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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정서경 작가 “관습적인 것은 금지”

박찬욱 감독, 정서경 작가 인터뷰 영화 <아가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친절한 금자씨> 각본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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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걸 안 한다는 게 중요해요. 지난 영화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요. 어떤 멋있는 장면을 더 만들어서 그것이 자랑스러울 때보다는 그 영화에 포함된 부족한 장면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압도적이에요. 때문에 그것이 나는 더 중요해요.

시작은 팬들이었다. 영화 <아가씨>에 열광한 팬들은 급기야 각본집 출간을 요청한다. 그 요청이 흥미로워 『아가씨 각본』을 정식 출간한 것이 2016년 8월, 영화 개봉 두 달 만이었다. 막상 책을 받아보자 “손에 딱 잡히는 그런, 작은 책이 귀여워서 더 내고 싶어”진 박찬욱 감독은 정서경 작가와 작업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친절한 금자씨>의 각본집을 모두 책으로 냈다. 12월, 팬들을 위한 선물 같은 책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친절한 금자씨>, <박쥐>를 가리켜 ‘정서경 3부작’이라고 했지만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의 작업은 3부작으로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시간이 맞는 한” 계속될 것이다. 어떤 대사가 누구의 것이라고 구분 짓기 무색할 만큼 완벽한 공동의 작업. 『친절한 금자씨 각본』 ‘작가의 말’에서 박찬욱 감독이 묘사한 둘의 작업이 아주 인상적이다. ‘컴퓨터 하드는 공유하면서 모니터와 키보드를 각자 한 벌씩’ 가지고 ‘한 사람이 자판을 두드리면 상대 모니터에도 글자가 쳐’지는 식이다. ‘감독이 쓰면 작가가 지우고, 작가가 주어를 쓰면 감독이 목적어를 쓰고.’

 

인터뷰 말미에 서로에 대해 한 마디 씩 해주기를 청했는데 박찬욱 감독은 어색한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답은 듣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다. ‘내 영화에도 여성성, 아이다운 천진함, 동화적인 아름다움, 낙관주의, 설레임, 감사하는 마음, 쓸데없는 공상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면 그건 정서경에게서 비롯한 것’이라는 감독의 말은 그 자체로 무한 신뢰와 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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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내 각본을 위해서는


책날개 저자 소개 부분을 보면 네 권 모두 정서경 작가님을 먼저 소개하고 있어요. 어떤 의도로 봐도 좋을 것 같은데요. 각본집이기 때문에 감독보다 작가에게 더 무게를 둔다는 의미일까요?


박찬욱: 네, 맞아요.


정서경: 아마 쓰는 순서 때문일 거예요. 제가 조사 작업을 먼저 시작하니까요. 초고를 제가 쓰는 경우가 많아서요. 

 

무엇보다 극과 글이 대단히 다른 느낌을 줘서 놀랐습니다. 영화와 각본, 말하자면 아주 가까운 친척 같은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서경: 반대되는 작업을 한 것 같아요. 일단 각본을 쓸 때는 머릿속에 이미지가 있고 제가 그것을 지문이나 대사로 쓰죠.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반대예요. 각본을 읽으면서 이미지를 떠올려요. 그렇게 생각하면 독자 입장에서는 또 다른 영화를 만드는 작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궁금해요. 각본을 쓸 때는 이것이 출판될 거라 생각도 못했고 일단 영화를 찍을 때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공통의 설계도를 가지고 만들도록 염두에 두고 쓴 건데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읽어서 또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때 어떨지 궁금하죠.

 

박찬욱: 각본을 쓴다는 것은 투자자나 일을 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쓰는 것이죠. 그들이 읽고 돈을 대고 싶다,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게 첫째예요. 둘째는 읽고 영화를 결심했을 때의 느낌과 영화가 완성되어 나왔을 때의 느낌이 너무 다르면 안 된다는 건데요. 이런 영화를 상상하고 돈을 댔는데 엉뚱한 영화가 나온다면 곤란하죠. 그건 좋고 나쁜 문제와 다른 거고요. 결국 가급적 최종 완성된 영화에 가깝게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도록 쓰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이고, 무슨 색깔이고, 이런 것까지 다 쓸 수는 없는 거니까요. 적당하게 어느 수준으로 쓰느냐, 그게 좀 어려운 문제죠.

