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축구는 '삼바축구', 주식은 '삼바주'로 통할 만큼 부럽게도 브라질과 음악인 삼바는 동격이다. 삼바 못지않게 새로운 경향을 의미하는 '보사노바' 또한 라운지음악의 축을 이루는 등 전 세계인들에게 익숙하다. 월드뮤직에서 브라질의 스탠스는 그래서 막강하다. 한마디로 브라질은 음악의 나라다. 리우올림픽을 맞아 브라질을 빛낸 음악가들을 소개한다.
루이즈 본파(Luis Bonfa)
브라질의 재즈 팝, 이른바 보사노바 분야에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조앙 질베르토와 같은 크기로 논해야 할 전설 중 전설(1922-2001)이다. 그 이유는 지구촌에 '거의 최초로' 브라질 음악의 정체를 꽂은, 영화 <흑인 올페>(Black Orpheus)의 주제가로 너무나 유명한, 바로 「카니발의 아침(Manha de carnaval, 마냐 지 카르나발)」의 작곡자라는 사실, 다른 것 동원할 필요 없이 이 한방으로 충분하다.
지금 세대에게도 그의 이름은 가깝다. 2012년 글로벌 빅 히트넘버, 고티에와 킴브라의 오세아니아 스매시 「Somebody that I used to know」가 다름 아닌 루이즈 본파의 1967년 곡 「Seville」을 샘플링 했기 때문이다. 아마 고티에도 본파의 음악을 들으면서 세련과 고품격 터치를 훈육 받았는지도 모른다. (임진모)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2016 하계올림픽으로 세계가 들썩이는 지금, 인터넷에서는 출전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초 단위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관련 기사를 한 번이라도 검색해봤다면 “갈레앙 국제공항으로 입국했다.”라는 문장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갈레앙 국제공항의 또 다른 명칭이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국제공항'이다. 지구에서 가장 핫한 도시 리우는 자국의 가장 큰 공항에 보사노바 창조주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위상을 드높였다.
언제나 그렇듯 변화는 당장에 환영받지는 못했다. 1950년대 후반, 삼바로부터 태어난 '새로운 흐름(Bossa Nova)'은 쉽게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이에 대해 조빙은 「Desafinado」(1959)로 우아하게 일침을 가했고, 그 유명한 「Garota de Ipanema(Girl from Ipanema)」 (1962)를 발표하며 세상에서 가장 느긋한 방식으로 대중을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이제는 브라질 음악의 클래식 격으로 사랑받고 있는 조빙의 작품들. 그는 여유라는 옷을 입고 익숙함을 비틀어 혁신을 이룩한 작곡가였다. (홍은솔)
카에타누 벨루주 (Caetano Veloso)
그가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영화 <그녀에게>의 주제곡 「Cucurrucucu paloma」이다. 구슬프고 애상에 젖은 목소리와 달리 그의 철학과 신념은 뜨겁고 폭발적이다. 1968년 질베르토 질(Gilberto Gil) 등과 함께 <Tropicalia: ou panis et circencis>을 발표하며 브라질 문화의 전환기를 찍는 '트로피칼리아(Tropicalia) 운동'을 주도했다. 이는 브라질 팝 음악, 특히 태도적인 면에서 전통보다는 새로운 흐름을 아방가르드하게 융합한 것이었다.
당시 브라질을 지배한 것은 우파 브라질 군부였는데, 그는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정부에 맞서 '변화'와 '혁명'에 대한 희망을 음악에 품었다. 단호한 정치색과 이를 스스럼없이 표방하는 작품들 때문에 정권의 눈 밖에 났다. 자주 검열을 받았고 가택 연금, 급기야 추방을 당해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밥 딜런, 밥 말리, 존 레논처럼 음악과 세상을 연결하는 활동가이자, 브라질 대중음악에도 큰 획을 그은 선구자이다. 그래미 어워즈 2개, 라틴 그래미 어워즈 8개를 수상하며 여전히 영향력과 창작력을 유지하고 있다. (김반야)
아스트루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
보사노바의 여왕 아스트루드 질베르토. 보사노바를 듣고 해변과 따스한 햇살이 먼저 생각난다면 그의 「The Girl from Ipanema」 덕분일지도 모른다. 이파네마 해변에 얽힌 소녀의 이야기 말이다. 평범한 여성이었던 그는 남편 주앙 질베르토(Joao Gilberto)와의 짧은 결혼 생활동안 주앙, 스탄 게츠(Stan Getz),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의 협업 음반 <Getz/Gilberto>에 참여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이 매력적인 4인조는 브라질의 보사노바를 하나의 음악적 흐름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된다.
