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키 “공간이 없어지면 싸울 수밖에 없다”
김오키 스피릿 선발대, 김오키 뻐킹매드니스 등 괴작이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음악 세계
'에이, 비, 씨, 디'를 얘기할 때 “에이, 비, 씨, 디”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디, 씨, 비, 에이”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의 경우에 있는 셈이다.
즉흥적으로 걸음을 뗐고 전위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애가 만든 냉소가 스며들어있었고 분노가 만든 열기가 배어있었다. 숨죽인 울음이 있었고 목이 찢어지는 외침이 있었다. 나의 어제를 이야기했고 우리의 오늘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재즈처럼 보이기도 했고 재즈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것은 음악처럼도 보였고 음악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 음악 신의 또 다른 괴작가 김오키를 처음 마주했을 때 들었던 느낌이었다. <Cherubim's Wrath (천사의 분노)>, <격동의 시간여행>, 아방 트리오에서의 <Blue Suns> 등에 걸린 그만의 사운드는 늘 각양의 감상을 불러일으켰고 여러 호기심을 자극했다. 조금은 다른 영역에 있는 아티스트의 표현법에 대해 직접 들어볼 수 있었다.
<격동의 시간여행>이 소리 없이 나왔다.
원래는 재작년 5월에 나왔어야 했다. 중간에 문제가 있어서 다 만든 상태였는데도 발매는 못 했다.
그럼 다음 앨범은 언제 나오나. 근황도 궁금하다.
빠르면 올해 6월, 아니면 7월이나 8월까지 갈 듯싶기도 하다. 요즘 여러 밴드를 꾸려서 하고 있다. 얼마 전에 시작한 김오키 스피릿 선발대라는 팀에서도 앨범을 준비 중이고 김오키 뻐킹매드니스라는 팀에서 새로 앨범을 낼 예정이다. 노선택과 소울 소스라는 레게 팀하고 김오키 쿼텟이라는 스탠다드 재즈팀도 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방백도 하고 있다.
팀 소개를 더 부탁한다.
앨범 계획으로 이야기하는 게 편하겠다. 올해 나올 앨범이 총 다섯 장이다. 처음이 스피릿 선발대 앨범. 아프리카에서 기우제 지내는 듯한 아프로 사운드를 낸다. 두 번째가 뻐킹배드니스 앨범. 동양청년에서 했던 것처럼 때려 부수는 식으로 방향을 잡았다. 숨의 박지하 씨와 둘이서 하는 콜래보레이션이 세 번째고 동양청년에서 드러머만 바꿔서 하는 프로젝트가 네 번째다. 네 번째 음반의 경우에는 동양청년과 약간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할 것 같은데 아직 구체화는 안 됐다. 그리고 중간에 옛날 가요를 재즈로 재해석하는 앨범이 나간다. 비트볼레코드 이봉수 사장님의 기획으로 만드는 음반이다.
멤버도 대체로 비슷하다. 소울 소스 멤버에서 네 명 나와서 선발대를 같이하고 있다. 박지하 씨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뻐킹매드니스에서는 소울 소스의 노선택 씨가 베이스를 치고 있다. 라인업은 약간씩만 바뀐다. 맞는 사람들끼리 자주 하게 된다.
동양청년은 해체인가.
해체다. 드럼 치는 친구가 아무래도 음악으로는 생활이 안 되다 보니 그만두게 됐다. 원래 했던 디자인, 그림 쪽으로 일을 더 할 거라 한다. 재즈 밴드는 사실 오늘과 내일의 멤버가 바뀌어도 활동에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동양청년은 그런 식으로 만든 팀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멤버가 바뀌게 되면 해체하겠다고 했다.
많은 아티스트들과 작업하고 있는 것 같다. 머리 복잡하지 않나.
