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절도일기(竊圖日記)
10화 – 절박한 작가, 벅찬 가장
『우상의 눈물』 외
전업작가라는 직업이 만족스럽지만, 때로는 전업 작가이기 때문에 전혀 즐길 수 없는 날이 찾아온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마감’이라는 막다른 길목에서 ‘질이 나쁜 글’을 부끄럽게 내뱉고 겨우 뒷걸음질 칠 때가 있다.
6. 9.
소설가가 소설만 써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라고 다른 작가들은 말하지만, 나는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마감이 저승사자처럼 떡하니 기다리고, 책상 위에는 취재 자료가 고지서처럼 쌓여 있고, 작가의 입에서는 탄식처럼 담배 연기가 피어올라오는 모습은, 뭐랄까, 산업혁명 직후의 영국 노동자 같은 모습이다. 언제 쓰러질지 모를 위태로운 느낌이다. 담배 연기마저 제조 공장의 굴뚝 연기 같은 느낌이다. 물론,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하지만 ‘소설가가 소설만 쓰고, 다른 돈벌이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는 뜻이라면 나이브 하긴 하지만, 나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한다. 소설을 사랑한다면,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소설을 쓸 때마다 끙끙대며 고생하는 나이기에, 궁극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다른 일을 하면서 숨을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라고 종종 생각한다.
하여, 누군가 나를 찾아주면 금액과 시간과 상관없이 흔쾌히 ‘아! 좋지요’하고 매번 수락한다(거절한 몇 분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아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찾아 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니까. 그런 맥락에서 오늘은 ‘진진 영화사’의 부탁으로 개봉작 <시선사이>의 ‘시네토크’ 진행을 맡았다.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 주연 여배우, 그리고 내가 무대로 올라가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예컨대, ‘이 영화가 21세기 한국인의 계급의식과 시민의식에 혁명적 헌신을 할 것인가’와 같은 토론이 아니라, ‘다음 영화는 찍어야 할 텐데 말이죠…’, ‘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런 영화를 찍어서…’와 같은 현실적인 대화가 오간다(물론, 딱 이렇게 이야기하진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극장 안에서 영화에 대해 나름의 의견과 비평을 덧붙이며 반시간 남짓 수다를 떨어본 적이 있었다(그때는 <로미오와 줄리엣>, <연인>, <테스>를 보고 비평 비슷한 무언가를 늘어놓았다). 매번 즐거웠다. 오늘도 역시.
물론, 마치고 난 후의 뒤풀이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는 바람에 다음날 장이 탈 나긴 했지만.
어째 쓰고 나니 초등학생 일기 같다.
담임이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줘야 할 것 같다.
6. 11.
어제와 오늘, 양일에 걸쳐 전라남도에 와 있다. 어제는 여수의 한 고등학교, 오늘은 장흥의 한 고등학교에서 문학 행사 사회를 맡았다.
불과 이틀 전에 소설가가 다른 일도 곁들여 하는 것은 나름의 재미가 있다, 고 썼는데, 내 일천한 경험이 낳은 무지였다.
장시간의 이동과 불규칙한 식사, 민감한 장과 부족한 수면으로 ‘나름의 재미’가 아닌, ‘톡톡한 노동’을 치르고 있다.
만약, ‘행사의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이봐! 작가 양반, 세상을 얕보지 말라고!’하며 훈련시키는 느낌이다(네. 만만하게 보지 않겠습니다).
사흘 간에 걸쳐 연달아 외부 행사를 맡은 이유가 있다. 피곤하다. 내일 써야겠다.
오늘도 역시 초등학생 일기 같다.
손으로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써야 할 것 같다.
아, 그림도.
6. 13.
글을 읽고, 쓰기가 벅차다.
밤에 잘 수 없기 때문이다.
아기가 두 시간 간격으로 깨는데,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킨 후 다시 재우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나는 예민해서 다시 자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매일 잠 같지 않은 잠을 자고, 글을 쓰러 나온다.
얼마 전에 아기가 태어났다.
물론, 기쁜 일이다.
그리고 벅찬 일이다.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6. 15.
36년 전의 소설을 읽었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단편 소설이다.