앞선 경험을 바탕으로 가수의 길을 택한 아스트루드는 첫 솔로 앨범 <The Astrud Gilberto Album>의 흥행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수록곡 「Aqua de Beber」는 화음을 넣는 조빔의 목소리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보사노바가 듣기 편안한 음악이라는 인식은 아마도 기교 없이 부드럽게 내뱉는 아스트루드의 발성에서 기인했을지도. 브라질의 열기에 맞춰, 보사노바의 원조를 감상하며 더위를 기분 좋게 이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정연경)
유미르 데오다토(Eumir Deodato)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가 러닝 타임 9분의 재즈 펑크 버전으로 환생했을 때 세계는 열광했다. 유미르 데오다토라는 브라질의 걸출한 연주자, 작곡자, 프로듀서 덕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1896년 오푸스는 1973년, 펑키한 리듬을 발판 삼아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의 자리에 뛰어오를 수 있었다.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등에게 곡을 써주며 1960년대부터 재능을 인정 받은 유미르 데오다토는 1970년대서부터 영미권으로 건너와 프랭크 시나트라, 쿨 앤 더 갱 등과 작업하면서 활동의 범위를 넓혔다. 라틴 음악과 보사노바는 물론 재즈와 펑크에서도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많이 남김으로써 여러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다음을 예측하기 어려운 아티스트인 비요크도 1995년의 앨범 <Post>와 1997년의 <Telegram>의 편곡 작업에 이 거장을 초청했다. (이수호)
질베르토 질(Gilberto Gil)
1960년대 후반 브라질 청춘의 카운터 컬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의 브라질 사이키델릭 록을, 그 노래운동을 사람들은 트로피칼리아(혹은 트로피칼리즈모)로 불렀다. 그 없이, 정확히 말하자면 카에타누 벨루주와 그를 빼놓고는 이 브라질의 젊은 리얼리즘 음악은 논의 불가능이다. 트로피칼리아의 저항성을 전면화한 두 사람은 실제로 당시 브라질 군사정부에 의해 억압당했고 추방 전 9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가난한 노동자 출신의 좌파 룰라 대통령은 2003년 질베르토 질의 민주화투쟁경력을 코드삼아 그를 문화부장관으로 임명했다. 우리의 김명곤장관은 1년 조금 넘었지만 질 장관은 5년 역임했다.
음악적으로는 트로피칼리아의 록이 중심에 서지만 삼바, 보사노바, 아프리카 음악, 레게 등 다양하다. 테너이면서도 바리톤 음역을 구사하고 가성을 자주 섞지만 묵직한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Palco」, 「Back in Bahia」, 「Andar com fe」, 「Nos barracos da cidade」, 「Expresso 2222」, 「Aquele abraco」 등 대표곡도 많다. (임진모)
세르지오 멘데스(Sergio Mendes)
보사노바의 제왕이자 브라질 음악 세계화의 선봉장인 건반 주자. 이번 올림픽이 열리는 리우에서 1941년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벌써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음악적 탤런트를 만개했다. 서구에서 익혀간 새로운 감각의 재즈와 펑크(Funk)를 브라질 토속 음악에 접목. 감각적 멜로디, 세찬 리듬, 로맨틱 하모니가 돋보이는 그만의 스타일로 반백년이 넘는 기간 발표한 정규앨범만 45장에 달한다.
작품을 단순히 연주하지 않고 해석해 전달하는 '인터프리터(Interpreter)'를 지향하는 아티스트. 거장이라는 영예를 수여하기 가장 알맞지 않을까. 작년 그가 2일차 헤드라이너로 나선 서울재즈페스티벌 메인스테이지 올림픽 공원 잔디 마당처럼, 세르지오 멘데스와 함께라면 세계 어디서든 활기찬 리우 삼바 카니발의 따스하게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 (이기찬)
비니사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se)
올림픽 마스코트에 음악인이 반영되었던 적이 있었나 떠올렸다. 하계 축제동안 함께 해줄 노란색 비니시우스는 브라질 보사노바 작사가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를 따서 탄생했다. 아마도 자국 대표 작곡가인 안토니오 조빔을 먼저 생각하고 함께 할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만든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의 인지도가 선정에 주요했을 것이다. 브라질은 개막식에서도 모델 지젤 번천의 워킹과 함께 이 노래를 틀었다.
