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근 “책 읽는 인류, 희귀종 될까”
『사피엔스의 미래』 인류의 앞날을 묻는 ‘빅 퀘스천’
앞으로 더더욱 인류 중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희한한 소수이거나 희귀한 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회 전반의 양극화와도 같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부의 양극화뿐만 아니라 지력의 양극화도 중요하게 봐야 할 추세입니다. 둘 다 사회 전체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알랭 드 보통,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독보적 경영저술가’ 말콤 글래드웰, ‘세계적 과학 저널리스트’ 매트 리들리. 이 시대 최고의 지성 4인이 한 자리에 모였다. 때는 2015년 11월, 장소는 캐나다 토론토. 토론회 ‘멍크 디베이트’에 참가한 네 사람은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팽팽한 설전을 벌였다. 전병근 번역가는 그 날의 흥미진진한 기록을 『사피엔스의 미래』 안에 담아냈다.
멍크 디베이트(Munk Debates)는 매년 두 차례, 봄과 가을에 토론토에서 열리는 토론회다.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나 전문가를 초대해 국제적인 이슈에 대해 찬반 토론을 진행한다. 2인 1조로 이루어지는 토론이 끝나고 나면 유료 청중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해 승리 팀을 결정짓는다. 2015년 가을에는 인류의 미래를 주제로 행사가 개최되었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작가와 저널리스트, 과학자 네 명이 참여했다. 인류의 앞날을 긍정적으로 전망한 ‘찬성 팀’에는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스티븐 핑커와 과학저널리스트 매트 리들리가, ‘반대 팀’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가인 알랭 드 보통과 독보적인 경영저술가 말콤 글래드웰이 자리했다.
『사피엔스의 미래』를 통해 이들의 대화를 생생하게 되살려 낸 번역가 전병근은 모바일 기반 지식문화 채널 ‘북클럽 오리진’의 지식 큐레이터다.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중심에 책이 있다’고 믿기에 “좋은 글을 읽고 나누는 지식문화 커뮤니티”를 지향하며 ‘북클럽 오리진’의 운영을 시작했다. <조선일보>의 사회부, 국제부, 문화부에서 일했으며 <조선비즈>의 지식문화부장을 지냈다. 앞서 인터뷰집 『궁극의 인문학』을 통해 토마 피케티, 유발 하라리, 김대식, 김정운 등 아홉 사상가들의 통찰을 들려줬던 그는 지식과 문화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인류의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인가
『사피엔스의 미래』는 2015년 멍크 디베이트의 내용을 엮은 책입니다.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토론 주제가 굉장히 흥미로워요. 번역을 하시면서도 뒷이야기가 궁금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나요?
멍크 디베이트는 수년 전부터 지켜봐 오던 행사인데 이번 토론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인류의 앞날을 묻는 이른바 빅 퀘스천이었어요. 관심을 갖고 있던 문제였고 네 명의 토론자도 다 대단한 사람들이었어요. 출판사 대표와 이야기하던 중에 번역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나서게 됐습니다. 국내에서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크게든 작게든 논의가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어요.
토론을 지켜본 청중들은 찬성 팀의 손을 들어줬는데요. 이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짐작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우선 캐나다가 선진국이니까 아무래도 세상에 대한 평가가 좀 낙관적이지 않을까 싶고요. 더구나 그때 캐나다가 총선을 치른 직후였는데 진보적인 자유당이 승리하면서 40대의 젊은 총리가 집권하게 됐단 말이죠. 전반적으로 기대에 차 있었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멍크 디베이트가 유료 행사인데, 돈을 주고 지적 토론을 즐길 청중이라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죠. 이런 점이 다 비관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번역을 시작할 당시에는 진보에 찬성하는 쪽에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번역을 끝낸 지금은 거의 중간 지점에 와 있다. 오히려 조만간 반대편으로 기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고 하셨어요.