 

각본이 책으로 출판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요. 출간 결심은 어떻게 하시게 됐나요?

 

박찬욱: <아가씨>의 팬들이 각본을 책으로 내달라는 요청을 했고, 그래서 책을 냈는데요. 출판사에서 판형을 참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손에 딱 잡히는 그런, 작은 책이 귀여워서 더 내고 싶어지더라고요.

 

정서경: 사실 저는 좀 거리꼈었어요. 처음부터 출간을 생각했다면 다르게 썼을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한 시나리오의 목적이나 독자와는 너무 다르잖아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쓴 거고 그렇게 있었으면 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고 하니까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막상 책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어보고, 책이 나온 것을 보니까 새로웠어요. <친절한 금자씨>는 각본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책으로 다시 봤거든요. 다시 보니 스스로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감독님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영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더 잘 썼으면 좋았을 텐데요.(웃음)

 

각본 자체로도 굉장히 문학적이에요. 그건 분명해요.


정서경: 영화를 본 사람들이 대부분 대사가 문어체라고 하는데, 막상 책으로 나왔으니까요. 오히려 더 나아보일 수도 있겠죠? 

 

박찬욱: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쓰진 않았는데 그래도 문장을 정련하는 것은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정서경: 그런 의미에서 보람 있다는 생각은 했어요. 왜냐하면 감독님이 작업 시작하기 전에 교정부터 보시거든요.(웃음) 이것이 문장으로써 부족한 점이 있는가, 하는 부분이에요. 그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문장 자체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거든요. 띄어쓰기, 행간도 엄청 고민하시고요. 저희만 보는 시나리오라도 감독님은 언제나 아름다움과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완벽함을 추구하세요. 이번 기회에 그런 걸 보여주게 됐어요.

 

대단히 인상적인데요. 그런 작업 비화가 흥미롭기도 하고요.


박찬욱: 저는 심지어 페이지의 레이아웃까지 생각해요. 기존의 시나리오와는 판형이나 폰트 모든 게 다 바뀌어 책이 나왔기 때문에 전혀 다르지만요. 그냥 내가 쓰는 내 각본을 위해서는 한 페이지 전체 모양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런 것을 신경 써요. 한 눈에 봤을 때 모양이 좋아야 하니까 거기에 시간을 많이 쏟죠.

 

정서경: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거란 듯이 말이에요. 감독님은 만약 직업이 다섯 개 정도라고 한다면 그 중 하나는 편집자일 거예요. 엄청 만족하셨을 거예요.

 

박찬욱: 작가와 많이 싸웠을 거예요.(웃음) 후배나 동료가 시나리오 봐달라고 하면 그것부터 보거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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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잘하세요”는 실제 경험

 

두 분의 영화에 특히나 화제가 된 대사들이 많잖아요. <아가씨>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도 그 중 하나죠. 이런 뇌리에 박히는 대사들은 어떻게 탄생하는 걸까요?


정서경: 그건 제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세주’라 해놓고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구원자’로 바꿔주셨어요. 그래, 내가 쓰려고 한 게 이 말이었다 싶었어요. 그런데 그 말이 저 혼자 썼으면 끝까지 안 떠올랐을 거예요. 대부분 이렇게 써왔어요.

 

박찬욱: 어떤 한 문장을 누가 썼느냐가 별로 의미가 없어요. 같이 만드는 부분이 많아서요. 처음에 이야기를 많이 나눈 다음 초고를 서경 작가가 쓰고요. 또 이야기해서 그 다음 쓰거나 초고를 놓고 같이 쓰거나 해요. 마지막 손질을 같이 하고요.

 

여러 작품을 꾸준히 함께 해올 수 있었던 데에는 그렇게 호흡이 잘 맞았던 이유도 컸겠죠.


정서경: 제가 맞춤법을 많이 틀리지 않는다는 게(웃음).

 

박찬욱: 그게 중요했죠.(웃음) 
 
대사들의 탄생 비화를 조금 더 듣고 싶은데요. <친절한 금자씨>의 “너나 잘하세요”는 어떤가요?