읽다보니 책장이 점차 얇아지고 있었는데,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를 끝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마치 절벽을 추락하듯 이야기는 나를 데리고 급하강을 했다.
어질어질 할 만큼, 소설은 갑자기 끝나버렸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 하나만으로 소설은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오랜만에, 훔칠 것을 하나 발견했다.
단 한 문장으로 서사가 정리되는 소설. 훌륭한 기법이다.
전상국 선생을 이번 일요일에 만나게 된다.
이 역시 ‘지방행사’다. 나는 지방의 고등학교를 찾아가는 이른바 <문학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기에, 종종 작가를 만날 일이 있다. 이 행사에는 초대받은 작가(대부분 소설가)가 있고, 행사에 참여하는 고교생들이 있다. 이 행사의 사회자가 나다.
이번 주 일요일의 주인공이 전상국 작가.
그와의 만남은 내 기대를 충족할까? 배반할까?
그의 소설 속에 담긴 오래된 문어체도 좋다.
*
절도일기와 전혀 무관한 이야기지만, 「I wish I were twins」라는 곡이 마음에 든다. 발랄한 피아노곡이다. 쌍둥이가 있다면, 나 대신 여기저기 지방에 가서 ‘최민석입니다!’하며 사회도 보고, 강의도 하고, 대출 연장 사인도 하지 않을까. 물론, 원고는 내가 써야겠지만.
6. 16.
전상국의 『우리들의 날개』를 읽었다.
영화 <곡성> 같은 샤머니즘을 다룬 소설이다. 기괴하며 문학적이다.
전상국 작가의 단편 소설을 두 편 읽었지만, 그의 소설은 한 문장 안에 많은 것이 압축돼있다. 굉장히 훌륭한 기법이지만, 나는 이를 훔치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이렇게 썼다가는 원고료가 줄기 때문이다. 나는 생계형 전업 작가이지 않은가.
6. 17.
이런 말을 무라카미 씨가 들으면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줄곧 무라카미 하루키를 소설가로서 보다는 수필가로서 좋아했다. 물론, 그의 소설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끔은 별로인 소설도 있지만.
예컨대, 이런 첫 문장은 ‘역시 무라카미군’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게 비록 변기에 앉아 있는 무드 없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네. 독서할 시간이 없어서 화장실에도 책을 들고 갔습니다).
“한때 주민의 한 사람으로 일상생활을 보내던 곳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여행자로 다시 방문하는 기분은 제법 나쁘지 않다. 그곳에는 당신의 몇 년 치 인생이 고스란히 잘려 나와 보존되어 있다. 썰물이 진 모래사장에 찍힌 한 줄기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읽기 시작했다.
6. 19.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나 - 아니, 다섯 시까지 아기와 씨름하다 잠시 눈을 붙인 뒤 - 경기도 이천으로 차를 몰고 갔다.
오늘 만난 전상국 소설가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문학은 놀이이지 게임이 아니에요. 즐거워서 하는 것이지 승부를 가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가 의도한 청중은 학생들이었겠지만, 이 말을 기억하고 쓰고 있는 사람은 사회자인 나다.
문학을 놀이로 삼을 수 있는 그가 부럽다(그의 직업은 교사였다).
전업작가라는 직업이 만족스럽지만, 때로는 전업 작가이기 때문에 전혀 즐길 수 없는 날이 찾아온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마감’이라는 막다른 길목에서 ‘질이 나쁜 글’을 부끄럽게 내뱉고 겨우 뒷걸음질 칠 때가 있다.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 삐걱거리는 기계로 질 나쁜 제품을 생산해내는 제조공장처럼. 그럴 때는, 때로 ‘오로지 즐기는 차원에서’ 쓰는 작가들이 부럽기도 하다.
행사를 마치고 차를 몰고 돌아오다, 세 번 사고를 낼 뻔했다.
깜빡 존 것이다.
졸음 쉼터마저 공사 중이라 한 시간 동안 얼굴에 물을 뿌리며 운전했다.
쓴다는 행위가 점차 절박해지고 있다.
이렇게 가장으로서의 작가가 되어가고 있다.
관련태그: 작가, 가장, 우상의 눈물, 우리들의 날개, 전상국,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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