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엽 “회사가 부도난 후, 나는 벌레가 되고 싶었다”
『파산수업』의 저자 정재엽, ‘무너진 우리를 다시 세우는 문학의 힘’을 말하다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해버리잖아요. 저는 부도가 난 다음날 정말 벌레가 되고 싶었어요. ‘벌레가 돼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벌레가 될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서 깊은 절망감을 느꼈어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 현실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약간 괜찮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주인공에게 동질감을 느꼈지만 그게 위안이 된 거죠.
“파산한 마당에 문학이 다 뭐냐”고 사람들은 그를 힐난했다. 책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둬 현실을 바라보면 수많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일구어 온 회사는 부도를 맞았고,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매일 같이 채권자들이 찾아와 분노를 쏟아냈다. 밀린 월급과 함께 일터를 잃게 된 직원들은 하나 둘 곁을 떠나갔다. 오랫동안 마음을 나눈 친구조차 멀어져 갔다. 급기야 경영 책임자인 아버지가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공허한 질문을 품게 됐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도 덮쳐왔다. 그럴수록 그는 책을 파고들었다.
한 때 그는 스스로가 상위 1퍼센트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중소 제약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는 강남에 100억 원 상당의 사옥을 소유한 건물주였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는 강남 8학군에서 초중고를 다녔고, 국내 명문 사립대를 졸업한 후 뉴욕대학교에서 의료경영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망한 집안의 자손”으로 전락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회사는 약속어음 수억 원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를 맞았고, 그는 아버지 대신 회생 관리인이 되었다.
법원으로 출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관련 법 조항과 판례만 살펴보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그는 늘 품속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이혜인의 『희망은 깨어있네』, 위다의 『플랜더스의 개』,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 열아홉 권의 책들이 그의 곁을 지켰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거라고, 누군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책에 기댄 덕분에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잠시 숨통이 트였다. 그 속에는 절망의 순간을 버티는 수많은 인물들이 있었고, 그들과 만나고 나면 ‘이런 일쯤은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책을 읽으며 위안과 위로를 얻었고, ‘네가 받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속삭임을 들었다.
결국 회사는 성공적으로 회생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아버지는 올 여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고, 그와 함께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수입하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돌아보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희망이 잠들어 있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 녹록지 않은 ‘수업’을 들으며 값진 졸업장을 거머쥔 주인공 정재엽 씨는 최근 『파산수업』이라는 이름의 책을 출간했다. 그의 진솔한 경험을 녹여낸 이야기에는 ‘무너진 우리를 다시 세우는 문학의 힘’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회사가 부도난 후, 나는 벌레가 되고 싶었다
집필을 결심하신 순간은 언제였나요? 회사가 법정 관리에 들어갈 때였나요?
아뇨, 그때는 책을 쓸 생각을 안 했어요. 법정 관리에 들어가면 정말 정신이 없거든요. 회사가 M&A가 되고 법정 관리가 종결됐을 때 판사님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판사님께서 ‘나중에 책 한 권 쓰셔야겠어요, 너무 드라마틱한 이야기잖아요’ 하시더라고요. 저희가 처음 기업회생을 신청했을 때 기각결정이 났고, 이후에 회생 절차를 밟아서 과정을 끝마친 거거든요. 그 전에는 아버지가 구속되셨고, 누님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암 판정을 받으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런 어려움들을 잊고 있더라고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잊고 싶었던 거예요. 너무 괴로운 기억이니까요. 어느 순간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파산수업』에 담긴 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다른 분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저의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이 이야기가 사회적인 틀 안에서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첫 번째로는,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저도 처음에 문제가 닥쳤을 때 너무 당혹스러웠거든요. 가장 두려운 건 미래가 안 보이는 거예요. 대책이 안 보이는 데에서 공포감을 느끼는 거죠. 그 공포 때문에 현실을 잊고 싶은 거고요.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는데, 저 또한 그랬어요. 그리고 갑자기 문제들이 생기니까 가족 간의 분열이 일어나더라고요. 그런 상황을 겪고 계신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파산에 직면하신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죠?