 
정서경: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거기 다른 대사가 있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영 마음에 안 들어 하셨죠. 그러다가 감독님이 쓰신 거예요. 그냥 “너나 잘해”라고 쓸 수도 있었지만 “너나 잘하세요”가 된 거예요. <친절한 금자씨>의 어떤 대사들은 그렇게 뭔가 그 자리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집에 가셔서 뚝딱 써오신 경우가 있었어요.

 

박찬욱: 제가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대사는 있어요. “가불은 불가” 이거예요. 번역 불가능한 대사라서 아주 만족하죠. “너나 잘하세요”는 제 실제 경험에서, 제 입에서 나온 말인데요. 충무로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거절당하는 생활을 해서 생활도 힘들고 그럴 때예요. 친구가 당시 저보다 현실 감각이 좋아서 돈을 잘 벌었어요. 그 친구가 저한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투자자가 좋아할 만한 걸 써야 한다고, 그랬을 때 제가 한 말이었어요. 거의 절교 선언 비슷한 거였죠. 나만큼 그쪽도 그 말을 강력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굉장히 무거운 말이었군요.


정서경: 네 권 각본을 다 읽고 깨달은 가장 큰 부분은 감독님이 그 친구의 충고를 절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거예요. 단 한 번도 투자 받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다는 걸 이번에 읽으면서 강하게 느꼈어요. <친절한 금자씨> 같은 영화는 결론이 진짜 애매했는데요. 그럴 때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관습적인 결론이 있거든요. 감독님은 그게 너무 싫었던 거예요. ‘이거야’ 하는 게 없을 때도 절대로 그렇게 돼선 안 된다고 하는 게 그때도 읽혔어요. 새로우면 좋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요. 감독님처럼 거절당한 경험도 많고, 몇 개의 영화를 상업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그렇게 하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게 되면서 그런 것들이 되게 놀라웠어요. ‘가불은 불가’의 느낌이죠.(웃음)

 

박찬욱: 후에 투자 받기 어려워지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래요. 관습적인 것은 금지. 가불은 불가 식으로 말하자면, ‘지금은 금지’예요.

 

특히 어떤 이야기가 자극이 되나요? 어떤 장면들이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는지 궁금해요. 


정서경: 사람들이 박찬욱 감독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의식을 말할 때 속죄, 복수,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저는 뭔가 꿰뚫는 하나가 있다면 그게 인간의 품위라는 생각이 들어요. <박쥐><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최근의 <아가씨>까지 이 사람들이 어렵고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그냥 패배할 수도 있지만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다면 품위가 아닐까 해요. 금자씨가 속죄하는 게 유가족 관련된 것일 수도, 제니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문제잖아요.

 

박찬욱: 그렇지만 <아가씨>에서 백작이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라고 한 건 그런 것은 아니에요.(웃음) 그건 그냥 한심한 소리일 뿐이에요.

 

품위, 지금 들으니 아주 새롭네요. 개인이 품위를 지켜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때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정서경: 우리 주인공들이 늘 극단적 상황에 처하거든요. 그럴 때 많은 영화들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목표에 이를 것인가’ 하는 식의 질문을 하죠. 그 와중에 감독님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품위를 지키고 끝나는 식인 것 같아요. 품위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러나 이들이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방향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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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렬한 장면은 없어야겠다


창작자로서 자신의 작업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정서경: 저는 관습적인 건 괜찮아요.(웃음) 요즘 생각하는 것은 기계를 손보는 것처럼 늘 최선의 컨디션으로 날마다 일해야겠다는 생각이거든요.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가 될지 늘 연구하고 있어요. 원래 인생 전반기가 그렇지 않았거든요. 살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시나리오를 쓰는 게 어렵더라고요. 한 사람의 에너지를 최대로 가동해도 힘들더라고요.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써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거예요.

