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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히말라야 찍고 제주도 - 연극 <제주일기>의 배우 임승범
연우무대의 여행시리즈 연극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배우 임승범 씨
요즘 일기를 좀 쓰고 있어요. 답답할 때 글을 쓰는 편이라. 글쎄요, 무척 허탈할 것 같은데, 잘 버텼다? 그런 이야기를 적지 않을까.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 여행.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요? 관광차, 쉬고 싶어서, 아니면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 속내를 담아온 극단 연우무대에서 이번에는 제주도를 무대로 옮겼습니다. 연극 <제주일기>인데요.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여행지, 아니 출구를 찾는 사람들의 도피처인 그곳에서 만나는 6개의 이야기가 제주도의 멋진 영상과 더해져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이 작품에서는 연우무대의 여행시리즈 연극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배우 임승범 씨의 활약도 두드러지는데요. 이쯤이면 전문 여행가가 아닌가 싶군요. 겨울비가 운치 있게 내리던 날, 제주도는 아니지만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임승범 씨를 만나 봤습니다.
“예전 작품에서는 정말 여행 떠난 대학생으로 아시더라고요. 연기를 잘한 건지, 아니면 전혀 배우 같지 않은 건지(웃음)... <제주일기>는 아무래도 이야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니까 배우로서 좀 더 신경 쓸 부분이 많아요.”
<제주일기>는 ‘제주도’하면 생각나는 여러 장소, 단어를 엮어서 에피소드를 만든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6개의 이야기에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제주도에 갖다 놓으면 신기하게 뭔가 이어지는 고리가 있어요.”
크게는 2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데, 캐릭터에 어떤 변화를 주고 있나요?
“창작 초연이라 지금도 계속 얘기하면서 만들어가고 있어요. 초반에는 연기, 서로 주고받는 것만 신경 썼다면 지금은 디테일을 좀 더 파고 있죠. 머리도 헝클어뜨려 보고, 자세도 구부정하게... 요즘은 택시기사에 좀 집중하고 있어요. 사실 처음에는 저 혼자 정극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 작품에서는 사실인 듯 아닌 듯, 하지만 거짓말은 아닌 연기를 해야 하잖아요. 이걸 정말 잘해보고 싶어요.”
제주도 사투리는 꽤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제대로 구현하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웃음).
“그건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아무도 몰라요(웃음). 포인트는 지켜요. 제주도가 고향인 오인하 선배님이 도와주셨거든요. 그런데 제주도 사투리가 강원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느낌이더라고요. 오늘 공연에서도 살짝 강원도 쪽으로 간 것 같기도 하고. 소방관팀 같은 경우 처음에 표준어로 연습하다 장면을 만든 뒤에 사투리를 입혔는데, 감정이 이미 잡힌 상태라 말투를 바꾸는 게 힘들죠. 아무튼 제주도 사투리로 다시 연습을 했는데, 수정 과정에서 다시 표준어로 바뀌면서 고생을 하기도 했어요.”
임승범 씨는 <제주일기>를 비롯해 <인디아 블로그>, <터키블루스>, <인사이드 히말라야> 등 줄곧 여행을 소재로 한 연극에 참여해 오셨잖아요. 실제로 이들 여행지에 다녀오기도 했고요.
“제가 2012년에 <인디아 블로그>로 데뷔했는데, 2년간 연우무대 작품에 참여한다는 계약을 했어요. 그래서 여행 창작극을 계속 한 거죠. 계약은 2014년에 끝났지만, 그 팀에서 배우를 잘 안 바꿔요.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고, 같은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야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 작품이 저에게는 새로운 경험이기도 해요. 새로운 제작진,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거든요.”
여행을 무척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간의 작품이 상당히 힘들었을 텐데요.
“<인디아 블로그>에서는 여행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는데, 사실 저도 그랬어요. 여행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시간에 트레이닝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꽉 막힌 아이였는데, 지금은 적어도 살아가면서 여행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어요(웃음).”
제주도에도 다녀오셨죠?
“네, 2박3일간 다녀왔는데, 예전 팀은 4년간 함께 해서 여행갈 때마다 엄청 싸웠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다들 처음 만났잖아요. 각자 스타일이 다른데 그걸 인정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짧았지만 색다른 느낌이었어요. 같이 다니면서 큰 불편함도 없었고. 제주도에서는 정말 살아보고 싶어요. 바다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제주도의 한적하고 비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좋거든요. 이번에 제가 운전을 했는데, 운전할 때 갑자기 멈추고 싶은 곳이 있잖아요. 그래서 멈췄는데, 다들 한 바퀴 돌아보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기막힌 곳이더라고요. 거기는 저만의 플레이스가 된 거죠. 그런 걸 많이 가질수록 행복한 것 같아요. 사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는 채워지지 않아서, 외로워서, 견딜 수 없어서... 상황을 전환하려고, 뭔가 새로운 기점을 만들려고 떠나는 게 아닐까요.”
임승범 씨 개인적으로도 길을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나요? 배우니까 다양한 작품에 대한 갈증은 있을 법 한데요.
“그렇죠, 모두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죠. 저는 정극을 좋아하는데, 연극 무대에서 서른 살이라는 나이는 애매한 것 같아요. 제 외모도 동안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른 같지 않은 느낌이라서. 고민도, 생각도, 주저함도 많은 시기죠. <인디아 블로그>의 박선희 연출님이 그런 이미지로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는 거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버텨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을 하고 싶나요?
“지금 이 순간 와 닿는 얘기, 가장 하고 싶은 얘기가 좋아요. 재밌으면서도 격렬한 것. 영화로 치면 <주먹이 운다> 같은. 권투를 얼만 전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웃음). 악기도 좋아해서 드러머를 다룬 <위플래쉬>라는 영화도 좋아하고요. 최근에 봤던 연극 <함익> 같은 시도도 정말 좋아요.”
뮤지컬보다는 연극과 영화에 관심이 있군요?
“정극을 좋아해요. 뮤지컬 연기는 또 다른 똑똑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저에게는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요.”
12월 31일 <제주일기>가 임승범 씨의 ‘막공’이라고 들었습니다. 공연이 끝나면서 2016년 한 해도 끝날 텐데, 밤에 일기를 쓴다면 어떤 내용을 적을 것 같나요?
“와, 기분이 이상하겠는데요? 사실 요즘 일기를 좀 쓰고 있어요. 답답할 때 글을 쓰는 편이라. 글쎄요, 무척 허탈할 것 같은데, 잘 버텼다? 그런 이야기를 적지 않을까.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나태해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은 편인데, 그래도 그날엔 저한테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퇴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리고 새해를 희망하겠죠. 자기 암시처럼 글로 써 놓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대요. 그래서 요즘 써먹고 있는데, 너무 부끄럽지만 확신이 서더라고요. 내년에도 좋은 연극과 영화를 만나고 싶고, 연우무대에서 남미 프로젝트도 다시 하니까 거기에서도 기막힌 역할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서른, 애매한 나이. 그 시점을 지나는 임승범 씨도 조금은 위태롭게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위에서 볼 때는 연기도 좋고, 노래도 잘 부르는데 말이죠. 그런데 애매하지 않은 나이가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흔들리고 길을 잃고, 출구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릅니다. <제주일기>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이죠. 하지만 한껏 흔들리고 헤맨 뒤에도 삶은 흘러간다는 것, 어쩌면 더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 연극 <제주일기>가 아닌가 싶네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위로와 공감이 필요하다면 <제주일기>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올해 마지막 날에는 임승범 씨처럼 ‘그래도 잘 버텼다, 잘했다!’고 일기를 써 보시죠. 새해를 희망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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