저희 같은 중소기업 중에는 법정 관리에 들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그런데 끝까지 과정을 마쳐서 종결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저희의 경험을 경제학적인 혹은 사회 현상 안에서의 예시로 제시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언급하셨던 것처럼, 파산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신데요. 저자님께서는 책을 찾으셨어요. 이유가 있었나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죠. 저도 마포대교에 갔었어요. 그런데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데에는 학습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종교가 있으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생명은 소중하다는 게 도덕책에 나오는 이야기 같지만, 저를 막아주는 방어 기제가 됐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리고 당장 해결해야 될 일들이 많았어요. 저는 33건의 민ㆍ형사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법원에 출두해야 했어요. 해결해야 되는 일들은 많은데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저만의 시간도 필요했던 거죠. 그러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고 있기가 힘드니까요.
책을 읽고 나면 숨 고르기가 되시던가요?
잠깐씩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는데요. 책에 빠져 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렇다 보니까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로 집중할 수 있는 패턴을 찾게 됐어요. 처음에는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책을 찾았다고 볼 수도 있어요. 일탈로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죠. 그런데 그때 저한테는 그런 일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걸 수도 있어요. 그런데 현실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그 행위 자체가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방어막이 된 것 같아요. 너무 현실에 빠져 들면 비참하고 괴로운 마음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한 발짝 떨어져 있어 보니까 진전이 없더라도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회사가 부도났을 때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셨다고요.
소설을 보면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해버리잖아요. 저는 부도가 난 다음날 정말 벌레가 되고 싶었어요. ‘벌레가 돼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벌레가 될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서 깊은 절망감을 느꼈어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 현실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약간 괜찮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주인공에게 동질감을 느꼈지만 그게 위안이 된 거죠.
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인물을 만났을 때에도 위안을 얻으셨을 것 같아요. 어떠셨어요?
소설의 주인공들 중에는 저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일을 겪는 사람들도 있었죠. 예를 들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라는 아이는 로자 아주머니가 죽었을 때 지하 벙커로 숨기잖아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장을 해주고 향수를 뿌려주죠. 결국에는 시체가 썩는 냄새 때문에 경찰이 들이닥쳐서 알게 되고요. 그 작품을 읽으면서 ‘그래도 나는 모모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들었어요(웃음). 그걸 좋게 말하면 위안인데, 어떻게 보면 위안이라기보다는 일차원적인 우월의식이었던 것 같아요.
「서시」가 알려준 ‘부끄럽지 않은 일’
『소망 없는 불행』은 가슴을 졸이면서 읽으셨을 것 같아요. 페터 한트케가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한 이후에 쓴 산문이잖아요.
저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어머니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실까 봐 공포감을 느꼈어요. 저희 집이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에 어머니가 너무 절망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지만, 『소망 없는 불행』을 읽으면서 어머니가 자살하셨을 때 아들이 느끼는 뼈 깊은 절망감을 대리적으로 느끼게 됐죠. 그러고 나서 현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우리 엄마는 씩씩하게 계시잖아’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후에 저희 아버지가 갑자기 구속이 되셨을 때 어머니가 또 한 번 절망을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셨으니까 너무 감사했어요. 그때 느꼈던 감정을 안도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 권의 책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당시 읽으셨던 책들은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 같아요.
너무 다르죠.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있었나요?
『데미안』이요. 책에서는 모테의 「루앙 대성당」과 ‘푸가’라는 음악의 형식에 빗대서 썼어요. 「루앙 대성당」은 같은 성당을 두고 각기 다른 순간에 본 모습을 담은 작품이잖아요. 푸가는 화성의 반복과 변화를 통해서 점점 발전해 가는 거고요. 저에게는 『데미안』이 그런 것 같아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여러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다르게 느껴졌거든요. 사춘기 때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우정에 조금 더 집중했다면, 대학생 때는 에바 부인을 통해서 자아실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은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 회생 절차를 밟으면서 읽었을 때는 또 달랐어요. 매번 알을 깨고 나가는 다음 관문으로써의 완결성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유가 있었을까요?
