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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책장

기록물으로서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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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 자리에 있었더라면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비슷한 변명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평생 미안해하면서. 혹은 말하는 자가 아니라 말해지는 자, 이미 세상을 떠난 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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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성가족재단에 옮겨진 강남역 10번출구 추모 포스트잇. 출처_서울시여성가족재단

 

예스24 상반기 베스트셀러 분야별 도서 동향 분석을 보면 유독 기록물이나 르포르타주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많이 올렸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나 『필리버스터 : 민주주의, 역사, 인권 자유』, 곧 출간될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등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굵직한 사건이 모두 책으로 나왔다.


지금부터 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의 슬픔과 기쁨』, 8쪽)


기록을 시간순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보고 있자니 어지럽다. 오늘은 이 내용에 대해 글을 쓰자, 하고 시작해 놓고는 겁이 난다. 나는 유려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자신이 없다. 학교 다닐 때는 늘 리포트 분량을 채우지 못해 쩔쩔매다가 기한을 한참 넘기고 남들이 낸 장수에 한참 못 미치는 짤따란 보고서를 냈고, 꿰어야 보배가 되는 자료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물이든, 소설이든, 단행본 두께를 훌쩍 넘겨서 글밥만으로 책을 채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경탄이 나오면서 걱정이 된다. 저 자료들을 어떻게 다 정리하고 말을 하지. 저렇게 할 말이 많다니. 나라면 기억에 휩쓸려 중간에 눈 감고 도망쳐 버릴 텐데. 사건을 세세히 기록한 기록물은 읽기도 힘들다. 기록자가 무슨 생각인지, 기록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지 무거운 책장을 넘기며 직접 알아내야 한다.


“바보 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


르몽드의 창간자 위베르 뵈브메리가 말한 것처럼, 이 책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프게 말합니다. 읽는 동안 덮어버리고, 집어던지고, 찢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을 것입니다. (『세월호, 그 날의 기록』, 643쪽)


사실 나는 내가 왜 부채감을 느껴야 하나 화가 난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는 단체로 서로 다른 경중의 PTSD 같은 게 걸려 있는 것 같다. 스크래치가 아물기도 전에 다른 사건이 터진다. 계속해서 말하고 기억하는 게 울증이 되려고 한다. 어떻게 됐든 농담을 해보려고 하나 죽음과 위악 앞에 농담하기 쉽지 않다.


“우리 월요일 날 만나서 영화 보고 놀자” 하면서 친구가 대화를 마무리했고 저도 “그래, 전화해”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러고 나서 저도 제 매장으로 왔죠. 그런데 (동료직원) 애들이 와서 “언니, 삼풍백화점 무너졌대” 딱 그러는데 아, 그 때는 가슴이 팍 이상하니 온통 회색으로 싹 변하더라고요. 매장에 주저앉았어요.
사고 이후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의도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죄책감이 심하게 밀려오는 거예요. 마음속으로 계속 친구에게 얘기했어요, 미안하다고. (『1995년 서울, 삼풍』, 15~16쪽)


내가 저 자리에 있었더라면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비슷한 변명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평생 미안해하면서. 혹은 말하는 자가 아니라 말해지는 자, 이미 세상을 떠난 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깨달음은 구어체로 재생된 사건에서 온다. 입말은 힘이 있다. 정돈된 입말은 기억 속에 박힌다.


강남역 살인 사건 애도의 글이 책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포스트잇의 문장뿐만 아니라 인터넷의 다른 댓글들도 같이 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특정 다수가 ‘도와주세요’ 라는 비명을 들었을 때는 도움을 주지 않고 지나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도와주세요’를 듣고도 회피한 기록들이 같이 남아있기를, 그래서 누군가가 고통에 등을 돌렸다는 사실조차 기록에 남길 바랐다. 기억해도 되지 않을 삶은 얼마나 살기 편한가. 매일매일 ‘이 태평천하에!’ 라고 소리칠 수 있는 날들. 그러나 공유된 기억은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기록은 다수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말하고 있다. 


 “오늘 또 왔어요. 사흘이 지나도 나흘이 지나도 계속해서 화가 나고 공포스러운데 당신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아직 그려보지도 못한 꿈, 가족, 친구들, 이런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그 순간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뿐인 오늘도 너무나 미안합니다(중략)” (『강남역 10번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그러나, 그런데도, 기억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맞서기보다 한 켠으로 미뤄 놓고 싶을 때가 더 많다. 오늘은 책장의 책으로 모셔놓고 회피하기로 한다. 두꺼운 두께만큼의 부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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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획 | 나무연필
사건 다음 날 오전부터 그녀가 살해된 곳 인근의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포스트잇 추모’가 시작되었다. 출구의 외벽은 이 사건과 관련한 글이 담긴 포스트잇으로 뒤덮였고, 화환도 줄을 이었다. 서울 한복판의 강남역 10번 출구는 그렇게 피해자를 추모하면서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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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 | 진실의힘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10개월 동안 방대한 기록과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2014년 4월 15일 저녁 세월호가 인천항을 출항한 순간부터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급격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해 10시 30분 침몰할 때까지 101분 동안 세월호 안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생하게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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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서울, 삼풍서울문화재단 기획/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저 | 동아시아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서울의 아픔, 삼풍백화점’은 재난의 당사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하는 구술ㆍ기록프로젝트이다. 5명의 ‘기억수집가’가 2014년 10월 7일부터 2015년 7월 30일까지 약 10개월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총 108명을 인터뷰했다. 책에는 59명의 구술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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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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