둘의 작업에서 조빔은 선율을 만들고 비니시우스는 주로 노랫말을 붙였다. 시와 희극 쓰기를 겸했던 그의 가사는 새로웠다. 지적이면서도 애상적인 표현은 잔잔하게 속삭이는 보사노바와 잘 어울렸고, 서구 재즈를 접하며 자국에서도 질 높은 음악을 원했던 중산층들을 빠져들게 했다. 마스코트 투표에서 비니시우스에 표를 준 국민들의 지지는, 이 음악가가 사후에도 여전히 특별하게 기억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정유나)
파울리뇨 다 코스타(Paulinho Da Costa)
계란 판을 닮은 슈칼로(Chocalho)나 탬버린 모양의 판데이로(Panderio), 삼바에 주로 사용되는 수르도(Surdo) 등, 브라질의 전통악기들을 포함한 온갖 퍼커션을 능숙히 다루는 천부적인 퍼커셔니스트, 파울리뇨 다 코스타. 1973년 세르지오 멘데스와의 협업으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200개가 넘는 악기들을 소화하며 브라질의 대표적인 멀티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 데뷔 앨범 <Agora>과 <Happy People> 등의 솔로 커리어보단 유명 팝가수와의 콜라보레이션, <Saturday Night Fever>와 <Triller>, <True Blue> 등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수놓은 명반들에 참여한 아티스트로 더욱 유명하다. (이택용)
호베르투 카를로스(Roberto Carlos)
어느 분야에서건 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라틴 음악의 왕'이라 불리는 호베르투 카를로스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아티스트로 손꼽히기에 충분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영미권의 로큰롤과 팝을 받아들여 자국에서 큰 유행을 일으켰으며, 자신의 사운드에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 어 등의 다양한 언어를 붙여 라틴 음악의 세계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1960년대 중반, 브라질의 대중음악 MPB의 형성 과정에서도 그의 이름을 확인해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1억 장이 넘는 앨범 판매고를 올렸을 뿐 아니라 그래미 라틴 음악 부문에서도 트로피를 수상한, 브라질이 사랑하고 세계가 사랑하는 팝 음악계의 또 다른 왕이었다. (이수호)
갈 코스타 (Gal Costa)
브라질의 여성 뮤지션으로 2011년도에 제12회 <라틴 그래미 어워드>에서 특별상 부문인 '라틴 레코딩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였다. 1945년 출생으로 브라질 음악 대부 카에티누 벨로주(Caetano Velose)와 절친하여 데뷔앨범인 <Domingo>을 벨로주와 공동 작업했다. 수록곡 중 하나인 「방랑자의 심장(Coracao Vagabundo)」이 인기를 얻어 보사노바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자리잡았다.
1968년 당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청년문화운동 '트로피칼리아(Tropicalia)'에 참여하여 벨로주, 지우베르투 지우 등과 함께 프로젝트 앨범을 발매했다. 1982년 <Fantasia>에 수록된 흥겨운 리듬의 삼바곡 「오지의 축제(Festa Do Interior)」가 크게 히트하며 원로가수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여전히 브라질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는 그는 최근까지도 라이브 앨범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민형)
조르지 벵 조르(Jorge Ben Jor)
“브라질은 조르지 벵 조르가 노래한 것처럼. 신의 은총을 받고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열대국가입니다.” 2011년 3월 30일. 그의 이름은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 등장한다. 그의 음악은 풍부한 태양과 어우러진 울창한 자연처럼 삼바, 펑크, 록, 그리고 보사노바를 풍요롭게 혼재한다. 특히 그는 록과 삼바를 최초로 접목시킨 삼바록을 만들기도 했다. 부드럽지만 어딘가 애환이 담긴 호소력 높은 목소리. 억압과 속박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노랫말을 불렀다. 「Mas que nada」가 브라질에서 큰 히트를 쳤고, 이를 Sergio Medes와 Tamba Trio가 리메이크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 외의 곡도 많은 이들이 영감을 주어 다양한 샘플링과 리메이크가 되었다. 급기야 로드 스튜어트의 히트곡 「Da ya think I'm sexy?'는 「Taj Mahal」을 표절해 법정까지 가야만 했다. 또한 그의 노래와 축구를 빼놓을 수가 없다. 「Take it easy my brother Charles」 (이 노래는 영화 <웰컴, 삼바>에 삽입되기도 했다), 「Ponta de lanca africano (Umbabarauma)」등은 축구를 소재로 하고 있어 더욱 사랑 받는 노래들이다. (김반야)