저는 이 회생 절차를 마쳐야만 하잖아요. 극복해야만 하잖아요. 그런데 데미안도 성인으로 나아갔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어려움이나 외로움이 어느 정도 채워져야 되거든요. 그래야 다음으로 잘 넘어갈 수 있죠. 그것들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넘어가게 되면 그 공간은 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그만큼 완전한 인간상이 되는 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생의 기간 동안, 굉장히 어렵지만, 일단은 저한테 주어진 완전한 부분은 다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윤동주의 시를 떠올리신 순간도 있었잖아요. 그 계기가 된 사건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어요.
채권자 중 한 사람이 있었는데, 회사가 부도나기 전에는 저희 거래처였어요. 저랑 나이가 거의 비슷했는데, 제가 처벌불원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서 찾아갔었죠. 아버지가 구속되지 않게 하려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이렇게 처벌불원서 받으러 다니는 거 부끄럽지 않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 순간 저는 ‘이게 부끄러운 건가? 이게 부끄러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날 「서시」를 생각하셨죠.
우연히 생각이 나더라고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 날 저녁에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상상이 되더라고요. 그때 윤동주가 부끄러워했던 건 일본에서 한국어를 쓰기 때문이었거든요. 그건 본인의 선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한국어로 시를 쓰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고 한 거예요. 그때의 저도, 다른 사람은 부끄러운 짓을 한다고 봤지만, 저 자신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말이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기억됐겠네요.
평소에 읽었던 시가 정말 다른 의미로 다가온 거죠. 부끄러워졌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면서 ‘나는 부끄러운 일 하는 거 아니야, 윤동주처럼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배신감’
자금 부족과 빚 때문에 많이 힘드셨겠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사람에게 받는 상처였을 것 같아요.
그게 제일 힘들었죠. 그래서 책을 봤던 것 같기도 해요. 책 읽기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니까, 저를 100% 믿어주고 제가 해석하는 대로 따라오잖아요. 그래서 책이라는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면 적어도 배신은 안 당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사람에게 느꼈던 배신감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거든요. 이성적으로는 빚을 갚는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약간 있었어요. 그런데 감정적으로는 사람에게서 오는 배신감이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이제는 상처가 다 아물었을까요?
나중에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에는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도 조금의 서운함은 있죠. 그런데 서운한 걸 생각할수록 저만 괴롭더라고요. 약간 흙을 덮고 가는 것도 지혜로운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탈을 위해서 책을 본 측면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런 순간에 책은 어떤 말을 들려주던가요?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라고 말하던가요? 아니면 ‘본래 삶이란 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알려주던가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은 안 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때 저는 너무 무서울 정도로 배신감 아닌 배신감을 느끼는 상황이었거든요. 사실은 ‘이 상황들의 모든 원인은 너인데, 네가 위안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위안을 줘야 하지 않느냐’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저는 책에서 위안을 받으니까, 채권자들한테 진심으로 사과하고 위로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그들이 가해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저희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거거든요. 그런데 저는 피상적으로만 판단했던 거고, 이면을 보면 정말 위로 받아야 될 사람은 그들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솔직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어요. 그게 저한테도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됐고요.
기업회생 절차를 끝마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마도 그러한 ‘진심’ 때문에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도 도움은 됐겠죠. 왜냐하면 정말 속이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으니까, 그런 행위들이 신뢰감을 줬을 거예요. ‘돈은 없지만 열심히 하려고 하는구나’라는 느낌을 준 거죠. 그래서 나중에는 채권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회생 절차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저희는 상장회사에 M&A가 된 경우였는데, 그 과정에서도 회사의 가치를 산정하는 방식을 두고 컨설턴트나 회계사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거든요. (회사를) 비싸게 팔기 위해서 가치를 부풀리는 경우들도 많아요. 그런데 저희는 기업회생 과정에 있었고, 다른 옵션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치 산정에 있어서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그 점이 인수자 측에 굉장한 신뢰감을 줬다고 하더라고요.