 

박찬욱: 한심한 걸 안 한다는 게 중요해요. 지난 영화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요. 어떤 멋있는 장면을 더 만들어서 그것이 자랑스러울 때보다는 그 영화에 포함된 부족한 장면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압도적이에요. 때문에 그것이 나는 더 중요해요. 고만고만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대단한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를 만들 수도 있는데요. 졸렬한 장면은 없어야겠다는 그것이 목표고요. 글을 쓸 때도 문장 중에 그런 게 있으면 안 되니까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것이야말로 쉽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박찬욱: 어려워요. 영화를 찍을 때 훌륭한 장면을 만드는 것은 비교적 쉬워요. 영화 전체에서 한심한 장면을 하나도 안 만드는 것보다 쉬워요. 영화는 많은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 요소 중에 뭔가 하나가 빠질 수 있거든요. 음악이 안 좋을 수도 있고, 이 배우가 좋은데 저 배우가 안 좋을 수도 있고요. 요소가 워낙 많으니까요. 그런 게 있죠. 그런 면에서는 <아가씨>가 그런 장면이 가장 적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아가씨>, <친절한 금자씨>, <박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모두 여성의 이야기들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남성 중심 서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단연 돋보이죠. 


정서경: 저는 공교롭게도 여자라 어려움이 적은데 감독님이 대단하신 거죠. 영화 작업을 하면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게 성별의 문제였어요. 제 직업은 작가지만 킬러다, 회사원이다, 이런 건 극복하기 쉽거든요. 그런데 남자라고 생각하기가 정말 어렵더라고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쓸 때마다 매번 벽을 실감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감독님은 대단하죠.

 

박찬욱: 제가 일하는 곳에 여자 동료들이 많고요. 친한 남자 동료 중에도 남성성이 강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송강호 씨가 좀 남성적인데 점점 안 그렇게 돼가고 있고요. 나는 내가 여성의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고요. 그냥 한 개인의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해요. 그것뿐이에요. 내가 남자로서 여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너무 어려워지니까요. 그냥 개인이라고 생각해요.

 

박찬욱 감독님은 얼마 전 <씨네21> 영화계 내 성폭력 대담에 참여하셨어요. 기사가 큰 화제였습니다. 솔직한 고백이나 반성의 말도 많았고요. 일련의 문제들은 결국 권력 문제기도 한데요. 이와 관련해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박찬욱: 모든 성폭력 문제가 권력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고요. 개인의 일탈에서 벌어진 일일 때도 있겠죠. 그러나 다른 모든 범죄라든가 차별 등과 다르게 이것이 진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인 거죠. 권력 관계 때문에 벌어지는 것 말이에요. 좌담 제안을 하는 <씨네21> 측에서 섭외가 힘들다고 했어요. 그 이유를 나중에 저도 알게 됐는데요. 하겠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다 말리더라고요. 그런다고 저도 안 할 수는 없고, 좌담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아가씨>를 만든 사람으로서 회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거고요. 그 전부터 좌담이 나올 때마다 전부 읽었어요.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학생들, 여학생들이 지레 겁먹고 현장에 진출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과 일을 하다가 그런 일을 겪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였어요.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죠. 하고 싶은 얘기는 거기서 다 했어요.

 

정서경: 첨예한 갈등이 있는 느낌인데요. 저는 낙관적으로 생각해요. 아주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처럼 여성의 권익이 올라온 적이 없었죠. 남성의 시각에서 보면 위기감을 많이 느끼기 때문에 첨예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동등해질 수밖에 없고 또 더 많은 갈등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학교 학생 시절 술자리에서 어떤 선생님이 저한테 “조금이라도 예쁜 여자는 시나리오 작가를 하면 안 돼, 왜냐하면 따먹히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말에서 그 사람의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긴 해요. 그 사람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남성이었나 보죠. 다른 사람의 진입을 그렇게 잠깐이나마 시험하는 느낌이었겠죠. 어쨌든 그렇게 해서 막아질 문제도 아니니까요. 앞으로는 더 여성의 입장이 강력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쓸 때 자아가 달라지는 면이 있지 않나요? <아가씨>, <친절한 금자씨>, <박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중 어떤 이야기를 쓰는 자아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들려주세요.


