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의 사기꾼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더라도, 내 기억과 판단이 어쩌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정도만 하는 것으로도 내 영혼에 올리브 기름 한 통은 붓는 유연하고 유용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또 생각한다.
노비 문장(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안 반스 지음/ 다산책방, 11쪽
1.
나에게 글쓰기는 치유이자 명상이다. 무언가가 뒤엉켜있을 때, 미래가 너무 불안해 우울증에 걸릴 지경일 때, 새 문서 창을 띄워놓고 글을 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쓰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쓴다. 오타와 맞춤법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쓰다 막히면 욕이라도 쓴다. 가래로 염전 바닥을 밀고 나가는 소금꾼처럼 그렇게 돌아보지 않고 죽죽 쓴다. 이것이 내 ‘털어내는 글쓰기’의 원칙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한결 생각이 정돈된다. 실제와 망상이 구별된다. 습관적인 나의 패턴이 눈에 들어온다. 나와 사건이, 나와 내 감정이 들러붙어있다가 떨어진다. 언제나 나는, 불과 30분의 글쓰기로 얻게 되는 감정의 목욕 효과에 깜짝 놀란다.
내가 만들어서 지키는 마음챙김 글쓰기 수칙
또 다른 방식은 인생 회고록을 짬짬이 쓰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잠시 눈을 감는다. 세 번 정도 심호흡한다. 들숨과 날숨에만 마음 집중한다. 이때 어떤 기억이든 떠오르는 대로 맞이한다. 먼 기억이든, 가까운 기억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역시 차별하지 않는다. 그냥 문득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여인숙의 역할만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쓴다. 원칙은 ‘털어내기’와 동일하다. 그렇게 하나의 기억을 서사의 형태로 마무리한 후 , 그것이 몇 살 때 일어난 일인지를 기록한다.
예를 든다면,
1974년(9살)
화재로 집이 다 탄 후 새로 지은 집에서 참 좋았던 것은 텔레비전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19인치 금성텔레비전이었는데 마을에 유일한 텔레비전이었고 생계에 거의 무능했던 아버지는 방송업에는 재능이 있으셨는지 사람들에게 10원 씩 받고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셨다.
아버지는 기차에서 훔쳐온 재떨이를 돈통으로 활용하면서 사람들을 안방에 입장시켰고 나는 안방극장 사장의 막내 아들로 격상된 신세를 자랑스러워하며 가장 좋은 자리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옆에 앉아서 인간 팔자 시간 문제임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특히 김일 레슬링이나 타잔 등이 방영되는 날에는 안방이 터질 듯이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방에는 꾀꾀한 꼬랑내, 사람들 방구 냄새 등이 떠다녔으며 10원은 시간 제한이 없는 무제한 시청권이었기에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텔레비전을 보려고 졸음으로 짓눌리는 눈꺼풀을 까뒤집으며 티브이를 보는 사투를 벌이다가 목이 꺾이면서 방벽에 뒤통수를 쿵쿵 박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었다. 아무튼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의 아버지가 내게는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것은 무의식을 더듬는 여행이며 내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이런 에피소드가 원고마감에 쫓기는 어떤 날에는 귀한 소재 창고가 돼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고인을 향한 추모라고는 육개장 그릇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한국의 장례 환경 속에서 이런 유언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이 작업을 부단히 해나갈 것이다. “ 내 인생 회고록 스무 권을 제본해서 파티션 한 곳에 놓아두고 가족들이랑 친구들이랑 잠시라도 영정 속 인간을 낄낄거리며 추억하면 좋겠다”.
2.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나의 사건들이 모두 사실일까?
