 노래를 만들 예정인데, 그래서 엔딩 곡은 제 노래가 아니더라도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하려고 합니다. 어떨 때는 감동을 드리고 싶기도 하고. 이번 같은 경우는 전인권 선배님의 「걱정 말아요, 그대」를 했죠. 하지만 신나게 끝날 때도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인생 노래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거미도 노래의 메시지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랑과 이별에서 벗어나, 예를 들어 아바(ABBA)의 「Thank you for the music」 처럼 음악에 바치는 헌사 같은 노래들이 좋지 않을까. 그렇기 위해서는 가사를 직접 써야 하지 않나.


지금까지 가사를 계속 써 왔죠. 앨범에 많이 담기도 했어요.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아요, 사실 거기에 대한 고민은 지속적으로 해왔어요.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만드는 것보단 (만들어진 것을) 표현하는 것” 쪽인 것 같아요. 거기에 더 탤런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작사가와 교감을 나누지 않나.


그렇긴 하죠. 교감을 통해서 가능한 한 제 얘기를 담죠.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은 중요해요.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욕심을 부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뿌듯한 것 세 번째를 아직 얘기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저를 다시 찾아주셨잖아요. 영광이지요. 9년 전, 그때도 영광으로 여겼어요. 그래도 신인이라고 생각했던 때니까요. 이번에도 연락을 주셨다는 말에 감사했어요.

 

이즘이 감사드리는 게 맞다. 반대로 고통스러웠던 순간도 꼽아 달라.


미리 얘기했지만 성대 결절 때가 가장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고마운 시기였기도 합니다. 당시는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저랑 같이 데뷔했던 팀들이 다 잘 되기도 했고요. 저는 반응이 없지 않았지만 제대로 활동을 해보지도 못했으니까요. 일단 소리가 안 나오니까 공포 그 자체였죠.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었어요. 그다음은 무대에 많이 서지 못했을 때. YG 때, 컨디션도 좋고 한참 활동을 하고 싶은데 못할 때가 있었죠. 가수로서 할 일을 못하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처음엔 제 몸의 문제로, 그다음으로는 상황에 의해 힘들었다면 최근에는 음악시장의 흐름 때문에 슬럼프를 겪었죠. 왜냐면 이건 생계와도 관련된 문제니까요. 지속적 외면에다 유통기한이 너무 짧아지는 현실을 어떻게 넘어서야 하나 하면서 차라리 다른 수입원을 만들고 음악을 부가적으로 해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도 심각하게 했죠.

 

트레이닝 센터나 혹은 학원 같은 미래 계획은 없나. 노래는 하늘이 주는 거니까 보컬 훈련 같은 것 말고 지망생들에게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간 같은 게 좋을 듯한데..


지금도 (트레이닝)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데 안 하고 있는 이유가 요즘은 다들 가수를 하려고 하는데 아시겠지만 진짜 가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된 것 아닌가요. 그게 눈에 보이는데 헛된 희망을 주는 것 같아서 그게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You are my everything」, 「구르미 그린 달빛」등 최근 들어 OST로 거미를 많이 만나고 있는데 앞으로도 이 접근법으로 가는 건가


아닙니다. 일단 올해 상반기 안에 앨범을 내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작업 중이에요. 새로운 발라드 스타일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규로 치면 이번이 5집이 되겠죠. 아무튼 앨범 나오기 전에는 싱글이나 OST를 좀 자제하려고 합니다. 그렇더라도 또 좋은 드라마 음악 제의나 프로그램 섭외가 들어오면 할 수도 있죠. 다른 건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선을 긋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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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가 다녔던 동덕여대의 스승 이정선 선생은 거미를 이렇게 기억한다. “아주 성실했지. 활동 스케줄과 겹치지 않도록 수업시간을 짰고 가능한 한 수업에 빠지지 않았어.” 원래 노래도 잘했지만 거기에 성실이 더해지면서 급속도로 실력을 늘려갔다는 설명이었다. “성실은 재능을 불리지! 그것을 이길 사람은 없어.” 거미의 카드는 그리 예가 많지 않은 ‘재능’과 ‘성실’의 놀라운 앙상블이다. 그것으로 그는 성대 결절도, 가수 생활에 대한 회의도 극복하고 이전과 차별화한 스타일로 뻗어가는 단계를 마련했을 것이다. 인터뷰 중에 그가 가장 입에 자주 올린 표현이 ‘공부가 된다’, ‘연구가 부족했다’와 같은 말이었다.

 

노래를 본인이 잘한다는 느낌이 스스로 처음 들었던 것이 언제인가.


아기 때였던 것 같아요. 기억이 안 지만 유아 때 엄마 말씀에 따르면 말을 잘 못할 때부터 노래를 했다고 해요. 엄마 쪽을 많이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연예 쪽과 관계가 있었냐고 묻자) 전혀 아니에요. 외할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셔서 엄하셨대요. 악기를 들고 들어오면 부수기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웃음)

 

초등학교 때도 특별히 노래 활동을 한 것이 있나.


초등학교 때는 피아노를 쳤어요. 6살부터 쳤는데 학원에서 연주회 같은 걸 하면 선생님이 항상 마지막에 특별 무대로 노래를 시키셨죠. 그때는 가수가 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어렸을 때는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꿈을 가졌죠. 피아노를 고등학교 때까지 쳤어요. 그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준비를 했죠. 그때도 집안 사정이 좋아서 피아노를 배웠던 것은 아니고 봐주던 선생님이 좋게 봐주셔서 공짜로 배우다시피 했는데, 그 선생님도 당시에 대학생이어서 같이 유학을 가려다가 둘 다 사정이 너무 어려워져서. (웃음) 이후 어떻게 해야 하나 방황하다가 노래를 하게 된 거예요. 고등학교 때 축제에서 노래하는 걸 보시고 오디션 볼 생각이 있냐는 제의를 받았죠. 지금 그분이 B1A4 사장님이세요. (웃음) 제가 노래하는 걸 보시고 제 친구에게 연결해달라고 하셨죠. 당시엔 사장님은 아니고 캐스팅 매니저셨는데, 아직도 연락은 합니다.