박찬욱: 다 다른 이야기라 꼽을 수는 없는 건데요. <박쥐>는 오랫동안 생각했던 작품이라 그런지 그 작품이 제일 커요. 그 안에 내 인생의 삽화가 들어있는 것은 아닌데 성장 배경에서의 천주교의 영향이라든가 하는 식이죠. 어떤 장면은 일부러 좀 비슷하게 한 게 있기도 해요. 신부가 화장실로 쳐들어와서 태주(김옥빈)한테 내가 흡혈귀라서 싫으냐, 그런 이야기를 할 때의 그런 모습은 제가 부부 싸움할 때(웃음)와 비슷하고요.

 

(분을 참는 상현, 손에 쥔 세면대 귀퉁이가 빵 떼어지듯 뚝 떨어진다. 눈이 커지며 벌벌 떠는 태주, 문고리를 잡는다. 상현, 태주 손을 간단히 떼어내더니 구석으로 밀어붙이며)


내가 뱀파이어인 게 뭐가 중요해요? 태주씨, 내가 신부라서 날 좋아했어요? 아니잖아요, 거봐요… 신부라는 건 그냥 직업이잖아요. 그런 거처럼 뱀파이어인 것두 그냥… 그냥 식성이나… 뭐… 생활 리듬의 문제 같은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그런 게 뭐 중요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뱀파이어라서 싫어요? 응? 내가 뱀파이어가 안 됐으면 태주씨랑 잤을 거 같아요? (『박쥐 각본』, 56쪽)

 

정서경: 이런 이야기를 감독님은 싫어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모님에 대한 애정의 형태와 <박쥐>에 표현된 애정의 어떤 것이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웃음) 에피소드가 흡사한 건 아닌데요. 온도나 질감, 이런 거겠죠? 저는 <친절한 금자씨>가 재미있더라고요. 각본을 다시 읽으니까 코미디였구나 갑자기 깨달았어요.(웃음) 그렇게 생각하니 재미있었어요.

 

정서경 작가님 처음 뵙지만 말씀도 시원하게 하시고, 밝은 면이 느껴졌어요.


정서경: 제가 원래 코미디를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게 <아가씨>를 쓰기 직전이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하면서 코미디에 재능이 없다는(웃음) 걸 깨달았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는 못하지만요. 다만 영화가 20-30% 정도 코미디가 아니면 못 쓰겠더라고요. 전에 감독님이 끔찍한 장면이 포함된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코미디가 들어갈 수 없잖아요.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친절한 금자씨>는 매번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노력하고 있었다는 게 보였어요.

 

박찬욱: 코미디가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데에서 그걸 끌어내는 게 진짜 능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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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주 하는 말


<채널예스>에 이경미 감독님이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데요. 두 분은 영화, 각본 작업과 별개로 글을 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정서경: 저는 아까 말씀 드렸는데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이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거예요. 서문도 안 쓰면 안 될까, 엄청 생각했어요. 쓰면 시나리오를 못 써요. 다년 간의 경험으로 깨닫게 된 건데요. 엄청 절약해야 하더라고요.

 

박찬욱: <공동경비구역 JSA>가 제 세 번째 영화인데요. 처음으로 흥행에 성공할 조짐이 보였을 때 가장 먼저 한 생각이 ‘이제 글 안 써도 되겠다’는 거였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 먹고 살기 위해 하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악몽 같은 기억인 거죠.

 

박찬욱 감독님은 사진집 『아가씨 가까이』도 내신 바 있잖아요. 한 인터뷰에서 “나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지 않는다면 사진작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사진과 관련한 특별한 계획도 있나요? 


박찬욱: 그것은 글 쓰는 것과 다르죠. 좋아서 하는 일이죠. 일단 배우들을 현장에서 찍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한참 나중 계획이지만 전시를 해볼 생각이 있고요. 그 밖에 풍경은, 아직 계획은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느 도시에서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고 있어요. 언젠가 전시를 하려고 해요. 사실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집 아니면 현장에 있는 게 제일 좋은데요. 영화제나 홍보 때문에 여러 도시를 다녀야 하죠. 사실 글 쓰는 것보다 훨씬 하기 싫은 일인데요. 그나마 어느 도시든지 가면 하루나 이틀 자유 시간을 내서 사진도 찍고 음악회도 가는 낙으로 견디는 거죠.