되게 힘들다. 머리가 굉장히 아프다. 매일 음악 생각만 하게 되니까. '어떻게 뭘 만들지' 식으로. 이번에 했던 것도 예전부터 어느 정도 생각했던 걸로 했고, 1집과 2집의 구상과 작곡도 본 작업보다 앞서서 이뤄졌다. 미리 짜놓은 채로 있다가 좋은 멤버 생기면 그때 하게 된다. 음악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팀마다 나타내려 하는 주제도 다른가.
얼마 전에 김수영 시인에 관한 연극을 했다. 그때 대본을 받아보면서 이걸 음악으로 만들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네 프로젝트가 곧 김수영 시인에 관한 네 편의 책을 의미한다. 각각 연관이 있다. 김수영 시인의 내용이 다 들어가 있기도 하고. 주제도 따로 존재한다.
음악 인생은 어떻게 시작했나.
초등학교 때 흑인음악을 좋아했다. MC 해머나 마키 마크, 바닐라 아이스 식의 뉴잭스윙을 AFKN을 통해 특히 많이 들었다. 그런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춤이 따라왔다. 방송 댄스도 하고 스트릿 댄스도 했다. 그렇게 춤추다가 고등학교 무렵에는 아예 나와 살게 됐다. 당시에 집안에서 음악 하는 걸 많이 반대했다. 할아버지랑 아버지께서 음악을 많이 좋아하시다 보니 음악으로 먹고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계셨던 거다. 그래도 독립해서 계속 춤을 췄고. 색소폰을 하기 시작한 건 군대 다녀와서. 우연히 마일스 데이비스 앨범을 듣다가 관심이 갔다. 배우러 바로 학원에 갔다.
색소폰을 2개월 정도만 배웠다는 얘기가 있다.
배우다 보니 혼자서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학원 수업이 일정 기간 지나면서부터는 과제와 검사의 반복이지 않나. 스스로 하다가 직장인 밴드에서 연주했다. 조금 지나니 밴드에 외국인 친구들이 들어왔다. 그 애들에게 많이 배웠다. 자기네 나라에서 음악 전공하고 그 쪽으로 진로가 잘 안 풀려 어학 강사로 우리나라에 온 애들이 많았다. 씨제이 킴 형도 그 밴드에서 만났다. 특히 씨제이 킴 형하고 친해지면서 가르침을 엄청 받았다. 그 외에도 동생들에게도 많이 물어보고 공부했다.
그나저나 춤은 왜 그만둔 건가.
춤에도 저마다의 릭이 있고 라인이 있다. 그걸 조합해 끼워 맞추면서 한 곡의 춤을 완성하는 거다. 춤을 그만둔 건 그 조합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였다. 어떤 것에 대해 원하는 대로 표현이 안 됐을 때 답답해했다. 춤이 정말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안에 자유롭지 않은 지점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만뒀다. 그런데 재즈도 비슷하다. 박재천 선생님께서 '너네 재즈 뮤지션들은 자유는 있는데 구속돼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연주에서든 돈에서든 공간에서든. 그런 걸 다 탈피해야 자유롭다. 사실 이 세상에 정말로 자유가 있나 싶기도 하다.
주변에 흔히 있는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재즈계에 입문한 셈 아닌가. 정규 과정을 밟아온 사람들의 불만은 없었나.
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되게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악을 하다 보니. 특히 처음 앨범 나왔을 때 그랬다. 그 사람들도 화가 많이 났을 거 같긴 하다. 외국에서 돈도 많이 쓰고 공도 많이 들였는데도 국내에서 잘 안 풀리는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이 앨범 내고 그러면 아무래도 샘나지 않겠나.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 나도 막 재즈 하는 사람들 욕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반응은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면 당연히 생긴다. 나중에 당시에 자기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고 얘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생각해보면, 좋아했던 사람들은 이미 이런 저런 음악을 하고 성공을 경험한 자리에서 내 음악을 신선하게 들었던 사람들이었고 불편하다 얘기했던 사람들은 그 무렵 같이 고생했던 사람들이었다.
김오키라는 이름의 유래가 궁금하다.
