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침묵하면 다음은 내 차례다
억울함을 방관할 때 자신도 억울해지는 게 세상의 이치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진짜 금 안 밟았어. 내가 다 봤어”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야. 너 금 밟았어.”
“나 안 밟았어.”
“얘 금 밟은 거 봤지? 금 밟았는데 안 밟았다고 하잖아.”
“너 나가. 금 밟았잖아.”
영화 <우리들>은 아이들이 피구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피구는 공이 몸에 맞거나 금을 밟으면 퇴장해야 하는 게임이다. “너 금 밟았다”는 한마디는 곧 “너 나가라”는 뜻이다. “금 밟는 것을 내 눈으로 봤다”는 주장이 등장하면 누군가 “금 밟지 않는 것을 내 눈으로 봤다”는 반론을 펴지 않는 한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주인공인 초등학교 4학년 선은 아무도 변호해주지 않는 가운데 금 안에서 밖으로 퇴출된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혐의가 덧붙여진다. 바로 ‘거짓말쟁이’다.
선은 집에선 사랑 받는 딸이지만 학교에 가면 같은 반 보라가 주도하는 ‘왕따’의 대상이다. 아이들에게 선은 그저 놀림 당하고 배척당하는 ‘깨지지 않는 장난감’일 뿐이다. 왕따는 일상에서도 이어진다. 보라와 보라 친구들은 선에게 “냄새 난다”는 혐의를 씌운다.
“무슨 냄새 나는 거 같지 않니?”
“땀 냄새인가?”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남들이 냄새가 난다고 하면 ‘냄새가 나는 것’이다. “냄새 난다”는 지적이 되풀이되면 그 대상이 된 사람도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선은 옷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다른 이들이 자신에 대해 갖는 편견을 열등감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그런 선에게 희망이 생긴 건 전학 온 지아를 만나면서다. 방학 동안 선과 지아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살가운 사이가 되지만 둘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지아가 보라와 어울리면서 선은 다시 외톨이가 된다. 하지만 지아도 보라의 질시를 받으며 왕따의 대상이 된다. 보라는 둘 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하고 싸움을 부추긴다. 선과 지아는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선은 어느 날 “날 때린 친구와 같이 놀았다”고 말하는 어린 동생 윤에게 묻는다.
“너 바보야? 같이 놀면 어떡해? 다시 때렸어야지.”
“그럼 언제 놀아? 연우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우가 때리고… 나 그냥 놀고 싶은데.”
동생 윤의 지적은 타당하고 정확하다. 서로를 향한 편견과 선입관을 키워가며 치고받기만 거듭하는 한국의 어른들이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하지만 영화가 여기에 머물렀다면 공감의 울림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영화 첫 장면에서 선이 피구를 하다 ‘금을 밟았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마지막 장면에선 지아가 똑같은 함정에 빠진다. “야, 한지아 너 금 밟은 거 아냐? 빨리 나가”라는 말에 부딪힌 것이다. “나 진짜 안 그랬어”라는 지아의 해명에 “얘는 왜 맨날 거짓말이냐?”고 확인 사살이 이뤄지려는 순간 선이 나선다.
“한지아 진짜 금 안 밟았어. 내가 다 봤어.”
아무도 선 자신을 위해 해주지 않았던 말, 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선은 지아에게 그 말을 선사한다. 지아는 선을 바라본다. 선도 지아를 바라본다. 순식간에 일어난 마법에 두 아이 마음은 성큼 성장한다.
선과 지아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증명할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간 “당신, 금 밟았어”, “분명히 냄새가 나는데”라는 손가락질 하나로 수많은 이들이 심판대에 섰다. 일부는 간첩사건이나 국가보안법 사건 같은 형사 사법의 법정에 섰고, 일부는 사회에 위험한 인물로 찍혀 여론 재판의 법정에 섰다. 이렇게 금 밟았다는 진술과 냄새를 증거로 삼을 때 용기를 갖고 “아니다”고 말한 제3의 목격자는 많지 않았다.
침묵의 문화는 침묵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란 믿음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 시간을 늦출 뿐이고, 결국 침묵하는 자도 희생될 수밖에 없다. 억울함을 방관할 때 자신도 억울해지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이제 ‘침묵은 금(金)’이라는 격언은 수정되어야 한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침묵은 다른 사람과 나를 해치는 흉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진짜 금 안 밟았어. 내가 다 봤어”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왕따 당하고 마녀사냥 당하는 이를 위해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변호한 적이 있는가. 불이익을 감수하고 진실을 말할 자신이 있는가. 유죄 추정의 원칙을 깨는 건 양심과 용기다. 선이 나섰던 건 지아와 다시 친구가 되고 싶었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 내가 말하지 않으면 억울한 희생은 이어진다’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 아닐까. 그 선의(善意)가 지아를 변화시키고 선 자신도 변화시키지 않을까.
우리는 선에게서 배워야 한다. 침묵하면 그 다음은 내 차례란 것을. 내가 침묵하면 나 자신도 꼼짝 없이 금 밟은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을.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