 

좋아해서, 여러 번 읽은 책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세요?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서경: 최근 토니 모리슨을 발견했어요. 대학교 때도 읽었던 것 같은데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페이지가 안 넘어가서 끝까지 못 읽었거든요. 요즘은 엄청 잘 읽히더라고요. 최근 어머니의 어떤 면에 관한 드라마를 쓰고 있는데요. 자식을 키우는 심정에 관한 문학 작품을 떠올려보려고 하는데 정말 떠오르지 않았어요. 고민하던 차에 토니 모리슨을 발견하고 이게 내가 찾던 거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에서도 비슷한 것을 발견했는데요. 작가가 아들을 삶의 중심에 놓는 과정이 감동적이더라고요. 몇몇 장면도 그랬는데요. 밤새도록 아들이 아파할 때 곁에서 시를 읽어요. 그러면서 세상에 고통을 표현하는 단어가 이렇게 많다는 것과 아들이 느끼는 고통을 발견해나가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박찬욱: 반복해서 읽은 책은 별로 없고요. 번역 소설을 많이 읽어요. 필립 로스 좋아하고요. 커트 보네거트 좋아하죠. 에밀 졸라(웃음) 좋아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는 존 르 카레예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작품이요. 제가 미국인이었다면 한국 소설을 좋아했겠지만 저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큰 것 같아요. 외국 사람이 쓰거나 혹은 미래의 세계를 쓴 작품들에 더 관심이 있어요. 그나마 많이 읽었던 것이 있다면 아마 필립 K. 딕의 단편들일 거예요. 그의 사고방식이 독특해서 자꾸 읽어도 재미가 있죠. SF 소설 많이 읽어요. SF 아주 좋아해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나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질문 드려요.


정서경: 저는 양치 잘하라고 해요.(웃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보면 엄마가 양치 잘하라고 하잖아요. 얼마나 좋은 습관이에요. 저희 아이가 사랑하는 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첫 번째가 뽀뽀해주는 것, 두 번째가 양치하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하도 양치하라고 하니까요. 잘 때도 입 벌려서 양치를 시켜요.

 

박찬욱: 글쎄요. 남한테 그런 이야기를 안 하는 편인데요. 소주 많이 먹지 말라는 얘기는 하죠.(웃음) 젊을 때 너무 많이 마셔서 안 좋다는 걸 알아요.


 

 

아가씨 각본정서경,박찬욱 공저 | 그책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각본을 책으로 엮었다. 정서경 작가와 박찬욱 감독의 공동 집필로 쓰인 이 각본은, 섬세하고 울림이 있는 대사로 다시 한 번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영화의 디테일한 결을 만들어낸 지시문과 해설을 읽는 재미 또한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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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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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박노해 시인의 첫 자전 에세이

좋은 어른은 어떤 유년시절을 보냈을까? 어두운 시대를 밝힌 박노해 시인의 소년시절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가 출간됐다. 지금의 박노해 시인을 만들어 준 남도의 작은 마을 동강에서의 추억과 유소년 “평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33편의 산문과 연필그림으로 담았다.

도도새 그림 속 숨겨져 있던 화가의 삶

도도새 화가, 김선우의 첫 에세이. 지금은 멸종된 도도새를 소재로 현대인의 꿈, 자유 등을 10여 년 동안 표현해 온 김선우. 이번에는 무명 시절에서부터 ‘MZ 세대에게 인기 높은 작가’로 꼽히기까지 펼쳐 온 노력, 예술에 관한 간절함, 여행 등을 글로 펼쳐 보인다.

왜 수학을 배워야 할까?

계산기는 물론 AI가 거의 모든 질문에 답하는 세상에서 왜 수학을 배워야 할까? 질문 안에 답이 있다. 수학의 본질은 복잡한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것이다. 미래 예측부터 OTT의 추천 알고리즘까지, 모든 곳에 수학은 존재하고 핵심 원리로 작동한다. 급변하는 세상, 수학은 언제나 올바른 도구다.

기회가 오고 있다!

2009년 최초의 비트코인 채굴 후 4년 주기로 도래한 반감기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과거 세 차례의 반감기를 거치며 상승했던 가격은 곧 도래할 4차 반감기를 맞아 어떤 움직임을 보일 것인가? 비트코인 사이클의 비밀을 밝혀내고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전략을 제시한다.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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