재즈 긱을 처음 한 곳인 일본 오키나와에서 따왔다. 오키나와 가서 내 이름 얘기하면 다 안다. (웃음)
오키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오키나와를 좋아했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재즈 얘기를 다들 많이 하고 재즈 클럽에서 공연할 때도 내게 잘 해주고. 심지어 길에서 공연하는데 술 취한 아저씨가 존 콜트레인 하나 해달라고 하고선 자기가 밥 사겠다면서 돈 주고 가고 그랬다. (웃음) 그게 오키나와에 처음 갔을 때 일어났던 일이다. 그곳 국제거리 백화점 앞에서 카혼 연주하던 일본인 친구한테 무작정 함께 연주해보자고 해 저녁 여덟 시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같이 하다가 그렇게 돈도 받고. 또 거기 있던 자위대 사람들이 공연 너무 좋다고 빵 이만큼 사 오고, 또 순찰하던 경찰도 지나가던 폭주족도 손뼉 쳐주고. 좋았다. 원래는 일본을 되게 싫어했다. 막 친일파 청산 이러면서. 막상 가보니 싫어할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일본어를 굉장히 잘하겠다. 즉석에서 함께 연주하고 오랫동안 생활했을 정도면.
전혀. 국제거리에서 그 친구랑 공연했을 때도 2G 핸드폰 사전 뒤져가며 의사소통한 거다. 하고 싶은 말을 한영사전으로 찾아 보여주면 걔가 다시 영어사전으로 일본어 뜻 찾아 알아듣고, 또 반대로 일본어를 영어사전으로 찾아서 내게 보여주고.
그럼 그곳 생활이 잘 맞았나. 특히 음악 하기에.
잘 맞았다. 재즈클럽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너무 잘해주더라. 연주자들과도 재밌는 얘기 나누고 어떤 아저씨는 자기가 마시던 위스키 한 병 통째로 주고 그랬다. 여기서 연주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도 와서 하라고 좋게 얘기해 줬다. 그러면서 정이 많이 쌓였다. 서로 많이 좋아했다. 일본어랑 오키나와 말 배우려 노력했고 오갈 때마다 김 이런 거 박스로 사다가 선물해주기도 했다. 거기서 살아야겠다며 결심까지 하고 이름도 바꿨다. 그런데 한국에서 앨범이 은근히 잘 되는 바람에.... (웃음) 정착은 안 했다.
우리나라로 돌아와 적지 않은 시간 활동했다. 요즘 음악 신에 있으면서는 무얼 느끼는지.
홍대로 넘어와서 처음 공연했던 바다비, 씨클라우드 같은 공간이 지금은 없어졌다. 이런 곳이 없어지면 결국 내가 할 곳이 없어지게 된다. 게다가 없어지는 이유가 타당한 것도 아니다. 테이크아웃드로잉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선 내가 공연할 수도 있고 커피 한 잔 공짜로 얻어 마실 수도 있고 근처 지나가다가 화장실 가고 싶을 때 들를 수도 있다. 그런 곳이 없어지는 거다. 내 입장에선 싸울 수밖에 없다. 물론 노래로 싸워서 크게 바뀌는 게 있겠냐만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죽고 할 건 하고 죽는 게 맞지 않나.
고민이 많겠다.
합정동에 있는 ‘1969’에서도 연주를 많이 하는데 그곳마저도 요즘 오락가락한다. 외국에서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얼마 전 도쿄에 있는 재즈 클럽에 다녀왔다. 엄청 오래된 곳이다. 크기도 여기(인터뷰 장소)의 3분의 1만 하다. 그렇게 조그맣고 오래된 공연장인데 계속 유지를 한다는 게 너무 부럽다. 요즘 우리나라에선 조그맣고 잘 안 된다 싶으면 다 밀어버린다. 미친 짓이다.
사실 많이들 힘들다고 얘기한다. 자본에 많이 묶여있는 상태고.