 

노래가 되는 이유 중 하나가 거미가 선하고 착한 성격의 소유자라서가 아닐까.


그건 아닙니다. (웃음) 착한 사람이고 싶기는 하지만요.

 

2008년 인터뷰에서 「기억상실」이 자신을 대표하는 노래라고 했다. 그 뒤로도 변함이 없는지.


여전히 그 곡이에요. 그 이후에도 「기억상실」 같은 소울을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노래가 가장 제 스타일이라고 여깁니다. 김도훈 작곡가의 곡인데 그 뒤로도 그분의 곡을 자주 불렀죠. 「사랑했으니.. 됐어」도 그렇고요.

 

부르기 어려운 노래가 있다면.


「그대 돌아오면」. 지금은 하나도 안 힘든데 (웃음) 당시 녹음할 때부터 걸리는 부분들이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마스터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죠. 그러다 보니 이후 라이브 하면서도 트라우마처럼 자꾸 떠올랐죠. 연구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코러스의 피치가 기본적으로 다 높다 보니 사람들이 그런 전개를 많이 기대한다. 높이에 부담이 적으면서 스타일을 살릴 수 있는 ‘포크 발라드’를 시도해보는 게 어떨까.


고려 중이에요.

 

데뷔 당시에는 거미가 독보적이었지만, 지금은 후배 알앤비와 소울 보컬리스트들이 즐비하다. 혹시 눈여겨보고 있는 후배 가수가 있나.


이하이가 잘하는 것 같아요, 에일리도 잘하고. 갖고 있는 게 많아서 계속 발전할 친구들이에요. 자이언티와 크러쉬도 인상적이고.

 

자신의 앨범 중 어떤 게 맘에 드나.


다 좋지만 1집 <Like Them>과 2집 <It’s Different>에 좋은 노래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알려진 곡도 많고.

 

1, 2집이 좋은 앨범이긴 한데 희생이 만만치 않았다. 「미안해요」의 경우 리듬과 보컬이 제대로 착 붙은 노래는 아니라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미안해요」, 「남자라서」처럼 EDM 리듬과 힙합과 잘 결합한 스타일을 바라는 팬들도 있지 않을까.


그래요. 지금 이번 앨범을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웃음)

 

팝이든 가요든 영향을 줬던 음반 3장 정도를 꼽는다면.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가수는 김건모. 진짜 좋아했어요. 음반으로 치면 김건모 3집이죠. 서태지와 아이들도 당연 많이 들었죠. 서태지와 아이들은 1, 2집. 외국 음악을 커서 들었어요. 예민한 학창시절에 우리 음악을 더 많이 들었죠. 다 엄마의 영향이지만 임희숙, 「진정 난 몰랐네」와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의 임희숙 선생님 그리고 패티김 선생님의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왜 이런 게 좋은 지도 모르고 들었던 같습니다. 분명 트로트도 듣고 댄스도 들었을 텐데 그런 쪽의 음악들이 기억에 남아요. 한국의 소울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즐겨 듣는 음악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흐름을 읽어야 하니까 최신 팝을 자주 듣게 됩니다. 사실 공부하듯 듣는데, 그 이후에는 다시 옛날 노래로 돌아가게 돼요. 팝을 들어도 그래요. 로린 힐(Lauryn Hill)을 너무 좋아하는데 앨범이 너무 안 나오잖아요. 팬들이 제가 앨범을 안내면 이런 마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요즘 것을 챙겨야 하는 걸 알지만 솔직히 재미는 없어요.

 

지난해 <슈퍼스타K>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했다. 가수 활동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을 것 같은데 어땠나.


섭외 왔을 때 영광이란 생각을 먼저 했죠. 프로그램의 인기가 예전보단 식었어도 그래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나간다는 게 내가 열심히 잘해오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편으로는 이것도 느꼈죠. 이렇게 노래를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이 다 가수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요. 안타깝죠. 진짜 잘 하는 친구들에게는 좀 더 잘 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싶고 어떻게든 빨리 같이 해보고 싶고 한데, 누가 봐도 노래한다고 되는 게 아닌 친구들이 계속 이 꿈만 가지고 있으면 어떡하나, 꼭 노래 말고도 음악을 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나, 그런 걸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기쁜 순간도, 속상한 순간도 있었어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또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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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거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운명 같은 것.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운명이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노래하려고 태어난 것 같은. 제가 살아온 인생사가 그리 길진 않지만 노래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살아온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계속 노래 불러야죠.

 

사진 제공: CJeS 엔터테인먼트
인터뷰: 임진모, 정민재, 현민형
정리: 임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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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오늘의 책

끝나지 않는 오월을 향한 간절한 노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간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철저한 노력으로 담아낸 역작.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 고통받았지만,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면서 그 시대를 증언한다.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어떤 사랑에 대하여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자 가장 최근작. 말해지지 않는 지난 시간들이 수십 년을 건너 한 외딴집에서 되살아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작품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한강의 대표작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자 한강 소설가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섬세한 문장과 파격적인 내용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가 되고자 한 여성의 이야기.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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