거시적으로, 그리고 수치화할 수 있는 지표들로 보면 (인류의 삶은) 부인할 수 없이 나아졌다고 생각해요. 저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 봐도 그렇고, 사회적으로 보더라도 우리가 산업화나 민주화의 단계를 이른바 '모범적'으로 거쳐 왔잖아요. 밖에서는 '기적'이라고도 하고. 하지만 최근에 와서 다시 그 외의 것들, 계량적으로는 쉽게 포착이 되지 않고 실증적이지는 않지만 뭔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는 요인들이 부각되기 시작했죠. 그리고 지금 성취한 것들이 과연 진정한 행복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지금의 방향대로 노력만 더 하면 우리가 기대했던 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한 거죠.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희망적인 것인지, 어떤 상태가 나아진 삶인지’를 생각해 봐야겠죠.
진보는 좋고 나쁘다는 가치 판단을 전제로 하는 거지요. 흔히 미래학자들은 미래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두고 논하지만 이번 토론의 주제는 미래가 더 좋아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여기에는 인류가 근대사회로 오면서 상정했던 여러 기준들, 즉 경제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라든가 민주주의, 자유, 평등 같은 기준으로 지금까지 내달려오다가, 최근에 와서는 이게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이 길이 맞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면에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바로 그 지점에서 양측이 시각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찬성론자들은 수치화할 수 있고 실증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들을 봤을 때 인류가 충분히 진보해 왔고, 앞으로도 낙관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요. 반대 편의 생각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찬성론자들이 이야기하는 부분의 수치 개선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게 있다는 거죠. 알랭 드 보통이 스위스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스위스는 모든 나라가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그 나라의 국민조차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좋다거나 행복하다는 건 뭔가 다른 데에서 기인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찬성 팀의 매트 리들리는 영국 역사학자 매콜리 경의 말을 인용했어요. “무슨 원리에서 우리 뒤에는 늘 좋아지는 것만 있었고, 우리 앞에는 나빠질 것밖에 기대할 게 없다는 말인가?”라고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죠.
인지과학자들은 인간의 치명적인 인지적 오류의 경향성을 이야기합니다. 대니얼 카너먼이 쓴 『생각에 관한 생각』에 그런 이야기들이 잘 나옵니다. 우리는 현상적인 것을 곧바로 포착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곧바로 반응하는 단기적 사고의 경향이 아주 강해요. 생존을 위해서는 그렇게 진화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부정적인 것, 성가시거나 불편하거나 불안한 요소들을 먼저 감지하고 반응하게 돼 있어요. 그런 점에서는 인류는 본성적으로 투덜이입니다. 임박한 위험이 사라지고 나면 사고에 여유가 생깁니다. 거리를 확보하고 나면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죠. 흔히 눈앞의 현실은 고달프고 과거의 추억이나 향수는 아름답게 떠오르는 것도 그런 인지 성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피엔스의 미래』에 담긴 질문, 즉 ‘인류의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인가?’라는 질문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인류 차원에서 진단하고 해법을 찾고 대응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에요. 가령 자동화의 물결이 그렇습니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아직 걱정할 단계가 아니라거나 인간-기계의 공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취약한 계층부터 피해가 커질 겁니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상당 부분의 인간적 갈등도 사실은 그런 심층 불안의 반영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 사람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고 있지요. 나아가서, 자동화는 인간성과 인간의 존재 방식마저 재규정하려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인간에게 남은 게 뭘까? 앞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게 뭘까? 무엇이 인간적인 것이고 인간적으로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와 있는 거죠. 그걸 고민하지 않으면 실리콘밸리가 주도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상가나 미래학자만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인류 전체의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남은 보루가 이른바 성찰적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각각의 시민 개개인들이 제대로 알고 학습하고 생각하고 논의가 이뤄져야 해요. 그게 모여서 필요하면 함께 힘을 모아 방향을 바꾸고 대안을 모색해 볼 수도 있는 거지요.
사피엔스, 지식문화의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오랜 기자 생활을 마감하시고 북클럽 ‘오리진’의 운영을 시작하셨는데요. 계기가 있으셨나요?