다들 힘들 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많이 연주한다. 한 달에 약 20일가량을 공연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게 다 내 돈 들여 하는 거다. 누가 보면 내가 뭐 굉장히 돈 많이 버는 줄 안다. 실제로 보면 차 기름값 빠지고 밥값 빠지면 크게 남는 게 없다. 그렇다고 관객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 많이 모이는 페스티벌 무대에는 그냥 샤방샤방한 음악 하는 뮤지션들이나 음악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이나 오른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주변에도 그런 경우가 많은가.
학교 강사로 나가면서 돌아와서는 알바하고 배달 나가는 친구들이 많다. 물론 음악 생활을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된다. 하고자 하는 음악과 다른 음악을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러면 정말로 음악을 하고 있다고 보기가 힘들지 않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하는 거니까. 이 문제는 정말로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깜깜하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오히려 쓰고만 있으니.
지난 앨범에 대해 얘기해보자. <격동의 시간여행>은 록 느낌이 강하게 나는 음반이었다.
원래 록 스타일로 가려고 했는데 많이 바뀌었다. 같이 했던 사람들이 다들 재즈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진짜 록 느낌이 안 나왔다. 게다가 요즘 록 하는 사람들하고 자주 다니다 보니 그게 첫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더욱 느끼게 됐다.
한편으로 다양한 사운드를 실험적으로 구사하기도 했다. 재즈와 록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 민요와 현대음악 식 전자음악도 있었다. 대화라는 또 다른 즉흥연주도 존재했고.
앨범에 있는 다양한 사운드의 경우에는, <격동의 시간여행>이라는 제목대로 한국 현대사에 있던 잊혀가는 여러 역사들을 표현하려다 보니 그런 식으로 만들게 됐다. 그 당시 사건의 느낌을 장르로 나타내보고 싶었다. 「上놈타령」은 좀 더 옛날 느낌을 낸 거고, 타이틀 트랙 「나는 겨드랑이가 문득 가렵다」는 이상 시인 단락에서 가져와 만든 거다. 「5월의 형제」는 5월 18일에 관한 거고. 각각 스타일이 그렇게 잡히지 않았나 싶다.
'하고 싶은 말'에 있는 형제간의 대화는 어떻게 만든 건가.
둘 다 연극을 한다. 형 파트 맡은 친구는 영화도 찍었고 동생 파트 맡은 친구는 뒷판 연극까지 했다. 그 트랙 녹음도 악보만 준 것처럼 상황만 던져줬다. 이어지는 트랙이 「5월의 형제」라는 것도 함께. “너는 형이고 너는 동생이야.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데 웃기면서도 슬퍼야 해.” 그러고 나서 아이폰 두 대를 양손에 쥐고 둘 앞에 갖다 댄 채 녹음했다.
만족스러운 음반이었나.
얼마 전에 1집, 2집 둘 다 다시 들어봤는데 전체적으로는 1집이 훨씬 더 좋았다. 1집에 돈을 더 많이 들여서 그런가 싶다. 녹음 상태도 그 앨범이 더 잘 잡혀있고. 구성은 2집을 더 좋아한다. 2집 곡이 안 좋아서 그런 걸까(웃음)
평소 레코딩 방식과 협연 방식이 궁금하다. 다른 연주자들과 합을 자주 맞추고 구상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하고 가나.
나오는 느낌을 본다. 공연으로 1,2년 같이 연주하기도 하고 곡을 쓰면서 영향을 받았던 책을 같이 읽기도 했는데도 그 느낌이란 게 안 나오면 결국 맘에 안 들게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하고 다시 팀을 짜 연주한다. 여러 번 같이 작업했던 사람들하고는 그 점에서 쉽게 작업했던 것 같다. (김)성배 형도 그렇고 1집에서 피아노 치는 친구랑 드럼 치는 친구도 그렇고 연주하는 방식이 스탠더드 하는 분들과 많이 다르다. 이 사람들하고는 잘 맞았다.
