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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 박근혜는 아직도 사퇴하지 않았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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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서 큰 소리로 외치기만 하고 집에 돌아가려니, 너무나 억울했다. 일상이 박탈당한 기분을 보상 받아야 했다. 그래서 집회 후 충무로 치킨의 명가 ‘그린 호프’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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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2.


아내가 생을 통틀어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라며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추천했다. 사실 이 소설은 몇 해 전 베스트셀러였기에 출간 당시에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나는 글을 팔아먹는 한 명의 문필업 종사자로서 대중이 사랑하는 책을 읽고, 그 이유를 알아봐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의무라기보다는 욕구다. 애써 욕구라는 표현을 피한 이유는, 사실 이는 자인하고 싶지 않은 ‘생존욕구’ 이기 때문이다.

 

하여 ‘몇 해 전, 왜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 라며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알고 보니, 나는 이미 이 작가에게 실망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제노사이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 전, 이 작가의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를 읽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실망하여 그때부터 그의 책을 내 독서 리스트에서 젖혀버렸던 것이다. 그 후론 복잡한 이름조차 잊었다. 하지만, 애서가인 아내가 생애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라 하니, 다시 호기심이 동해 읽어보기로 했다.

 

박근혜는 아직도 사퇴하지 않았다.

 

 

11. 24.

 
읽은 지 이틀 만에 엄청난 몰입감을 느꼈다. 책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이 세계 각국의 동향을 보고받으며 시작한다. 몇 장이 넘어가면, 한 군사업체의 용병이 특수 작전에 투입된다. 그리고 또 몇 장이 지나면 일본의 한 대학원생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그는 아버지가 사망 전에 예약 발송해놓은 이메일을 받게 된다. 고향 집에 가서 ‘아이스바로 더러워진 책을 찾아보라!’는 수수께끼 같은 메일이다. 그런데 언급된 ‘아이스바로 더러워진 책’은 둘 만이 간직하고 있는 추억이다. 부자지간이 아니고서는 지구상의 누구도 모르는 셈이다. 일종의 암호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며, 미국 대통령, 용병, 대학원생, 세 인물을 이야기 축으로 놓고 진행된다. 미국과 콩고와 일본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남아공과 르완다와 포르투갈까지 종횡무진 한다.

 

아아. 나는 이렇게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기다려왔다.

 

 

11. 25. 


왜 다카노 가즈아키를 하대했던가. 고작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한 편을 읽고, 그의 작품 세계를 얕보았던 내 사고가 부끄럽다. 해박한 의학지식, 박애 정신에서 비롯된 역사의식, 풍부한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력, 아울러, 인류 진화의 역사에 대한 통찰,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하게 짠 이야기 구성력. 다카노 가즈아키는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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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성지 그린호프의 치킨

 

 

11. 26.


오늘도 광화문에 나가서 목소리 하나를 보태고, 촛불 하나를 보탰다.

 

집회에서 큰소리로 외치기만 하고 집에 돌아가려니, 너무나 억울했다. 일상이 박탈당한 기분을 보상받아야 했다. 그래서 집회 후 충무로 치킨의 명가 ‘그린 호프’에 갔다. 아내는 오랫동안 침묵하며 후라이드 치킨을 묵묵히 먹었다. 한 마리를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여보 다음 주에 우리 또 와요!”라고 했다. 그녀가 다시 오자고 한 것이 집회인지, 치킨집인지 모르겠으나 확인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다가 자칫하면 마지막 남은 치킨을 놓치기 때문이었다.

 

 

11. 27.


『제노사이드』는 장르 소설이다. 이야기 구조가 선명하고, 소설의 매력 역시 이야기 자체에 있다. 하지만, 천재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을 읽을수록, 나는 ‘인간의 증오’에 대해 고찰하게 됐다. 우리 사회에, 아니 전 세계에 확산된 혐오의 정서는 오랜 인류의 역사를 거듭하며 변모해왔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네안데르탈레시스 보다 뇌 용량이 크지도 않았고, 호모 플로리엔시스보다 사랑이 깊지도 않았다. 호모 사피엔스가 그들보다 깊었던 것은 바로 ‘증오’였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종을 짓밟으며 생존, 번영해왔다. 인류의 역사는 증오에 기반한 침략과 약탈의 역사인 것이다. 이를 다카노 가즈아키는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

 

나아가 그의 소설은 현생 인류 다음인 ‘진화한 신인류의 출현’에 대해 상상한다. 나는 진화론을 믿지 않지만, 그의 상상을 상당히 감탄했다. 그가 상정한 ‘신인류’는 현생 인류가 범접할 수 없는 ‘지성과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 우린, 지성의 진화 역사를 익히 알고 있다. 아무리 멍청한 인간이라도 동물원의 침팬지보다는 현명하다.

 

하지만, 진정한 진화라는 것은 결국 지성뿐 아니라, 도덕성이 발전하는 데 있지 않을까? 소설가는 작품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훌륭한 소설이다.

 

 

11. 29.


대통령이 3차 담화를 발표했다. 특유의 두루뭉술한 화법으로 전파를 낭비하여 짜증이 났지만, 핵심을 추려보면 이렇다. ‘나는 잘못 한 게 없다. 억울하다. 하지만, 그래도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 줄 수도 있다. 대신, 국회가 알아서 해라.’

 

왜 인간은 스스로 진화하지 않는 것일까. 다시 한번 진정한 진화는 ‘도덕성의 발전’에 있다는 것을 대통령을 통해서 깨닫는다. 그런 측면에서 『제노사이드』는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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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성지 그린호프의 강냉이와 생맥주 

 

 

12. 3.


『제노사이드』를 계속 읽느라 촛불 집회에 늦게 갔다. 청와대 앞에 도착하니 이미 9시가 넘었다. 일상을 지키며 시민의 의무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두 시간 정도 외친 뒤 집으로 돌아가느라, 결국 충무로의 치킨 성지 그린 호프에는 들르지 못했다. 아내가 흥분해 있었다. 그녀가 흥분한 것이 시국 때문인지, 치킨 집에 못 가서 그런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대신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에도 꼭 와야 해요!” 아내가 가자고 한 것이 집회인지, 그린호프인지 역시 묻지 않았다. 그녀는 말 없는 내게 맹렬한 시민의 눈빛으로 다음 주엔 반드시 “일찍 와야 한다!”고, 시민단체 사무총장처럼 말했다.

 

나도 언젠가는 집회 없이 ‘순수하게’ 그린 호프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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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최민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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