지식문화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있었어요. 유학을 생각하다가 언론사에 들어간 것도 제가 세상을 배우고 의미 있게 기여할 수 있는 매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게 신문에서 온라인 미디어로, 다시 모바일 플랫폼으로 자연스럽게 매체 환경에 맞춰 옮겨간 것뿐이죠. <조선일보>에서 15년 동안 일을 하다가 <조선비즈>로 가서 지식문화부장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온라인 공간에서의 지식문화 콘텐츠를 다양하게 실험해봤어요.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긴 저자 인터뷰도 하고 책 큐레이션과 관련한 대형 기획도 해보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어요. 그러다가 카카오에서 콘텐츠 제휴 제의가 들어왔고, 그 무렵에 모바일이 중요한 툴로 떠오르던 차여서, 저로서는 이곳에서 지식문화 콘텐츠 큐레이팅 일을 좀 더 헌신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일 수많은 책이 출간되는데요. 그 가운데에서 어떤 책과 저자를 만날 때 흥미를 느끼세요?
가능하면 선입견 없이 보려고 하는 편입니다만, 의식하든 못하든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의식하는 것으로는 우선, 책의 완성도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나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잘 전달하는 책에 끌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상황이 변수가 되기도 합니다. 저술이나 출간의 취지 못지않게 독자와 독서의 맥락도 중요하니까요. 책은 대단히 좋은데 세상에 나올 때의 분위기나 맥락이 어긋나면 제 가치를 못 알아보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요즘 국내 상황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외면 받는 좋은 책들이 많아서입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악조건을 견뎌내고 심지어 압도하는 책도 있습니다. 이른바 고전에 해당하는 것들, 고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신간들이 그렇죠. 책에 담긴 콘텐츠 자체가 보편적인 생명력을 가진 의미나 가치가 있을 때는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책도 운이 따라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리진’을 찾으시는 이유가 뭘까요? 지식문화를 ‘큐레이션’ 해주기 때문일까요?
‘오리진’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는 지식문화는 대학이나 학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종인 사피엔스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지식문화의 단계로 갈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 예술을 더할 수 있겠지요. 개인이든 집단 차원에서든 인간이 의미를 찾게 되면 결국은 지식을 추구하게 됩니다. 모든 문화라는 것이 지식의 형태로 싹이 트거나 결실을 맺고, 그게 다시 성장해서 책이라는 형태로 누적이 되잖아요. 지식문화는 성숙한 개인이나 사회가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거의 필연적으로 원하게 되고 누리게 되고 가담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수준에 와 있을까요?
우리가 OECD 회원국이라고 하는데 그에 상응한 지식문화는 갖추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역사적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걸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내력이야 어찌됐건 눈앞에 닥친 현실로 보면 우리 사회의 성장 단계에서 크게 미진한 것이 지식문화입니다. 독서 문화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 사회는 말로는 어떨지 몰라도 현실에 있어서는 책 읽기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아요. 그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먹방을 당연시하는 만큼, 아니 절반만큼이라도 독서를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요. 독서가 그렇듯이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리진’에는 굉장히 많은 코너들이 있는데요.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라는 코너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독서 근황을 엿볼 수 있더라고요. 저자님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계세요?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집중하는 몇 권 말고, 수시로 동시다발로 읽는 편인데요. 최근에는 『도킨스 자서전 1, 2』를 읽고 있는 중이고 신간 추천사를 쓰기 위해 『메시 MESSY』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팀 하포드가 쓴 책인데, 우리는 흔히 질서정연한 것을 선호하고 추구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혼돈스럽고 무질서한 상황에서 인간의 장점이 발휘되고 새로운 창의적인 것들이 나올 수 있다는 역설적인 메시지를 담은 책입니다.
동시에 여러 책을 읽으실 것 같은데요. 다른 책들은 어땠나요?
얼마 전까지 ‘오리진’이 고전강독을 하면서 이태수 교수 지도로 『오디세이아』를 완독했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읽은 『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책도 참 좋았어요. 글과 책 읽기에 관한 에세이인 조르조 아감벤의 『불과 글』, 테리 이글턴의 『삶의 의미』, 로제 그르니에의 『책의 맛』 도 아주 좋았습니다.
책의 미래, 문학은 소멸할까?
‘오리진’은 모바일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활용해서 독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데요. 미래에 우리가 책을 향유하는 방식은 어떻게 변할 거라고 보세요?