작곡은 어떻게 하는가.
그림을 먼저 그려놓는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을 보다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에 대한 노래를 만들자고 생각한다. 그럼 인물에 대해 앞뒤를 다 보고 제목을 만든다. 제목이 그래서 길어지는 것 같다.
유독 트랙 제목이 길다. 제목으로 많은 걸 표현하는 듯한데, 김오키의 음반에서 제목은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나.
가사가 없는 대신 제목으로 어느 정도 나타낸다. 긴 제목은 어떤 것에 대해 말할 때 이런저런 단어들을 섞어 쓰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 같다. 막 고상하게 제목 짓고 하는 건 잘 모른다. 싫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경향이 요즘엔 약간 깨졌다. 방백 앨범 보면 제목이 두 글자씩 들어간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이미지를 그려내는 걸 보면서 그 또한 좋은 방법이겠다 싶었다. 나 또한 해온 방식들을 무조건 고수하는 사람도 아니니.
제목이 가사를 대신한다는 느낌도 있다.
보컬이란 걸 싫어한다. 연주자의 고집이다. 통기타 하나 들고나와서 가사 한 번 읊으면 이야기 전달이 다 끝나지 않나. 연주자들이 여러 가지 소리로 이야기를 표현할 때의 효과가 떨어진다. 그리고 모든 신경이 메시지에 가기 때문에 음 자체에 대한 집중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제목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상상하는 일이 어렵게 되는 셈이다. 그걸 꼭 왜 해야 하나 싶다(웃음) 하지만 다음 앨범에는 보컬이 나온다. 보컬과 가사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자유, 독립, 평화 같은 단어가 제목에서 많이 보인다. 사회 속 개인에 관한 이야기들도 많이 하고 있고. 텍스트의 소재들은 어디서 가져오는 건가.
1970년대, 1980년대에 자랐던 사람들은 집 안에서 억압을 받고 자랐지 않나. 나 또한 그 시절부터 오랫동안 가슴에 응어리져있던 걸 밖으로 표출해내는 식으로 음악을 만든다. 또 당시의 상황이 지금 사회와도 조금씩 맞아들어가니 특히나 더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1집 앨범 커버를 찍었던 장소가 내가 초등학교 때 살았던 동네다. 그리고 지금은 재개발 구역으로 확정돼서 마을 자체가 다 없어진 동네이기도 하다. 내 얘기가 이런 식으로 사회 문제와 맞물린다.
김오키의 음악에서는 재즈라는 형식이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코드 진행, 리듬 구성, 악기 구조 등 최소한의 정도에서만 이뤄지는 느낌이랄까.
구조적인 부분이나 코드 진행, 악보 같은 실재적인 요소들은 다 있다. 단 그걸 잡아놓긴 잡아놓되 실제 연주할 때에는 이대로 똑같이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그저 느낌대로 연주하고, 그러다 원치 않는 무언가가 나오면 또 그것대로 연주하고. 1집 작업할 때에는 악보를 연주 당일에 보여줬다.
즉흥성과 전위성이 돋보인다.
꼭 장점으로 볼 필요는 없다. 자기가 나오는 걸 그대로 표현하는 거니까.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인 내게 그게 어울리는 거고. '에이, 비, 씨, 디'를 얘기할 때 “에이, 비, 씨, 디”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디, 씨, 비, 에이”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의 경우에 있는 셈이다. (백)현진이 형도 마찬가지다. 매일 뭔가를 흥얼대고 있다. 자기를 계속 이야기하는 거라 보면 된다. 숨의 박지하 씨는 반대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 사람은 국악 중학교 나와서 정규 클래스를 그대로 밟아온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방식이나 스타일을 자유롭게 하는 날 되게 신기해한다. 어떤 게 더 맞다고 할 수는 없는 얘기다. 다 장단이 있다.