아닐 것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갈 때 상당 부분 잘못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티브이는 19인치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밤 열시면 안방에서 강퇴를 당하는 구조였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아홉 살의 기억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기억을 조작해낸다. 인간의 기억을 믿느니, 양치기 소년을 믿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나는 종종 한다.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하나의 사건을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말한 기억이 없는데 그렇게 말했다고 확신적으로 주장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볼 때, 기억이 얼마나 장난질을 많이 하는지를 실감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 비극은 시작된다. 나의 특별하고 우수한 뇌의 능력을 과신하는 순간, 나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된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게 된다. 소통은 안드로매다로 간다. 내 기억도 믿을 놈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좀 더 편해질 수 있었다면, 나는 내 기억을 불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
기억은 영화와 문학의 좋은 재료다. <메멘토>가 우선 떠오른다. 제 몸에 문신을 새기며 일어난 사건을 영원히 기억하려고 하지만 문신 역시 자기 해석에 오염된 조작의 결과물이다. “Menory is not a record but an interpretation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명대사다.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아예 기억을 지워버린다. 사랑을 추억하지 않기 위해 기억을 리부팅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그런들 뭐하나. 만날 사람은 어쨌든 계속 만나지는 것을. 끌림은 기억 따위의 흔적으로 어쩔 수 없는 본능적 화학 반응이라는 것을 영화는 말한다.
아리 폴만 감독의 <바시르와 왈츠를>에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하는 것이 기억이라고 말한다. 전쟁트라우마로 삭제된 레바논 학살 사건의 개인적 기억을 끝내 떠올리는 과정은 달리 말한다면, 기억의 윤리학이다.
문학에서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환갑의 토니 웹스터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오면서 기억 여행이 시작된다. 소년 시절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했던 여자와 그 여자의 집에 머물렀던 한 달의 시간. 그러나 그 여자는 토니가 가장 흠모했던 친구 중 한 명과 눈이 맞고 교재를 허락해달라는 그들의 편지에 신중하게 잘 사귀고 행운을 빈다라는 회신을 보낸다. 그러나 과연 40년 전의 그 답신에의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자신이 쓴 소설이었다는 것을 주인공은 깨닫는다. 여자 친구에 대해, 그녀의 어머니와 가족관계에 대해, 편지의 내용에 대해, 자신의 전 처와 딸에 대해, 친구의 죽음에 대해, 친구의 아들에 대해, 그리고 그 모든 기억에 대해 그는 자기 보존 본능적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서재 뒷 편의 차원 다른 공간처럼, 사실과 다른 해석의 세계를 사는 사람이 과연 이 소설 속 주인공만의 경우일까? 그랬다면 이 소설이 보편성과 공감이라는 독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계처럼 영민한 작가 ‘쥴리언 반스’ 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대사 형식의 문장을 지뢰처럼 박아놓으면서 전체 서사의 흐름을 암시하거나 이후 인과관계의 단서로 활용하는 데, 그것을 숨은 그림처럼 꼼꼼히 찾아보면서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특별하지만 역시나 책장을 다 덮었을 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내 해석의 방식으로 구축된 기억이라는 것을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없는 의심이다.
그 사람은 나쁘고 나는 옳고, 그는 가해자이고 나는 억울한 피해자이고, 그때 상황은 이러했고,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었고, 그리하여 나는 평생 그를 보지 않을 것이고, 세상은 좋은 사람 만나면서 살기도 시간이 없는데 나쁜 인간들은 잊어야지 운운하면서 내 중심의 알리바이로 저장된 내 지나온 시간의 역사에 쨍하고 금이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다행이다, 토니와 토니의 독자들이여. 제 삶의 기억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일 터, 개인의 삶이 착각 속에서 마무리 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일텐가. 설령,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더라도, 내 기억과 판단이 어쩌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정도만 하는 것으로도 내 영혼에 올리브 기름 한 통은 붓는 유연하고 유용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또 생각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인생 회고록을 좀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개인적으로, 그것만큼 좋은 ‘ 인생무상, 삶의 회의’ 의 화두 틀기 방식도 없는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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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줄리언 반스> 저/<최세희> 역11,520원(10% + 5%)
2011 영연방 최고의 문학상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영국 문학의 제왕 줄리언 반스의 새로운 소설이다. 책은 1960년대, 고등학교에서 만난 네 소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 토니 웹스터와 그의 패거리 친구 앨릭스, 콜린, 그리고 총명하며 지적인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 세 소년은 그를 선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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