콘텐츠의 소비도 커뮤니케이션 툴의 변화를 따라가겠죠. 무언가 단일한 것에 의해 지배가 되거나 대체되기보다는 점점 다원화하고 서로 연결성이 강화되는 쪽으로 갈 거예요. 그렇더라도 거기에 큰 줄기(메인)가 있고 곁가지가 있을 텐데, 메인은 디지털일 겁니다. 이미 우리 일상을 보면 그런 방향을 예고합니다. 콘텐츠 자체도 디지털, 온라인의 형태로 조금 더 효율적으로 쉽고 간편하게 유통이 되겠죠. 책(이라는 용기에 담겼던 콘텐츠)도 그 흐름 속에 당연히 포함이 될 거고요. 그런 매개물이나 매개 방식의 변화가 콘텐츠에도 영향을 줄 겁니다. 바라기로는 그 과정에서 이전까지 좋게 여겨온 책의 콘텐츠적 특성이 소실되지 않고 좀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전망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지금 우리 일상의 대부분이 디지털, 온라인으로 넘어갔잖아요. 그 과정에서 읽는 양은 더 늘었다고들 하거든요. 통계적으로도 그렇고. 아무튼 지하철 사람들만 봐도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잖아요. 문제는 그 텍스트가 책은 아니라는 거죠. 디지털이나 온라인으로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가 책이라고 부를 때는 어떤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봐요.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지금 맥락에서 말을 하자면, 일정 정도의 길이에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에 우리가 요즘 소셜미디어를 통해 주로 접하는 텍스트들은 파편적인 단문들입니다. 예전에 읽던 책과는 다르다는 거죠. 읽을거리라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반대 방향을 향합니다. 쪼개고 분산하고 스쳐 지나가게 하지요. 이런 읽기로 본다면 요즘 우리가 더 효과적이고, 훨씬 빠르게, 양적으로 더 많이 읽는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전통적인 책 읽기와는 딴판이에요. 그 차이가 무엇이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경계해야 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바뀐 환경 속에서 책이 살아남기란 쉽지 않을까요?
디지털 환경에 대한 전통적인 책의 1차적 대응이 전자책인데, 전통적인 책 읽기의 장점이 디지털로 구현되거나 더 좋아져서 많이 읽히면 좋겠지요. 지금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기존 킨들을 넘어서는 전자책의 획기적인 혁신이 없는 한 25%(국내는 이보다 더 낮다) 점유를 넘지 못할 것 같아요. 물론 디지털 환경에서도 더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독서를 해나가는 사람도 있어요. 저도 스마트폰으로 긴 글이나 책을 많이 읽거든요. 언제 어디서나 불러내서 읽는 편리함은 종이책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해외 고급 저널이나 매체의 글들도 지금은 오픈 소스로 돼 있어서 접근성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하지만 문제는 양질의 콘텐츠 소비층이 그만큼 늘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에요. 큐레이션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가 등장해서 그런 걸까요?
책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게 많아져서 그래요. 책의 미래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더 진전시키면, 제가 얼마 전에 인상 깊게 읽은 글이 있어요. 영국의 작가가 쓴 글인데요. 따지고 보면 문장이나 텍스트도 새로운 정보를 얻고 저장하고 전파하는 과정에서 생겼다는 거예요. 그 뒤로 미학적인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문학도 출현했고요. 하지만 오늘날의 문명은 서사 형태의 매개 없이도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거죠.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가 이모티콘이나 단문에 익숙한 걸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더구나 상시 연결사회가 되면서 점점 긴 서사가 불필요해지는 거예요. 앞으로는 연결된 뇌파로 교신이 될 거라고 할 판이잖아요. 소통 수단이라는 본래 목적이 사라지고 나면 서사에 기대할 것은 오락적 미학적 만족감인데, 그게 익숙한 세대는 계속 이어갈 거예요. 문제는 그 다음 세대도 그럴 거냐는 거죠. 기존의 문학이라는 것도 특정 세대에 한시적인 형식의 예술이나 오락거리가 아닐까, 묻는 거죠.
문학이 소외 당하고 소멸한다면 어떤 문제가 나타날까요?