현재는 의약품 수입업체를 운영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M&A 이후의 상황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지금은 3명의 직원들과 함께 의약품 수출입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요. 아버지께서 작년에 구속이 되셨다가 올해 광복절 특사로 나오셨어요. 사실은 그 일 때문에 굉장히 바빴어요. 어떻게 보면 후속 조치죠. 기업회생은 끝났지만 일신상의 변화들을 수습해야 했기 때문에 바쁘게 지냈어요. 동시에 책 출간 준비도 하면서 회사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요. 지금은, 회사 운영도 중요하지만, 저희들의 경험을 가지고 파산에 직면한 회사나 회생 신청을 앞두고 고민하는 회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한국경영총연합회에서 파산관리인 수업을 이수하기도 했고요. 의약품 수출입도 좋지만, 제가 실질적으로 경험한 것들로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괴로움과 같이 걷는 법을 배웠어요
위기와 절망의 순간을 버텨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유치하고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중요한 것 같아요. 결과는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만, 이 순간을 지나는 자세와 태도만큼은 최선을 다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주어진 숙제에 따른 걸 충실히 해 내면 결국에는 선한 방향으로 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 생각이 곧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정말 중요해요. 왜냐하면 갑자기 위기의 순간에 놓이면 자존감이 떨어지거든요.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되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보면 정신적인 파산이죠. 외부에서 오는 정신적인 파산이거든요.
주변에서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겠군요.
내가 나 자신을 믿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해주지 않아요. 아무도 ‘넌 해낼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그 사람들 끝났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받아내야 돼’라는 식이죠. 그러면 나는 누가 지키나요? 내가 지켜야죠.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한 보호막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그 보호막이 책이었던 것 같고요. 자기 자신을 믿고 ‘단기적으로 결과가 안 나와도 좋으니까 해 봐, 결국 너는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해야 돼요.
삶에서 어려운 순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잖아요. 힘들 때마다 떠올리는 책이 있으세요?
어떤 순간이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기는 한데요. 예를 들면, 아버지가 구속되시고 나서 첫 번째 편지를 보내주셨을 때 떠올렸던 책은 『작은 아씨들』이었어요. 작품 속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 때 남북전쟁에 참여한 자매들의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거든요. 그 장면이 떠오르더라고요. 그 이후에도 계속 아버지의 절절한 편지를 받으면서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떠올리기도 했어요. 법이 가지는 치명적인 약점에 대해 생각할 때는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을, 그리고 누님이 항암 치료를 받으실 때는 이혜인 수녀님의 『희망은 깨어있네』와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을 생각했어요.
책의 제목이 『파산수업』입니다. 파산이라는 ‘수업’이 남겨준 것은 무엇일까요?
‘괴로움을 맞이하는 법’ 같아요. 괴로움을 극복하는 법은 아니고요. 괴로움을 맞이해서 같이 가는 법을 알려준 것 같아요. 괴로움이 왔을 때 피하지 않고 같이 가는 맷집이라고 할까요. ‘(괴로움은) 피할 대상은 아니고 같이 갈 정도는 되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예요. 그게 수업이 준 가장 큰 교훈이겠죠. 그런데 괴로움을 그냥 맞이하는 게 아니라, 저는 책을 가지고 있으면 괴로움을 걸어둔 것 같아요.
독자들 중에는 예전의 저자님처럼 힘든 시기를 버티고 계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 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한 마디가 있으세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반드시 책이 아니어도 좋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얼 해도 된다는 거죠. 제 경우에는 그게 책이었지만, 굳이 책일 필요는 없어요. 춤도 괜찮고, 음악도 괜찮고, 수다도 괜찮고, 뭐든 괜찮아요. 그것이 무엇이든, 선한 도구이기만 하다면, 자신의 방식대로 방어막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꼭 있어야 될 거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방황을 하게 되고 앞이 보이지 않거든요. 어두운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보통 주저앉아요. 그러면 안 돼요. 오히려 더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러다 보면, 헤르만 헤세의 시에도 있지만, 해와 달과 별과 바람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줘요. 그들이 지팡이와 신발, 나침반이 되어준다는 거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만의 ‘무엇’을 통해서 소통을 놓지 않아야 돼요.
파산수업정재엽 저 | 비아북
괴로운 현실과 포기하고 싶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저자가 매달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쓸모없다고’ 느꼈던 취미 활동인 독서, 그중에서도 문학 읽기였다. 천일에 걸친 ‘회생’ 수업을 마친 저자는 이 책이 희망의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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