이러한 스타일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
원래 되게 말랑말랑한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다. 재즈도 사실 쳇 베이커 식의 스탠더드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러다 박재천 선생님께서 하시는 60인 프리재즈 오케스트라 프로젝트 SMFM에 참여했는데 선생님께서 좋게 봐주시고 가르쳐주셔서 이 방향으로 하게 됐다. “한 번 미친놈처럼 해볼 생각 없냐”는 말씀, 여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톤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조용하게 소리를 낸다고 해서 톤이 부드러워지는 건 아니다. 크게 낸 소리도 부드러울 수 있고 작게 낸 소리도 강할 수 있다. 선생님 연주가 그렇다. 작게 쳐도 음이 빡빡 들린다. 많이 배웠다. 그전까지 씨제이 킴 형이 기반을 닦아줬다면 그 다음으로 박재천 선생님께서 스타일을 잡아주셨다.
정통적인 재즈보다도 더 듣기 쉽다는 감상을 들은 적 있다. '이러한 연주', '어떠한 스타일'을 고려하지 않고 들어도 되니까.
몇 년 전 작은 클럽에서 아주머니랑 할머니들 앞에서 연주한 적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즉흥으로만 연주했는데 너무들 재밌게 들어주셨다. 사실 이분들 대다수는 음악을 많이 듣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대안학교 연주에서도 어린애들이 되게 좋아했다. 고리타분하게 가지 않고 원초적으로 음을 내다보니 그랬던 것 같다. 음악이란 게 사실 그렇다. 그냥 들으면 된다.
그래서인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러 아티스트들에게 환영받는 것 같다. 요즘 피쳐링을 많이 하지 않았나. 어땠나.
로다운은 되게 섬세하게 작업했다. 가장 어려운 피쳐링이기도 했다.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무대에 올라서 에너지를 만들어왔는데 이 작업에선 혼자 스튜디오에 들어가 혼자 듣고 혼자 불어서 에너지를 내야 했다. 공연장에서의 연주와는 달랐다. 김사월 음반에 들어갈 때는 조금 편했다. 프로듀서 (김)해원이가 대강의 이미지를 주고 내가 연주하는 식이어서 수월하게 했다. 문제는 20대 처녀의 마음을 표현하는 작업이었던 지라. (웃음) 막 내가 20대 여자였을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그랬다. 녹음은 두 번만 했다. 성배 형이나 (방)준석이 형이랑 할 때도 비슷했다. 그 사람들 모두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음악을 만든다. 서사무엘 같은 힙합 쪽 뮤지션이랑 할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했다. 그 장르에서는 프로듀싱이 어떻게 잘라 붙이느냐에 따라 곡 느낌이 많이 좌우되니까. 오히려 더 쉽게 연주했다.
피쳐링이 어렵진 않았나.
모든 피쳐링이 어렵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음악을 하게 되는 거니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음에 안 맞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구나 싶을 땐 미안하기도 하다.
연주할 때 김오키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때마다 다르다. 슬픈 감정에 빠져서 연주하기도 하고 술에 취해 연주하기도 하고 그렇다. 구체적인 생각에 맡기기보다는 그 순간에 막 소리를 내는 식인 것 같다. 공연하다가 아예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공연이 잘 되는 날에 소리를 많이 지른다.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 그리고 앞으로의 음악적 방향을 표현한다면 어떻게 말하고 싶은가.
스피리츄얼한 음악을 하고 싶다. 현재도 추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음악을 계속할 거고. 또 나만이 낼 수 있는 한국의 노래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다.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세 아티스트를 꼽아달라.
항상 꼽는 세 명이 있다. 파로아 샌더스, 조 헨더슨, 아치 셰프. 파로아 샌더스는 아프리칸 스피리츄얼 음악을 했고 조 핸더슨은 보사노바와 프리재즈 아방가르드 음악을, 아치 셰프는 아프리칸 아방가르드 음악을 했다. 이 셋의 앨범은 뭘 들어도 다 좋다.
인터뷰 : 김반야, 이수호, 정민재
사진 : 정민재
정리 : 이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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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