문학과 같은 서사 형태의 산문의 쓰기와 읽기와 멀어지면 인간이 갖고 있는 독자성이나 중요한 능력들도 같이 잃어버리거나 약해질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우려하면서 관련 논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 환경이나 기반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인간의 자율성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고, 물론 그 반대로 더 증강되는 쪽으로 갈 수도 있겠죠. 후자 쪽이라면 굳이 버틸 필요가 없죠. 더 진일보하기 위한 한시적인 불편함이나 거쳐야 할 난관에 불과하다며 견디면 되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더 필사적으로 문제점을 부각시켜야겠죠. 왜냐하면 이걸 잃을 경우에는 우리가 그나마 오랜 시간을 거쳐, 이것도 우주력에 비하면 극히 짧은 종의 역사에 불과하겠지만, 이뤄온 나름의 깨달음의 성과가 사장되거나 위협받는 결과가 될 테니까요. 우리 당대에 그런 방향으로 현저하게 기울게 된다면 그거야 말로 중요한 상실이고 소실이죠. 그런 문제에 대한 탐색의 노력 자체가 문학(글쓰기)이기도 합니다.
글을 읽고 쓰는 행위가 인간의 독자성과도 직결되는군요.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학적부에 기록하듯이 단순한 취미 생활의 차원이 아니라는 거지요. 다른 것으로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차원의 항목이 아니에요. 인간성의 운명과 방향과도 관계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미 다수는 점점 책을 멀리하는 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사실은 형세로 보면 굉장히 불리한 형국이죠. 본래 독서가는 어느 사회에서나 소수임을 감안하더라도, 앞으로 더더욱 인류 중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희한한 소수이거나 희귀한 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회 전반의 양극화와도 같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부의 양극화뿐만 아니라 지력의 양극화도 중요하게 봐야 할 추세입니다. 둘 다 사회 전체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독자들은 어떤 책을 찾고, 어떤 책을 찾지 않는 것 같으세요?
불안 요인들이 많아서인지 자기 방어적인 게 많아 보여요.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후로 그런 경향의 책들이 흐름을 이루는 것 같은데요. 『미움받을 용기』도 그렇고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를 알 수 있어요. 적어도 베스트셀러에 관한 한, 지식 차원의 독서보다는 정서적인 위무나 보상을 책에서 구하는 것 같아요. 상처를 많이 입었고, 그 상처를 다른 데에서 치유할 수 없어서 힘들어 하는 걸 알 수 있어요. 책이 도피처 비슷하게 된 거죠. 책의 제목이나 책 속의 한 문장, 저자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가는 건데, 그런 점에서 굉장히 안타까워요.
책에서 위로를 찾는 것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책을 위로의 도구로만 여기는 데에는 문제가 있겠죠.
위로도 책의 엄연한 역할이기는 하지만, 지식문화 차원에서 책의 본령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단단한 여러 가지 것들을 갖고 있어요. 무엇보다 몰랐던 사실과 이야기, 통찰, 감동이 있고 논쟁거리도 있고, 독자에게 도전적인 생각거리도 있고, 정신과 문화를 주도하는 힘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독서라는 건, 독자들에게는 불쾌감을 무릅쓰고라도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일회용 밴드 같은 걸로 자리 잡은 것 아닌가 싶은 거예요. 일회용 밴드라는 건 병의 뿌리나 근원적인 부위에 닿고 치료하는 게 아니라 그냥 겉의 상처를 더 안 쓸리고 덧나지 않게 임시방편으로 막아주는 거잖아요. 그리고 ‘일회용’이니까 오래 가지 않죠. 그래서 수시로 바꿔 붙이는 거죠.
최근 들어 독자들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회용 밴드는 굉장히 효율적이고 편리해요. 나름의 엄청난 장점이 있지요.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성비'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책에서도 가성비를 찾습니다. 뭔가 심란하거나 불안하거나 허전한데, 책을 오래 붙들고 읽을 시간이나 참을성은 할애할 생각은 없고,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이런 나의 심사를 조금이나마 달래주기면 하면 되는’ 손쉬운 책을 찾는 거죠. 깊이 들어가려면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하거든요. 독서가 사실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에요.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누적이 돼야 해요. 불편한 자세며 고독부터 감수해야 돼요. 그 문턱을 넘어서면 굉장히 매혹적인 세계가 기다리고 있지만, 궤도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무척 힘든 게 사실이에요. 투자가 필요해요. 시간과 돈, 에너지,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고급한 활동이라는 점을 알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누릴 수 있는 반대 급부는 책값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합니다. 뛰어난 사람들이 책을 찾아 읽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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