미우통 나시멘투(Milton Nascimento)
1960년대 후반, 보사노바 등 브라질 전통 음악과 재즈, 로큰롤 등 서구 음악의 만남은 MPB(Musica Popular Brasileira)라는 브라질만의 독특한 대중음악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MPB의 대중, 세계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은 단연 미우통 나시멘투. 그는 뛰어난 송라이터인 동시에, 사회ㆍ철학적 노랫말을 쓰는 시인이었다. 가창 또한 상당했다. 특유의 편안한 음색과 완벽한 발성은 어떤 노래도 그만의 색으로 풀어냈고, 「Maria, Maria」, 「Francisco」 등에서 보여준 유니크한 팔세토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1966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50년간 그가 발매한 음반의 수는 30장이 넘는다. 보다 팝적인 터치로 미국 시장 문을 두드린 <Courage>(1968)에서부터 지난해 두두 리마 트리오(Dudu Lima Trio)와 함께한 <Tamarear>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따뜻한 목소리와 서정적 멜로디는 변함없이 아름답다. 위대한 창작자이자 선구자였던 그는 영원한 브라질 대중음악계의 자랑이요, 별이다. (정민재)
톰 제 (Tom Ze)
(결과는 다르지만) 브라질은 우리와 안타까운 현대사를 공유한 나라다. 1964년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무려 20년에 걸쳐 독재 정권을 겪었고, 1984년 직선제 쟁취를 목표로 한 민주화 운동을 통해 시민들의 국가를 회복했다. 우리에게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있었고 민중의 송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었듯이 브라질에서도 군부에 대항해 예술가들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니, 바로 트로피칼리아(Tropicalia)다. 전방위 음악가 톰 제는 까에따노 벨로주(Caetano Veloso)와 더불어 그 중심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트로피칼리아 운동의 대표 뮤지션들이 발표한 컴필레이션 <Tropicalia: ou panis et circencis>의 첫 번째 트랙은 'Miserere Nobis(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이 구절은 교회 미사에서 신께 구원을 바라는 의미로 불린다. 1968년 <Grande Liquidacao>를 시작으로 그는 이러한 시대정신에 사이키델릭한 무드를 더한 작품을 쏟아냈다. 악기의 특수 주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불협화음과 불규칙한 박자 변주, 록 사운드의 도입으로 강렬하고도 혼란스러운 색채를 가미했다. 실험과 진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홍은솔)
우즈 무탄치스(Os Mutantes)
트로피칼리아는 카에타누 벨루주, 질베르토 질, 톰 제(Tom Ze), 갈 코스타(Gal Costa) 등 솔로가 먼저 떠오르지만 밴드로는 우즈 무탄치스를 선두에 놓아야 한다. 당연히 영미의 사이키델릭과 브라질의 전통성을 배합, 트로피칼리아 음악의 전형을 이루면서 국외에도 '가장 유명한 브라질 밴드'로 이름이 퍼졌다. 질베르토 질, 카에타누 벨루주와 짝 지어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면서 유명해졌다.
1968년 3회 리우 국제 송 페스티벌에서 카에타누 벨루주와의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음악이 지나치게 실험적이고 너무 복장이 화려하고 성적 이미지를 내세운다는 이유로 카에타누 벨루주와 함께 야유를 받고 쫓겨나기도 했다. 당대에 비지스가 리메이크했고 나중 2008년 맥도날드 광고음악으로 쓰인 곡 「A minha menina」와 「E Proibido Proibir」 등이 대표곡. 멤버가 자주 바뀐 가운데 1970년대 후반 해체했으나 2006년 재결합해 2008년 30년 만에 신곡 「Mutantes depois」를 내놓았다. (임진모)
Morris Albert (모리스 알버트)
1973년 기타리스트로 데뷔한 브라질 출신의 모리스 알버트는 데뷔곡 「Feelings」 (1975)가 빌보드 차트에서 32주를 머무르는 기록을 세우며 주목받는 싱어송라이터로 급부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강남 1970>의 OST로 삽입되어 70년대의 향수를 고스란히 불러일으켜 당시 최고의 히트곡이라는 명성을 다시 한 번 되살리기도 했다. 블루스와 재즈 사이를 오가고 우울한 선율이 전반에 짙게 깔린 곡은 한창 올림픽의 환희에 도취해있는 지금과는 어울리지 않는듯하지만 밝음과 어둠이 혼재하듯 승패의 결과에서 오는 씁쓸함, 그 애환을 보듬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박지현)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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